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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불확실성의 산책

불확실성의 산책 7

by 격암(강국진) 2020. 3. 7.

7.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오늘날의 과학공동체는 애매하게 정의되는 것, 한정된 시간만 존재하는 것을 연구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생명과 뇌의 연구다. 물론 20 세기 부터 생명연구가 폭발적으로 진보하고 양적인 증가를 보인 큰 이유는 유전자라는 과학의 출발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생명은 곧 유전자다라는 기초원리 아래 유전자와 생명의 관계를 통해 생명을 이해하려고 한 것으로 예를 들어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우리들 개체를 자신들을 많이 퍼뜨리려고 노력하는 이기적 유전자가 만들어 낸 생존기계로 파악한다. 이러한 원리의 한계가 어떠하건 이렇게 접근하는 큰 장점은 유전자는 확실하고 튼튼한, 측정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이때문에 마치 뉴튼이래 현대과학이 빠르게 발전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기반한 생명의 연구는 크게 발전해 왔다.


그러나 물론 바이올린이 그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음악자체는 아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따라 같은 바이올린도 다른 음악을 만들어 낸다. 마찬가지로 유전자는 현상으로서의 생명 그 자체가 아니며 같은 유전자를 가지는 일란성 쌍동이들도 각자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아이의 성격이 유전자뿐만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도 결정되듯이 일반적으로 생명은 환경과 또렷한 경계선을 가지고 구분되지 않는다.


더구나 유전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만 유전자연구로만은 알 수 없는 부분이 궁극적으로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부분들이란 환경의 문제, 의식의 문제, 의사 결정의 문제들이다.


환경과 하나의 생명개체간의 경계가 불확실하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생명이란 어떤 것인지 생명은 어떻게 존재를 이어가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도시의 일상사에서 벗어나 해변가에 앉아서 푸른 바다를 보면 마음이 넓어지는 것같다. 하늘에 새라도 한마리 날아가고 뭉게구름이라도 보일것 같으면 그런 것들을 아무 생각없이 오래오래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런 거대한 자연을 느끼는 평온한 곳에 앉아있으면 지금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보기 좋은 때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은 금새 나를 전혀 상상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일단은 나대신에 한마리의 원숭이를 등장시켜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귀엽게 생긴 루시라는 이름의 원숭이를 한마리 알고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이 원숭이와 친구가 되어서 이따금 루시가 좋아하는 헝겁인형이나 바나나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루시는 우리의 우정을 기억하고 우리를 볼 때마다 친근감을 표현한다.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 우리에게 루시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우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우리 안에 있는 루시를 가르키며 말한다. 루시는 저기에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을 때 이 말처럼 애매한 말도 없으며 착각되고 있는 말도 없고 의미에 넘치는 말도 없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린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루시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렇게 한번 말해보자. 우리가 테니스 공을 던지면 테니스 공은 이러저러한 속도로 날아간다. 우리가 뭔가가 살아있다라는 것은 테니스 공 자체를 말하는 것처럼 어떤 물질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테니스 공이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


물질없이 생명은 없지만 물질은 분명 생명 그 자체가 아니다. 내가 방금 죽었다고하자. 내가 죽는 그 순간 내 몸에서 무슨 신비의 생명물질이 내 몸을 떠나는가? 내 몸에서 생명이 떠난다는게 무슨 말인가. 살아있는 나와 죽은 내 몸 사이에 물질적 차이는 없다. 죽은 루시의 DNA가 남아 있다고 해서 나는 루시야 넌 여기 살아있구나라고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렇게 말한다면 말그대로의 의미로 루시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란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물질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좀 괴상한 표현이지만 두 개의 나무토막이 붙어있는게 살아있는거라면 떨어지는게 죽은 것이다.


해변가를 거닐면 우리는 파도를 보게 된다. 말하자면 생명은 물이 아니고 파도다. 우리는 얼굴위로 상쾌한 바닷바람을 느낀다. 생명은 공기가 아니고 바람이라는 현상이다. 내 몸을 이루는 물질은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것이며 내가 죽고 나서 부패하면 다시 흩어져서 여기저기로 떠나갈 것들이다. 마치 순간적으로 생긴 회오리 바람이 잠시 그 모습을 유지했다가 흩어지듯이 말이다.


