1. 불확실성과 과학
사람들은 종종 과학은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의 법칙을 찾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은 적어도 20세기이래로 점점 더 불확실성에 대한 것, 확률에 대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과학적 시각이, 특히 고전과학적 시각이 어떤 특징을 가졌는가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현대과학이 불확실성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왜 점점 더 중요해 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양자역학과 혼돈이론
과학에서 불확실성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양자역학과 혼돈이론이다. 이것이 오늘날 불확실성이 점점 중요해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과학자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정확히 예측하고 정확히 아는 것에 대해 포기한지 오래라는 점을 알기 위해서라면 이런 이론들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먼저 양자역학을 보자. 양자역학이 나온 지는 이미 백년 가까이 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이날 이때까지 아인쉬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도 우리는 자연이 그러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양자역학은 과학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객관성이라던가 인과론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포기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객관성이라던가 인과론이 무슨 말인지를 양자역학을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객관성이나 인과론의 의미는 자명해 보이며 모름지기 과학이라면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는게 당연한 것같다. 만약 세상일들이 아무 원인이 없이 결과가 만들어 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과학적 이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을 것같다. 또한 우리는 객관성을 믿는다. 과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나에게 존재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달은 관찰자와 상관없이 언제나 하늘에 떠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하늘을 쳐다보는 그 순간 갑자기 달이 하늘에 나타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 객관성과 인과론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파괴된다. 그렇기 때문에 빛은 입자이기도 한 동시에 파동이기도 하다는 기괴한 문장이 양자역학에서는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두개의 틈을 가진 중간 벽을 향해 빛을 쏜다고 해보자. 그 중간벽의 너머에는 하나의 스크린이 있어서 우리가 빛을 쏘면 중간벽을 통과한 빛이 그 스크린에 비춰진다.
우리는 광양자효과로 알려진 현상 때문에 빛이 야구공처럼 하나 하나씩의 광자로 쏘아질 수 있으며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마다 스크린위의 어느 한 점에 광자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번 그렇게 광자를 쏘아 낸 결과는 우리가 야구공을 던질 때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우리는 스크린 위에서 파동이 간섭했던 것같은 무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빛이 정말 야구공 같은 거라면 빛이 동시에 유령처럼 두개의 서로 다른 길을 따라 날아가면서 서로 서로에게 영향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빛이 파동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그렇다면 왜 반대편 벽에 빛이 도달할 때 그것이 단 한 점으로 부딛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빛은 간섭을 일으키면서도 입자처럼 행동한다.
고전역학적 의미에서 인과론이나 객관성을 믿는 사람은 우리가 단지 방법을 모르는 것이고 무지한 것 일뿐 빛을 쏘아 주면 반대편 벽의 어디에 빛이 떨어지는 지를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이 세상에 그런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빛은 야구공처럼 예측가능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유령처럼 두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며 빛이 반대편 벽의 어디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확률적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다시 말해 이것은 어느 정도 원인이 없이 결과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 인과론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부정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자연이 그럴 뿐이다. 우리가 이해가 안돼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그리고 그 양자역학적 현상은 지금도 세상의 온갖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 혼돈 이론이라고 불리는 비선형 동역학에 대해 말해 보자. 1960년, 미국의 수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츠는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새로운 방정식을 사용했다. 그 이전의 이론들은 기상변화를 예측하기 위해 소위 선형적인 방정식을 쓰고 있었는데 반해 그가 본 자연은 분명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그의 새로운 방정식에 따라 날씨가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예측해보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오늘의 상태에서 미래의 날씨를 예측하는 그 방정식은 초기조건이 소수점 단위에서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이것이 혼돈이론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로렌츠 끌개의 발견이며 로렌츠는 초기조건에 민감한 결과를 주는 이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나비효과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나비효과라는 것은 북경의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미국에는 태풍이 올 수 있다라는 말로 풀어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혼돈현상이 벌어지는 시스템에서는 제 아무리 작은 초기조건의 차이라도 나중에는 상상할 수 없이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우리는 방정식을 엄밀하게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더 조심해서 문제를 엄밀히 풀면 되는 거 아닐까? 아니다. 혼돈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의 방정식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시스템의 변화를 묘사하는 방정식을 썼다고 하자. 그런데 그 방정식이 혼돈현상을 보인다. 그리고 심지어 세상을 관측해서도 그런 혼돈현상과 비슷한 일이 관측된다. 그렇다면 이 방정식은 그런 혼돈현상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즉 혼돈현상이 언제 일어나는가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올바른 예측을 하지만 혼돈현상이 이미 일어난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방정식들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왜냐면 방정식이 자연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연에 대한 간략화를 포함한다. 인구증가나 날씨 예측을 하는 방정식을 쓰면서 개개인의 몸 안에 있는 각각의 세포의 움직임을 모두 포함시킨다던가 공기를 이루는 모든 분자들의 운동을 하나하나 전부 쫒아가는 방정식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가 무시한 부분들, 단순화한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초기조건에 무한한 예민성을 보이는 결과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무시했던 것을 다시 돌아봐야 하고 결국 우리는 그 방정식이 더 이상 제대로 자연을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애초에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세운 방정식 자체가 더 이상 옳지 않으며 북경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어진다.
