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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불확실성의 산책

불확실성의 산책 5

by 격암(강국진) 2020. 3. 6.

5. 지적인 행위와 불확실성

 

분류의 어려움

 

과학은 물론 지적인 행위다. 과학적 사고란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고를 말한다. 그런데 지능을 가진다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아무도 만족할 만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공학에는 기계학습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이 부분을 공부하면 이런 질문에 대한 한가지 가능한 답을 얻게 된다. 기계학습이란 기계로 하여금 경험과 데이터에 근거하여 규칙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다. 통상의 프로그램이 모든 가능한 경우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의 목록을 기계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라면 기계학습은 기계가 과거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 까지 대처하도록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고 일반화를 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가 사람처럼 지능을 가지게 하는 것이 기계학습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기계학습을 공부해보면 결국 지능적 사고의 기반은 사물을 분류하는 일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런 저런 잣대를 도입해서 사물을 이런 저런 경우로 분류하는 것이 지능의 시작이다. 세상일을 잘 분류하는 것이 좋은 지능이고 그걸 못하는 것이 열등한 지능이다. 그리고 분류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공학자들이 그걸 잘하기 위해 이런 저런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부딪히는 문제는 생각해보면 공학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은 신기하게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전화도 걸어주고 검색도 해준다. 이 음성인식이란 기술도 결국 음성을 분류하는 기술이다. 어떤 소리가 들릴 때 이 소리를 무슨 말로 인식할 것인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으로 분류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술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장난감같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매우 공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지금 실생활에서 그런 기술이 가능한 것은 수많은 공학자들이 전에만 해도 이거 실생활에 쓰기는 틀린거 아니냐고, 너무 문제가 어렵다고 고민했던 문제를 오랜간 고민하고 도전해서 발전을 이뤄낸 결과다.

 

물론 데이터의 분류가 간단한 경우도 있고 아주 어려워 지는 경우도 있다. 분류가 어려워지는 대표적인 경우는 차원의 저주를 받는 경우 즉 데이터의 양이 작고 분류하고자 하는 대상의 특성이 1차원적인게 아니라 매우 높은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앞에서 예로 든 목소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버지라고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1-2초정도의 시간동안의 음성신호가 되는데 그걸 백분의 1초정도 간격으로 데이터를 추출하면 우리는 백에서 이백차원을 가지는 음성신호를 얻게 된다. 즉 하나의 음성을 이백차원의 벡터에 대응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아버지라고 말할 때마다 약간씩 다르게 말하며 사람마다도 목소리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라고 말하는 음성신호의 예를 많이 모을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모아진 음성신호의 양이 데이터의 양이다. 문제는 아주 순진하게 접근할 경우 우리는 말도 안되게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여자를 평생에 딱 한번 만났는데 누군가 프랑스여자는 어떠냐라고 질문을 하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우리는 모른다고 답해야 옳다. 다음번에 만나는 프랑스여자는 이번 프랑스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있기 때문이다. 분류를 하는데 데이터의 양이 적으면 이런 상황처럼 된다. 그런데 차원이 높은 신호의 경우에는 우리는 거의 언제나 데이터 부족에 시달린다. 가능한 신호의 경우의 수가 차원의 커짐에 따라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원의 저주다. 동전이 하나면 앞면과 뒷면 두가지 경우가 되지만 동전이 두개면 4가지, 동전이 세개면 8가지의 경우로 경우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가능한 신호가 1억개나 1조개쯤되는데 2-3개의 예를 보고 이 신호는 이렇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방법으로 분류를 하는 경우 조금 다른 상황에서 말하는 아버지라는 소리는 전혀 아버지라는 소리로 분류가 되지 않는다. 즉 음성인식이 되지 않는다.

 

분류를 힘들게 만드는 또 다른 문제는 주관성의 문제 혹은 차이를 정의하기의 문제이다. 데이터들은 대개 서로 다 다르다. 어떤 차이가 큰 차이고 어떤 차이가 작은 차이일까? 이 질문은 언제나 답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 한 쌍의 남녀와 한 쌍의 암수 고릴라가 있다고 하자. 우리가 이 4개의 개체를 두 개의 집단으로 이걸 나눈다고 할 때 당신은 아마도 인간집단 하나와 고릴라 집단 하나로 나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인간은 고릴라와 다르다라는 말에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누는 기준이 성별이라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나- 남자는 수컷 고릴라와 한 짝이 될것이고 여자는 암컷 고릴라와 한 짝이 될 것이다.