루시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루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정확히 뭘 말하는 걸까. 루시가 죽고 그 시체가 부패해서 형체를 알 수 없게 될때 우리는 그 물질을 가르켜 루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 물질은 분명 나와 우정을 나누었던 루시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집착이 물론 우리에게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건 부질없는 집착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수많은 채소와 고기로 만들어진 물질에 불과하다.


우리가 루시라고 부르는 대상은 생명이 아닌가? 나를 기억해주고 내가 좋아했던 것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루시가 아닌가? 그래서 루시가 한쪽 팔을 잃어버리거나 사고로 얼굴모양이 바뀌어도 나는 여전히 루시를 루시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루시라고 부르는 대상이 생명이고 생명이란 물질에서 생기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때 우리는 과연 어딘가를 가르켜 저기 루시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루시는 어디에 있을까.


예를 들어 토끼 모양을 가진 고무로 된 풍선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 풍선을 볼 때 우리는 이 토끼모양의 풍선주변으로 일종의 정신적 선을 긋는다. 그리고 생각하길 여기 토끼 모양을 가진 풍선이 있다고 인식한다. 토끼 모양이란 것은 이 ‘고무 풍선’의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풍선을 불 속에 넣거나 진공 속으로 가져간다면 풍선은 터져버릴 것이고 전혀 토끼 모양을 유지하지 못 할 것이다. 손에 든 채로 압력이 큰 바닷속으로 가져간다면 토끼는 찌끄러진 모양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토끼모양이란 것은 그 풍선의 안쪽공기와 풍선을 이루는 고무와 풍선바깥의 공기가 균형을 이룬 결과 만들어 지는 것이다. 토끼풍선이 토끼풍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풍선의 안 쪽이상으로 그 바깥쪽도 중요하다. 그 자체만큼이나 환경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공간 위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경계선을 그은 다음에 토끼모양이라는 성질은 이 안의 것이 가진 성질이라고 할수 있을까? 생명이 물질이 아니라 현상이고 환경과의 균형을 이루는 어떤 시스템의 성질이라면 우리는 어떤 지점의 주변에 테두리를 긋고 생명이라는 현상은 이 안의 것이 가진 거라고 할수 없지 않을까?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없는데 아들이 존재한다거나 윗쪽이 없는데 아랫쪽이 있고 차가움이란 개념이 없는데 뜨겁다는 개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토끼모양이란 안과 바깥이 균형을 이룬 결과 만들어 진 것이다. 토끼모양이란 엄격히 말해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관여해 이뤄낸 결과다.


안이나 밖이라는 개념도 생각해 보면 애매하기만 하다. 물속의 공기방울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물 안에서 공기방울을 보면 우리는 물바깥에서와는 반대로 물은 느끼지 못하고 공기방울이 저기 있다라는 식으로 세상을 느끼게 된다. 즉 공기방울은 저기 어딘가 특정한 장소에 있고 그 바깥에 있는 물로 가득 찬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으로 느낀다. 이럴 때는 그 공기방울의 안쪽이 안이고 공기방울의 바깥쪽이 바깥이다.


그런데 그 공기방울이 떠올라 수면에 도달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그 순간의 모습을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상상해 보자. 공기방울이 수면에 도달하면서 열리고 물위의 공기와 합쳐지는 순간 안과 바깥이 뒤집어지는 역전이 일어난다. 공기방울이 수면에 도달하기 직전에만 해도 분명 공기방울의 안쪽이 안쪽이고 바깥쪽이 바깥쪽같았으며 공기방울이 실체고 가득찬 물은 뭐랄까 환경이랄 수 있는 배경 같았다. 그런데 공기방울이 열리는 순간 갑자기 우리가 공기방울의 안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커다란 물표면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된다. 공기는 가볍고 물이 무거우므로 우리는 갑자기 거대한 물의 덩어리를 실체로 느끼고 우리가 방금 전까지 공기방울의 안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거대한 물덩어리의 바깥이 된다. 안과 바깥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나는 어떤 신비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며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속의 공기방울의 경우 안과 바깥이라는 개념이 임시적이고 관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나는 이제 원숭이로 돌아가서 질문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를 가르켜 저기 원숭이 한 마리가 있다고 한다. 저기 루시가 있다고 한다. 저기 생명인 루시가 있다. 루시의 안쪽은 어디인가. 어디 원숭이가 있는가. 우리의 손가락은 뭘 가르키고 있는 것 인가.


