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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불확실성의 산책

불확실성의 산책 8

by 격암(강국진) 2020. 3. 7.

8. 복잡계로서의 생명


1990년, 나는 인공신경망에 대한 사이언스 잡지의 한 논문을 읽었다. 나는 그 논문을 매우 흥미롭게 읽은 나머지 물리학의 연구보다 인공신경망의 연구가 더욱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능을 가진 학습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나아가 실제 뇌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매우 근사하게 보였다. 물론 이때 나의 이런 생각은 과도하게 낙관적인 것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 문제의 논문을 쓴 저자와 함께 뇌과학을 연구하는 길로 들어섰는데 물론 나의 연구방식이란 것은 아무래도 물리학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의 관점에서 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뇌의 신경신호를 분석하는 일이나 뇌의 시각 피질에서의 신경네트웍을 이해하기 위한 수학적 모델을 개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개인가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마치면서 나는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리학자로서 뇌를 연구하는 일에는 어딘가 모르게 실패의 냄새가 났다. 특히 문제가 느껴지는 부분은 되먹임의 문제 혹은 비선형성의 문제였다.


뇌의 각 부분은 그리고 뇌안의 신경세포들은 서로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다. 즉 일방적으로 한 쪽이 한 쪽에 신호를 전달하는게 아니고 뇌의 다른 부분에 있는 신경세포에게서 신호를 받아서는 그 신호를 보낸 쪽에 다시 돌려준다. 이런 것을 되먹임이라고 하는데 이런 되먹임이 있는 시스템은 대개 선형적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이 아니고 비선형성을 가지게 된다. 뇌는 이런 되먹임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뇌의 시각 피질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수학모델은 당연히 실제 뇌에서 측정해야 하는 여러가지 수치값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신경세포들이 얼마나 서로 많이 연결되어 있는지, 연결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 신호가 주어졌을 때 변화를 보이는 반응시간은 어느 정도 인지 같은 것들을 측정하거나 추측해서 수학적 모델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럴 때 선형적 시스템인가 비선형적 시스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선형적 시스템에서는 만약 내가 뇌세포의 평균적 반응속도를 말해주는 시간 변수의 값을 조금쯤 틀리게 집어넣는다면 그 시스템은 조금쯤 다른 행동을 보여주게 된다. 시간 변수에 대한 오차가 조금만 더 커진다면 그 시스템의 행동은 조금만 더 달라진다.


비선형적 시스템에서는 내가 어떤 변수의 값을 조금 다르게 하면 그 시스템의 행동이 바로 조금 전과는 비할 수 없이 달라질수 있다. 절벽끝자락에 있는 돌멩이를 생각해 보라. 돌멩이를 조금 밀었더니 돌멩이가 조금 움직인다. 말하자면 이런게 선형 시스템이다. 돌멩이를 조금 밀었더니 돌멩이가 절벽밑으로 떨어져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런게 비선형시스템이다.


위에서 말한 되먹임이라는 것은 흔히 시스템을 비선형으로 만든다. 비선형이라고 무조건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학적 모델을 만들 때 항상 어딘가 속임수가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되기 쉽다. 수학적 모델을 만들고 나면 우리는 그 모델이 실험에서 관측된 실제 뇌, 혹은 뇌의 특정부분의 행동을 재현할 수 있는가를 보기 마련이다. 비선형이 있는 시스템은 어딘가에서 변수를 좀 고치면 관측된 사실이 그 어떤 것이라도 재현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작은 차이가 크게 증폭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뇌는 매우 복잡하고 매우 비균질적인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아주 많은, 최소 백억개의 신경세포가 있고 엄밀히 말하자면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하나도 서로 똑 같은 게 없다. 이런 시스템은 현실적인 모델을 만든다는 핑계로 얼마든지 복잡하게 만들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얼마든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들기가 쉬워지기 쉽다.


결과적으로 신경과학계에서 이론가들이 가지는 역할은 제한된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실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는데 이론가들이 몰랐던 어떤 새로운 효과가 실험에서 한가지 발견되는 경우 이론가들이 열심히 만들었던 그 모델은 엄청나게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수학적 모델로 뇌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재앙적인 상황이다. 관측 데이터로 여러 가능한 모델 중 어느 모델이 맞는지를 구분하기가 너무 어렵다.


물론 그래서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뇌를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기술을 열심히 발전시키고 있으며 해마다 그 공간적 시간적 정교함은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이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에게 뇌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비선형성의 문제는 뇌를 연구하는데 있어 큰 난관중의 하나다.