 

이렇게 분류를 하자면 우리는 어떤 차이가 중요하고 어떤 차이는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 음성인식을 한다고 하자. 왜 어떤 소리들은 아로 들리고 어떤 소리들은 어로 들릴까. 소리들간의 어떤 차이가 아와 어로 들리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내가 말한 아와 어는 서로 틀리지만 내가 말한 아와 당신이 말한 아도 서로 틀리다. 우리는 그 차이를 측정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으로 소리를 나눠야 음성인식을 제대로 하는 기계를 만들 수가 있으며 이것은 인간이 소리를 인식하는 방법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지역마다도 다를 수 있다. 아와 어를 구분하는 우주적이고 절대적이며 완전히 객관적인 법칙은 없기 때문에 사람도 실수를 한다.

 

모든 차이는 어떤 기준으로 보냐에 따라 큰 것일 수도 있고 작은 것일 수도 있다. 두 노동자들간에 월급이 100만원차이가 난다면 엄청난 차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은 저소득자로 또 한 사람은 고소득자로 구분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빌게이츠나 이건희 같은 부자가 보면 그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 두 사람은 모두 월급쟁이로 함께 구분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짜장면보다 고급 스테이크는 가격기준으로는 열배이상 비쌀 수 있지만 맛을 기준으로 했을 때 과연 그런 차이가 나는가는 의문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차이는 우리가 차이를 측정하는 기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그 기준이 뭐가 되어야 하는가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도 과학 분야에 등장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얻은 데이터를 그래프를 그릴 때 그걸 로그값으로 그리는가 그냥 원래값으로 그리는가에 따라 그래프가 전혀 달라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쪽에서는 우리의 이론 예측치가 측정치와 거의 다르지 않게 보이는데 다른 방식으로 그래프를 그리면 차이가 엄청나 보인다. 여기서도 우리는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하는 질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분류는 기본적으로 주관성을 포함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분류도 당연한게 아니다. 그건 어떤 목적을 위한 계량화, 어떤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어쩌면 이래서 지능이란게 뭔지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지도 모른다.

 

분류를 어렵게 만드는 세번 째 문제는 우리가 모든 정보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데이터를 기준으로 대상을 판단한다. 그런데 그 데이터는 언제나 그 대상을 축소해서 대표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바람을 피는 남자는 제대로 된 인간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바람둥이 클린턴 대통령은 분명 부시 대통령보다 나쁜 사람이며 따라서 당신이 미국의 시민이라면 당연히 부시를 지지해야 할 것이다. 혹은 가사일을 많이 하는 남자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가사일의 분담에 열심인 김교수가 전혀 그렇지 않은 오교수보다 훌룡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따라서 모든 면에서 김교수는 훌룡한 사람이고 옹호해 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정말 옳을까? 혹시 그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측면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판단하기에 가장 중요한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는가?

 

많은 분류의 문제에서 우리는 분류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음성인식의 경우 주어진 음성신호의 몇몇 특징만 가지고 분류를 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생기지만 더 이해하기 쉬운 예는 아마도 광고일 것이다. 광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하는 것같은 효과를 발생시킨다. 광고는 시청자에게 그 물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그 물건을 사고 싶게 만드는 정보만을 선택해서 제공한다. 즉 선택적 정보제공을 통해서 소비자가 구매를 하자는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를 보기보다는 인터넷에서 실사용자의 간단한 평을 보는게 나에게 이 물건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진실된 사실들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전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들을 선택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 즉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뭘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분류는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이것이 광고의 핵심이며 남을 비방하는 기술의 핵심이다. 정보를 선택해서 제공하고 나쁜 분류가 일어나게 한다. 문제는 어떤 정보가 가장 변별력이 큰 정보이며 중요한 정보인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원이 큰 신호를 분류할 때 이것을 알아내는 것은 종종 분류를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분류의 문제는 뇌과학에서도 중대한 문제로 등장한다. 여러가지 역사적 이유와 실험적 논리적 이유에 따라서 사람들은 뇌의 여기저기에 선을 죽죽 긋고 뇌를 이 부분, 저 부분으로 분류한다. 그런 분류는 뇌를 연구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 분류도 없이 뇌의 구조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며 그렇게 구조를 만들어야 여러가지 지식을 종합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분류가 정말 합리적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알고보면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인종구분을 하듯이 색이나 모양으로 신경세포를 구분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게 정말 신경세포의 제일 중요한 특징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몇천년전의 그리스인은 생각은 심장이 하고 뇌는 그저 펌프에 불과했다고 믿었다. 현대인도 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저지른 실수와 비슷한 실수를 하고 있을 것이다. 현대인도 여전히 뇌를 이해할 수 있는 원천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인이 뇌를 구분하고 뇌세포를 분류하는 방식이 올바른 가는 불확실하다. 우리는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을 것이다.