만약 공기방울에서 루시까지로의 점프가 너무 큰 것같고 이것이 단순한 비유처럼만 느껴진다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세포막을 생각해 볼수 있다. 세포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포막은 10나노미터정도의 얇은 막으로 물을 당기는 부분과 물을 밀어내는 부분이 있는 분자들이 두겹으로 모여있는 것이다. 세포막은 이렇게 해서 세포의 안과 바깥 사이에 경계를 만든다. 그래서 이 경계선은 말하자면 물과 기름을 컵에 넣었을 때 생기는 서로간의 경계선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물론 세포가 생명이므로 살아있는 세포도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다. 이제 곰곰히 생각해보자. 엄격히 생각할 때 어디가 안이고 바깥이라는 구분이 있을까? 세포막은 세포의 겉껍질인가 아니면 세포바깥세상의 겉껍질인가. 하나의 세포는 주변환경과 무관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아니면 주변환경과 균형을 이룬 상태인가.


여담이지만 내게 있어서 공기방울의 예는 죽음의 이미지를 준다. 공기방울이 표면에 도달하는 순간 안과 바깥에 대한 인식이 뒤집히는 것처럼 우리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 혹은 죽음을 목격할 때 우리는 우리가 소중히 생각했던 것, 생생하고 단단한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허물어짐을 느낀다. 방금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이제는 시체만 남겼다. 그 사람은 사라진 것인가, 저 시체가 그 사람인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우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죽음은 생명이 없는 상태다. 생명은 몸이라는 껍질을 벗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될수록 우리는 이 죽음라는 현상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음과 감수성


물론 우리와 루시는 풍선도 아니고 공기방울도 아니다. 그러나 생명이 현상이고 사건이라는 사실,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대상, 루시라고 부르는 대상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는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풍선이나 공기방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여러가지 생명현상은 주변 환경에 대해 민감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오랫동안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는, 즉 오래 살아남는 생명이 있고 금방 죽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살아있다고 해도 단순한 형태의 생명은 주변 환경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나무나 달팽이는 루시나 우리처럼 먼데서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하지 않는다. 루시같은 원숭이를 실험실에서 관찰할 때는 매우 열심히 주변환경을 격리하곤 하지만 우리가 꽃을 관찰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세포생물을 관찰할 때는 우리는 그 생물이 존재하는 플라스크의 바깥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단세포 생물은 거기까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생명은 어떤 테두리를 쳐서 이 안에 그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떤 생명은 그렇게 해도 큰 착오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 생명은 우리가 임의로 친 테두리 바깥쪽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짧은 시간이라면 그렇다. 반면에 어떤 생명은 테두리를 치고 이 안에 그 생명이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 생명에 대해 큰 오해를 만들어 내게 된다. 바로 토끼모양의 풍선을 바깥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오해다. 그렇게 되면 그 풍선을 진공상태나 심해로 가지고 가서 저게 토끼모양풍선이다라고 부르게 된다. 이것은 시체를 가르켜 저게 사람이다라고 부르는 오류와 같다.


어떤 생명이 주변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록 우리는 그것을 작은 테두리 안에 갇힌 것으로 생각해도 문제가 없으며 때로 그것은 죽은 것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발로 걷어차도 반응이 없는 것을 우리는 보통 죽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공간에서 잘 정의되는 생명이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생명이고 우리가 일단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이제 기계나 화학물질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변에 대해 민감한 만큼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공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세포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이제 그저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기계나 단백질처럼 보이지 않는가? 살아있는 것이 어느 새 마치 죽은 것처럼 변해 버렸다. 인간으로 이것을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인간을 어떤 심리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한다고 하자. 정해진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환경아래에서 예측 가능한 자극을 받고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해보다. 어느 새 우리는 그 인간을 하나의 기계장치처럼 느끼게 된다. 그 원인이 내부에 있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환경에 대한 큰 감수성에 있건 우리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죽은 기계다.