훨씬 더 정교한 측정장치가 등장하면 뇌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만 해도 그렇다. 뇌 안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수보다 더 많은 수의 신경세포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 사회는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원한다면 특정한 인간 하나의 언행을 24시간 모두 기록할 수 있는 정교함을 가진 기계를 이미 가지고 있다. 원한다면 그 수를 수천이나 수만으로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류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지를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사회 경제학적 이론이 인간행동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오차가 크기 때문에 부정확한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뇌세포하나보다 복잡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뇌세포 하나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복잡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르듯이 모든 뇌세포도 엄밀하게는 서로 다르다. 우리가 수만개 수백만개의 신경세포의 활동을 모두 동시에 관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전체 뇌의 활동을 설명해 내는데 획기적인 변화를 준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뇌는 과학적 연구가 매우 어려운 대상이다. 우리가 자동차를 연구할 때는 엔진이란 어떤 곳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엔진을 떼어내서 그곳만 연구할 수가 있다. 살아있지 않은 엔진은 자동차의 다른 부분과 떼어내서 분석되어지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뇌를 연구할 때는 그게 어렵다. 뇌의 특정부분은 다른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특정부분이 어떤 행동을 보일 때 그게 외부로부터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 그런 행동을 일으키는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도 알기가 어렵다. 비선형계 혹은 복잡계는 각각의 부분을 떼어내서 관측 하면 그들의 합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인다.


뇌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많은 연구가 행해진 곳은 주로 감각 신호를 처리하는 초기부분이다. 예를 들어 눈이 그렇다. 눈의 경우는 우리가 외부에서 시각신호를 주면 눈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연구할 수 있다. 즉 입력이 뭔지 아니까 그 출력에 해당하는 신경세포의 활동을 보고 시간신호와 신경세포의 활동간의 관계를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제 연구는 다시 정보의 흐름을 따라 더 윗선으로 확장된다. 눈을 이해하고 나면 다음단계인 LGN을 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LGN에서 신호를 받는 V1을 보고 하는 식인데 점점 더 시각신호의 윗단계로 갈수록 어려움이 등장한다. 이제 그 부분은 신호를 온갖 곳에서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부분을 잘라내어 연구하면 그건 이제 죽은 뇌가 된다.


다시 말해 뇌를 연구하다보면 어딘가에 선을 긋고 그 안의 것만 연구하기가 힘들다. 전체가 부분의 단순합이 아닌 복잡계라서 그렇다. 그렇다고 뇌를 통째로 같이 연구하자고 하면 이젠 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알기가 어렵게 된다.


이렇게 뇌를 보면서 골치를 썩다가 다시 머리를 좀더 들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도, 사람과 환경의 연결도, 생명과 생명의 연결도 복잡계를 이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짧은 시간이라는 전제가 붙거나 고립계에 가까운 상황이거나 하는 상황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도 우리는 물론 생명에 대해 많은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될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장기이식수술을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마치 기계부품을 갈아끼우는 기계공을 떠올리게 된다. 모든게 복잡계야 하는 생각으로는 그런 의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고립계로 생명을 파악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는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게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것, 무시하고 있는 것이 있다.


본질적 차이


자연의 과학적 이해는 생명현상을 볼 때 어떤 한계를 보이는가. 생명은 과학에 등장하는 질점이나 원자 같은 것과 어떻게 다른가. 과학은 기본적으로 시공간적으로 모두 고립계적인 접근방식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가 하나의 질점을 생각할 때 그것은 특정공간에서 다른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질점 자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그 질점의 위치나 속도같은 성질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만 그것들 역시도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에 따라 변화한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것은 환경과 또렷한 경계선을 가지지 않는, 물질이 아닌 현상이라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고립되어져 있지 않을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하나의 생명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나는 하나의 어린애에서 청소년으로 어른으로 성장해 왔다. 사회적으로 말했을 때 나는 항상 같은 사람으로 파악되어져 왔지만 그것은 뉴튼 역학에서 질점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질점이 어떻게 움직이냐고 할 때는 질점 그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돌을 던졌더니 돌이 공중에서 혼자 점점 무거워진다거나 부피가 불어난다거나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때는 사실 질문자체가 애매하다. 나라는 사람의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은 질점과는 달리 하나의 과정과 관계로 파악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생명은 애매한 정의를 가지고 시공간을 포함한 가능한 무수한 차원에서 애매하게 분포하는 존재다. 무인도에 한 쌍의 쇠구슬을 놓으면 한 참후에 가봐도 우리는 한 쌍의 쇠구슬을 본다. 반면에 무인도에 한쌍의 토끼를 놓아두면 한참후에는 섬이 토끼로 가득찰지 모른다. 한마리의 늑대와 한마리의 토끼를 놓아두었다면 토끼는 늑대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 무인도에 가서 우리가 놓아둔 토끼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쇠구슬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식으로 던지면 엉터리 사태파악이 된다. 그런데 이게 바로 과학적 질문던지기다. 그것은 그것나름대로 좋은 근사로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원자론적이고 고립계적인 시각으로 생명을 보면 우리는 뭔가를 놓치게 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해서 모른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결코 전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이고 우리는 그 환경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모른다면 그 세상을 비추는 거울 속의 그림을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저 시시하게 작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양자역학은 한가지 교훈을 준다. 모든 입자들을 공간을 채우는 파동이 아니라 정확한 경계를 가지는 존재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양자효과를 무시하게 된다. 그리고 양자효과로 인해서 생기는 현상, 예를 들어 물질파의 간섭으로 생기는 패턴의 창조따위를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앞에서와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래봐야 양자효과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 아닌가. 그걸 틀린다고 우리 일상생활에 무슨 변화가 있는가?