 

분류는 단순히 공학이나 과학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늘 하고 있는 일이며 해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가 분류하는 일상의 대상들은 굉장히 여러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서로간의 차이를 측정하는 기준은 굉장히 주관적이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부분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분류는 어렵다. 이 문제들 말고도 지능적 행위의 기초인 분류는 애초에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이기도 하다는 문제도 있다. 우리가 일단 어떤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구분을 하기 시작하면 그런 구분은 점점 사회적으로 더 강조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인위적으로 집단을 만들면 사람들은 그 이름과 분류에 집착하고 그 집착이 실제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분류하는 행위자체가 분류되는 집단간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아이와 어른이 구분되고 좌파와 우파가 구분되고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구분되고 경상도와 전라도사람이 구분되고 동물과 사람이 구분되고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구분될 때 그 경계선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 일단 구분이 되면 -그 구분은 분명 경우에 따라 필요한 것 일 때도 있겠지만- 구분자체가 차이를 만들어 내고 대립구도를 만든다.

 

닐 포스트만은 그의 책 유년기의 실종에서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라는 것이 왜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서구에서 아이와 어른의 구분은 애초에 책의 보급과 함께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대량인쇄가 가능해지자 글을 읽어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한 단계에 있는 사람 즉 학교에 가는 어린 사람의 구분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다. 요즘처럼 티브이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아는 것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구분이 생기게 되자 그 구분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가 아닌가의 차이를 넘어서 여러가지 차별과 예의, 관습을 만들어 낸다. 즉 사람들은 아이를 아이처럼 취급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비밀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며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끼리만 있을 때처럼 행동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식의 예절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어린이는 어린이처럼 행동할 것을 기대하고 어른은 어른처럼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이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객관적 사실보다 그 사람이 어린이로 분류되는가 어른으로 분류되는 가하는 구분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지능이 아니라 육체의 나이가 절대적 기준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형편없이 행동하는 사람도 나는 나이가 많다면서 나는 어른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더 이상 왜 어른이면 어린이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는가를 묻지 않게 된다.

 

닐 포스만의 이야기는 분류란 사회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누군가가 어떤 분류나 구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다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데이터에서 쉽게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는 쓸데없는 관습적 분류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특정한 구분, 예를 들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물론 그 나름의 소용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쓸모보다 그 피해가 더 크다면 그런 구분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사실보다 이름에 더 집착하게 되면 그렇다. 교원자격증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이고 명문대 졸업장이 있으면 반드시 인재이며 박사학위가 있으면 반드시 지식인 인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이름을 만들어 쓰는 것은 종종 백해 무익하다. 애초에 그런 이름붙이기로 분류를 하는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류는 어렵다. 우리는 종종 데이터가 부족하고, 데이터를 분류할 기준이 막연하며, 데이터 자체가 진짜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있을 수도 있고, 우리가 막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분류는 직접적인 분류라기 보다는 관습과 사회적 소통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러가지 분류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종종 저소득층은 이래서 저기를 지지하고 중산층은 이런 영향을 받았고 하는 식의 설명을 그 결과에 가져다 붙이고는 한다. 한국사람은 이런데 일본사람은 이렇다던가, 남자는 이런데 여자는 이렇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사고는 당연히 그런 분류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분류는 많은 경우 의미있는 행위다. 하지만 분류는 잠정적인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분류가 만들어 지고 나면 각각의 집단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를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마치 학생이나 중국인이나 남자들처럼 어떤 이름을 어떤 집단에 붙이고 나면 그들이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가장 이성적인 행동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분류를 의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분류는 애초에 아주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차별들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그 근거가 아주 빈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해의 불확정성원리