그럼 이 세상에서 환경에 가장 민감한 생명 즉 가장 살아있는 생명은 무엇일까. 나는 감히 그 후보로 인간을 생각해 본다. 인간은 생명 중에서도 가장 생생히 살아있다. 물론 인간보다 더 민감한 감각기관을 가진 동물은 많이 있다. 더구나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어떤 측면에 있어서 우리보다 민감한 생명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혹은 인간의 뇌는 그 지능과 도구와 인간들끼리의 소통을 이용해서 대개의 다른 동물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영역의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낀다. 우리는 은하계너머에서 빛나는 별들의 행동에서 수십억년적에 있었던 일들, 수천년전의 사람들이 쓴 시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바다 밑 바닥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까지 탐험하고 서로 정보를 나눈다. 한마디로 우리는 가장 넓은 세계를 관찰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존재다.


바로 정확히 이런 이유때문에 인간은 혹은 인간의 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 된다. 인간의 뇌에는 온 우주가 들어있다. 우리는 나열하기 불가능하게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반응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식, 행동은 그런 것들을 반영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생명현상을 정의하면서 어딘가에 테두리를 치고 이 안에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면, 인간을 플라스크 위에 놓는 그 과정에서, 다시 말해 인간을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아주 많은 것이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지만 우리가 놓치고 무시한 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일 수 있다.


우리가 쥐나 비둘기를 실험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실험하면 쥐나 비둘기에서 보는 형태의 특징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렇게 실험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없애버린다. 사람이 짐승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주고 사람이 짐승처럼 행동한다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런 오류는 인간을 물질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생긴다. 토끼모양 풍선은 심해로 가져갈 때 마다 찌그러들것이다. 인간의 육체주변에 테두리를 치고 이게 인간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인간을 여기저기에 놓아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나온 관찰결과들로 인간에 대한 과학을 구성하려고 한다.


영국 방송사 BBC에서는 2008년에 완전한 격리 (total isolation)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다큐에는 장기적인 기간동안 독방생활을 한 수감자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그 수감자는 이 격리생활 때문에 영구히 인지능력에 손상을 입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감각을 상실한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일들이 과거에 일어난 것은 알겠는데 두 개의 사건이 어떤 순서로 일어난 것인지 그는 잘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물을 잘 외울 수가 없다. 감각신호가 없는 어두운 독방에서는 우리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알기 어렵다. 그런 환경에 장기간 놓여질 경우 시간에 관한 우리의 인지능력이 영구히 손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지능력이란 우리 자신의 일부다. 결국 특이한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서 우리 자신의 일부가 변하고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물론 대개 다른 인간을 관찰할 때 이런 극단적인 환경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어떤 법칙을 찾기 위해 우리가 정한 환경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가 사람은 이렇다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감수성을 생각했을때 우려되는 점이 있다.


인간은 그 환경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대상이다. 인간은 가장 환경과 강하게 결합하여 그 환경과 분리할 수 없게 존재하고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플라스크 처럼 작은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게 넓은 환경, 거의 이 우주 전부다.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도 과학적 연구라는 것을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를 독방에 넣어 버린다. 이럴 때 사람들은 종종 난 이전의 내가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 생명이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말을 다시 생각하면 이말이 통상 믿어지는 것보다 더욱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감수성을 잃어버리거나 얻는 순간 우리의 일부는 파괴되거나 확장된다. 물론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게 아니다. 문제는 과학적 접근 그 자체에 있다.