혼돈현상은 양자역학보다 더욱 확실하게 우리의 무지를 보여주고 불확정성을 보여준다. 이 세상은 일단 비선형과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려고 하면 비선형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비선형성들하나 하나는 모두 잠재적으로 우리의 무지를, 즉 세상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통로가 될 수가 있다. 즉 양자역학에서 그러하듯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를 만들지 않는다. 과거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또다른 인과론의 좌절이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뉴튼의 방정식의 초기조건이 결정되면 미래는 정확히 결정된다고 믿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 방정식을 쓸 수도 풀 수도 없을지는 모르지만 원리적으로 말했을 때 미래는 이미 현재에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미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고 새로운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양자효과와 혼돈현상이라는 시점을 가지고 자연을 보면 세상은 전혀 달라보인다.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세상일이란 본래 그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는 것,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다.
수명이 짧고 복잡한 것을 위한 과학
실은 21세기에 불확실성이 과학에 있어서 점점 더 중요해 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과학의 연구대상이 이전과는 달리 수명이 짧고 복잡한 것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왔고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불확실성을 다루는 수학인 확률론이 물리학을 포함한 공학, 생물학, 사회과학등 많은 분야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뉴튼은 뭘 연구했던가? 뉴튼은 케플러의 법칙을 중력의 법칙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케플러의 법칙이란 매우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천체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연구 주제가 다르다. 물리학에서 화학을 넘어 생물학이나 뇌과학이 가장 인기있는 주제가 되었다. 이 점은 네이쳐 같은 세계적 과학잡지의 내용이 요즘에는 상당부분 생물학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생명과 수소 원자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생명체는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데 수소원자는 실질적으로 무한대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학은 시간과 변화 그리고 불확실성의 존재감을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과학의 본질은 크게 바뀌고 있다.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사물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게 무슨 말일까 싶지만 사실 물리나 수학적인 시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수학 이론은 더 더욱 그렇지만 물리학도 그 본질을 보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찾을 수 있다. 즉 피타고라스의 법칙이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법칙이듯이 물리학에서 연구하는 것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존재,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들이다. 사물은 원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무한한 수명을 가지고 변화하지 않으며 – 물론 핵융합이니 분열이니 하는 것을 제외하자면 – 그 원자들의 움직임은 다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고 작동하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 것이 세상에 대한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시각이다. 원자가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물리학자들은 더 근본적인 입자, 더 근본적인 법칙을 찾을 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통일장 이론 같은 것이다.
이런 학문의 근원에는 따지고 보면 결국 변화는 표면적인 것이며 세상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다. 진짜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뉴톤이 말하는 질점이란 크기가 무한히 작고 질량을 가진 작은 점이다. 이것은 수학적 관념으로 따라서 시간에 무관하게 존재하며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전적 과학의 시점은 변하지 않는 것들로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현상이나 사회현상을 다루게 되면 우리는 그런 물리학적인 접근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수학적 수준의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존재하는 물리학과는 달리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개체는 애매한 존재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생명체는 짧은 수명을 가지고 살다가 죽어 사라진다. 거기에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뇌를 보고 전두엽이니 측두엽이니 하고 이름을 붙여 그런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런 말의 의미는 우리가 저기 전자가 있다거나 중성자가 있다라고 말할 때와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로 생명체는 애매하게 존재한다.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어제의 수소원자는 오늘의 수소원자와 같은 것이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상당히 다르다. 어제의 한국과 오늘의 한국도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라던가 한국이라는 말로 뭔가를 가르킨다. 우리가 변화한다고 할 때 도대체 우리라고 말해지는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이 존재하는지 아는가. 변화하는 것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정확한 정의가 없는 것을 논리적으로 정확히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일단 그렇게 생물학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에 명확하게 존재하는게 있기는 한건지 의구심이 든다. 우리 동네에 앞산이 있다고 하자. 오랜기간 존재하는 것 같은 산도 시간이 지나면 닳아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내가 우리 동네 앞산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존재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일까. 정확한 정의를 가지지 않고, 한정된 수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들은 말하자면 항상 뿌옇게 보이는, 부분적으로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이것이 문제다. 알고 보면 세상의 수없이 많은 것들은 이렇게 애매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명확하고 확실한 것을 찾아헤매는 과정속에서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장님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미 말했듯이 현대과학의 주류가 점점 더 수명이 짧고 복잡한 것을 연구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확실성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말하는 행위의 기초적 성질이 바뀌어 가고 있다. 시간에 따라 불변하는 것에 대한 연구에서 애매하게 존재하고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것에 대한 연구로 말이다. 수소원자와 중력법칙은 영원하지만 인간이나 뇌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물리학에서 연구하는 소립자도 이젠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에서의 불확실성의 역할은, 확률의 역할은 점차로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즉각 느끼지 못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 나 자신도 그러한 사람이지만 물리학을 전공하고 나중에 신경과학의 연구로 연구주제를 바꾼 예는 세상에 흔하다. 그런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바로 이 엄밀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물학자보다 수학에 능하고 따라서 뇌에 대한 수리모델을 만드는 일을 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종종 엄청나게 정교하고 복잡한 수학모델과 그에 따른 긴 계산결과를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험가들은 그런 수학 계산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실험의 현장에 가보면 생물학의 실험이란 매우 큰 불확정성을 가지고 애매하게 정의된 양을 측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의 대상은 전자나 수소원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 법칙은 근사적으로만, 정성적으로만 옳다. 중력법칙처럼 힘은 거리의 정확히 제곱에 비례하게 되는게 아니다. 물리학 같은 정밀과학에만 익숙한 사람은 실험결과에 대해 지나친 엄밀성을 기대하고 데이터에 존재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전부다 자기 모델에서 재현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개되어 적정수준 이상으로 복잡해진 이론은 대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잊혀진다. 아무 도움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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