 

분류의 어려움에 대해 말했으니 이번에는 데이터 속에 존재하는 질서 혹은 법칙을 찾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여기에는 일찌기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상보성의 원리라고 불렀던 종류의 어려움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고 그들은 의자나 사람처럼 같은 이름을 가져도 또 그 안에서 큰 다양성을 지닌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성질을 논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선 우리는 어떤 이름, 어떤 개념을 등장시킨다. 이것은 물론 분류를 하는 일이고 집합을 정의하는 일과 같은데 그 집합의 정의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그 개념 안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자라는 개념을 '자궁을 지닌 인간'이라던가 'XX 염색체를 가진 인간' 이라던가 하는 말들로 정의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내가 여자라는 집합에 들어가는지 아닌지 결정할 수가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할 수도 있지만 그 문제는 지금 당장 다루는 주제에는 핵심적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개념에는 어떤 정의가 따라 붙어서 우리가 나무, 남자, 여학생등의 개체를 제시했을때 그것이 여자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개념을 써서 집합을 정의한 후 우리는 그 집합 내에 속하는 개체들의 공통된 성질을 따진다. 그러니까 누가 한국인인가를 결정한 후에 한국인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따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관찰을 통해 어떤 특징이나 법칙을 찾아냈을 때 우리는 다수의 관찰을 해야 그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

 

문제는 개체의 수가 매우 작을 때다. 우리가 그 개념으로 정의한 집합 속의 개체들이 가지는 성질을 찾아냈을 때 그 개체의 수가 매우 작으면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그 뭔가를 법칙이라고 부르기가 힘들어 진다. 매우 희귀한 질병을 생각해보자. 이 질병은 전세계에 알려진 환자가 2명밖에 안되는데 발병원인도 모르고 있다. 다만 그 두 명이 여자였다. 이럴 때 이 질병은 여자만 걸리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심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단 한차례의 사례밖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인데 그 경우 환자가 남자였다. 우리는 분명 특별한 다른 정보없이 이 질병은 남자만 걸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훌룡한 과학적 이론은 대개 굉장히 많은 개체를 포함하는 개념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중력의 법칙이나 인간에 대한 법칙은 찾기 쉽지만 제주도 서귀포시에 사는 김부자씨의 앞뜰에 있는 개나리꽃에 대한 법칙은 찾기도 믿기도 힘들다. 그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아주 작은 수의 개체만을 포함하는 상황을 만들어 낼수록 그 상황에 근거한 논리와 과학은 엄밀히 말해 부정확한 것이 되고 틀리기 쉬운 것이 된다. 우리는 인간의 과학을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강국진이라는 한 개인의 과학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수 많은 개체 -이경우 많은 개인들-을 포함하므로 여러 인간들의 공통된 성질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강국진이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것은 -동명이인이 있다는 점을 무시하면- 단 하나의 개체 즉 글을 쓰고 있는 필자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일반화를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한가지 편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린 편법을 택하기 쉽다. 강국진이라는 개체는 '인간'이고 '남자'이며 '한국인' 이라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성질, 남자의 성질, 한국인의 성질을 가진 존재가 강국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오류다. 이 오류는 A 이면 B이다가 B이면 A다가 아니라는 오류다. 강국진이 남자라는 것이 남자의 성질을 가진 것이 강국진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살인범이 신월동 주민이라는 말과 신월동 주민은 살인범이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 앞의 말은 어떤 살인범이 신월동에 살았었다는 이야기고 후자의 말은 신월동에 사는 사람 모두가 살인범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비약을 통해서 실체의 축소를 가져온다. 실제의 강국진이라는 개체를 인간이고 남자이며 한국인인 존재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체는 때로는 엄청난 착각을 만들어 낸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아인쉬타인이나 간디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여러 다른 의미로 평균값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인간은 이렇다라는 법칙을 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 법칙은 대단히 틀린 것이 되어 그들에 대한 큰 오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 대한 오해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함정이다. 실존은 개념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체는 개념에 선행한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파악한 세상은 실존을 축소시켜서 파악한 것이다. 확실한 과학적 법칙일 수록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체의 평균값을 반영한다. 그렇기 떄문에 단 하나 존재하는 내 눈앞의 뭔가에 대해 오히려 가장 무지하고 관련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수 있다.