고립계의 과학


우리가 이렇게 격리된 시스템을 좋아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 역사와 관련이 있다. 물리학에서는 종종 고립계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고립계라는 것은 한마디로 주어진 시스템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인 고립계는 질량을 가졌으되 부피는 없는 질점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스템이다. 뉴톤이 생각한 것이 바로 이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매우 이해하기 쉬운 미래를 가진다.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의 힘도 없기 때문에 일정한 속력으로 같은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보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하나는 그 질점이란게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복잡한 것은 싹 치워버렸으니까 그렇다. 질점은 환경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 정의되고 환경과 관련없이 존재하는 성질, 이 경우는 질량을 가진다.


물리학자들은 대개 가능한 한 제일 간단한 시스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약속하기를 나중에 복잡한 것은 간단한 것을 이해한 후에 되돌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시스템이 우리가 없애버린 것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정의될 수 있다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가정은 어떤 경우에는 명백히 위배된다. 여기 거울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거울 안에 뭐가 보이는지 알고 싶은데 일단 이 거울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립계에 가져다 놓고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거울은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비추는 존재다. 우리가 주변의 것을 모두 치우고 그것을 고립계로 가져다 놓는 행동 그 자체가 그 거울이 뭘 보여줄까를 바꿔버린다.


사실은 뉴튼이래 사람들이 발견한 것중의 하나는 나중에 복잡한 세상을 되돌리면 된다는 일반적인 약속과는 달리 물체를 3개만 등장시켜도 우리는 그 시스템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소위 3체문제로 불리는 이 문제는 뉴튼식의 접근이 금새 벽에 부딪히는 때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잘 고립된것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다른 것을 첨가하면 된다는 약속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닐 수 있것이지만 적어도 항상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물리학적인 방법은 오랜 간 과학의 표준이었다. 다시 말해서 모든 학문은 물리학이 되기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고립계를 연상시키는 생물학 연구의 현장을 쉽게 발견한다. 예를 들어 뇌과학 실험현장에서 자주 보게 되는 마취한 원숭이를 이용한 실험이 어떤 것인지 말해보자. 인간의 뇌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때문에 신경과학분야에서는 원숭이의 뇌활동을 관찰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많은 관찰은 마취한 원숭이를 사용한다.


원숭이가 자유롭게 뛰어놀면서 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측정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지만 측정을 한다고 해도 문제가 많다. 당연히 원숭이 뇌의 상태는 원숭이가 무슨 일을 하고 뭘 보고 뭘 듣는가에 따라 크게 바뀐다. 원숭이가 배가 고플 때, 원숭이가 적수를 만났을 때, 원숭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조련사와 함께 있을 때 당연히 원숭이의 행동은 모두 다르다. 심지어 원숭이가 뭘 상상한다면 거기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실험적 결과가 나와도 그 실험결과가 환경적 요소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모르기때문에 대부분 의미가 없다. 바로 과학의 근본적인 특성인 실험의 객관성과 재현성이 망가지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이래서는 뭘 주장할 수도 논문을 쓸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엄정하게 환경을 관리해서 실험을 한다. 주변을 아주 조용히 할뿐만 아니라 원숭이의 움직임도 차단하고 심지어 생각도 차단하기 위해 종종 마취를 한다. 마취를 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래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마취를 하고 우리가 분석하기 쉬울 정도로 간단한 감각자극을 , 예를 들어 어떤 단순한 시각적 자극을 의식이 없는 원숭이 눈에다 보여준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죽은 원숭이와 산원숭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원숭이는 마취상태니까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야 한다. 우리는 죽은 원숭이를 관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원숭이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 실험자들이 열심히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원숭이 뇌만 존재하는 고립계인 것이다. 그래야 실험결과가 해석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항상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일단 이것만 먼저 이해해 보자 그리고 나면 복잡한 환경을 되돌리겠다는 약속이 잠재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환경과 밀접하게 얽혀있다는 생명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연구의 방법자체가 여기서 뭔가를 이미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립계를 전제하면서 시작하는 방법은 물리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루던 것들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질점, 안정도가 높고 실질적으로 무한한 수명을 가진 원자나 전자. 우리 집의 시계추가 흔들리고 있을 때 나는 그 시계추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소한 것이므로 없는 셈으로 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복잡계의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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