 

웃기는 예가 있다. 인간의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라고 할 때 나는 인간이므로 반반의 확률로 나에게는 유방이 달려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어떤 문맥에서 어떤 누군가에게는 옳다. 그러나 나는 주사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 하나 존재하는 나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내게 반반의 확률로 유방이 달려있다는 문장은 나에게는 웃기는 문장이다.

 

만약 어떤 여자가 10대인데 임신중절의 경험이 있고 마약을 한 적이 있으며 중학교밖에 마치지 않았다고 할 때 우리는 이런 여자는 범죄를 잘 저지르는 범죄형인간이라는 통계적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런 인간이 내 앞에 하나 존재한다면 그 인간은 주사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 하나 존재하는 여자다. 우리는 눈을 감고 주사위를 던지는게 아니라 스스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다. 앞에서 말했던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정보를 무시하는 것도 바보지만 내가 감수성이 있고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도 바보다. 일견하기에 과학적 논리를 따르는 것 같은 통계를 따르는 행위는 내가 스스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내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과학적 지식이 가려버리는 것이다.

 

인생의 선택에 대한 다른 무수한 일반론적이고 통계적인 분석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 존재하는 것에 대한 법칙적 분석은 문맥에 따라 전혀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인생의 선택에 대해 무모한 짓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라도 그런 법칙을 늘상 따르면서 평균적 인생을 산다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늘상 그런다면 가장 바보같은 짓이다. 나는 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틀린 것인가. 이 문제는 과학이 틀렸다기보다는 과학적 결과의 현실적 의미를 해석하는데서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과학적 결론은 틀리지 않았다. 어떤 특정한 조건하에서 실험을 하거나 관찰을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과학은 그것만을 말한다. 문제는 그 의미가 뭐냐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 과학적 실험을 엄밀하게 하면 할수록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실험조건을 만들어 놓고 가설을 검증하려고 할 때 그 조건을 더더욱 엄밀하게 하려고 할 수록 우리는 사랑이 뭔지에 대해 더 엄밀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어떤 엄밀하게 조작된 상황에서 확인을 한 결과, 우리는 그렇게 정의된 사랑에 대해 관찰을 할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는 법칙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제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당신의 진짜 사랑과는 가장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실험을 한 사람만이 그것이 당신의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중력의 법칙은 매우 일반적인데 강국진이라는 한 개체에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나는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 나를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중력의 법칙을 어기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중력의 법칙을 논할 때는 나와 질량이 같은 물체와 똑같이 취급된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여러가지 특성을 가진다. 내가 이러저러한 질량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과학이 틀린게 아니라 나에 대해 중력의 법칙이 말하는 부분은 나의 수많은 부분중의 하나일 뿐이고 그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부분일 이유는 없다. 과학적 결과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실체를 축소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법칙은 다수의 개체로 이뤄진 집단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찾아지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런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상관관계는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원리나 상보성원리를 떠오르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란 우리가 논리와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을 쓰면 쓸수록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단 하나뿐인 개체, 단 하나뿐인 상황에 대한 이해는 거꾸로 줄어든다는 원리를 말한다. 확고한 논리로만 상황에 직면할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직접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장님으로 만든다.

 

실존과 우리 사이를 너무 많은 관념으로 채워넣으면 그 관념은 필연적으로 부정확성을 도입하게 된다. 한국남자는 이렇다는둥, 요즘 여자는 이렇다는 둥, 인간은 대개 이렇다는둥, 부자는 이렇다는 둥 하는 일반론에 근거해서 사람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게 되고 잘못 판단하게 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관념이 과잉화되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허상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순간에 특정장소에서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그 상황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법칙과 관념을 버리고 스스로 열린 마음으로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런 감수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오직 관념만을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장님이 된다. 그때 우리는 보다 확실한 지식에 근거하려고 할수록 현실과 멀어지는 모순에 처한다. 이해의 불확정성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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