하지만 양자효과는 결코 작은데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은 우리 머리위에서 불타는 태양이 왜 불타는지는 양자역학이 있어야 이해될수 있다. 그리고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슈뢰딩거방정식을 만든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물질의 안전성도 양자효과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생명을 논하는데 물질의 안정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DNA도 고분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양자효과가 없었다면 지구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에너지도 없었고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자효과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효과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을 고립계로 파악하면서 놓치고 있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그게 작고 시시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혹시 그게 양자효과처럼 엄청나게 중요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는 일이 경우에 따라 이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중요한 것을 무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모든 신비가 다 풀린 것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같다. 우리는 물론 전지전능하지 않고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알 건 다 안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생명이란 우리가 신비감에 젖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실은 과학이라는 이야기, 수학이라는 이야기, 인간의 문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자체가 신비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가 바로 신비다.


어떤 수학자가 숲길을 산책하다가 직관에 의해 떠올린 답은 어떻게 답일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은 가능한 그 많은 가설중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왜 사람이 생각해낸 수학은 자연을 그다지도 성공적으로 기술하는가. 수학자 푸앵카레는 우리가 뭔가를 증명하는 것은 논리지만 우리가 뭔가를 발견하는 것은 직관이라고 말했다. 아인쉬타인은 스스로를 가르켜 답의 냄새를 잘맡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논리로 답을 찾는게 아니라 직관으로 찾는다. 직관의 문제는 왜 인간의 문명은 지구의 나이로 보면 사소하리 만큼 작은데도 그렇게 빨리 발전하는가에도 관련된 신비다. 한마디로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답을 찾아내는가. 그건 아마도 우리가 통상 생각하듯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답을 잘 찾아내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닌 것 같다. 생명의 진화 역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만큼 성공적이다. 하나의 세포로 이뤄진 생명체에서 인간의 뇌까지 만들어 내는 진화가 만들어지는 속력은 우리가 모든 생명체를 그저 분리된 존재로만 봐도 이해가능한 것일까. 혹시 오로지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과정과 파도로 봐야 이해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출현한 것 자체가 생명체는 고립계로 볼 수 없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엄마와 같이 있는 아이가 이것을 느끼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친구와 빈둥거리며 뭉쳐서 지내는 청소년들이 이것을 느끼며 영화관에 가서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볼 때 이것을 우리는 느낀다. 사실 티브이를 보면서 티브이 속의 인물이 역겨운 것을 먹거나 두들겨 맞을 때 우리 모두는 감정이입을 느낀다. 우리는 단순히 떨어져서 각각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의 뇌-이미지 연구는 이러한 경험들이 단순한 주관적 상상이 아니라 뇌의 활동으로 생생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뇌를 열지 않고도 뇌안의 두뇌활동을 관찰하는 방법에는 몇가지가 있는데 기능성 자기공명장치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기계를 사용하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나 동물이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 때 두뇌의 어떤 부분들이 활성화되는 가를 관찰할 수가 있다. 이런 관찰에 따르면 우리는 남의 고통을 볼 때 그저 추상적으로 고통을 느끼는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뇌에서 고통에 관여하는 부분이 활성화된다.


이런 종류의 활성화가 지나친 경우도 있다. 공감각이란 하나의 감각신호가 다른 감각신호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공감각을 가진 사람중에는 다른 사람의 몸이 만져지는 것을 보는 시각신호가 자기 몸의 같은 부분에서 촉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블랙모어의 2004년 연구에 따르면 이런 환자의 두뇌 활동을 기능성 자기공명장치로 살펴보면 다른 사람의 몸이 만져지는 것을 볼 때와 실제로 자기 몸이 만져질 때 두뇌의 같은 부분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리고 이런 환자는 남이 만져지는 것을 보고 촉감을 생생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이 것은 어느정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이런 환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뇌를 관찰해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현상을 보게 된다. 다만 그것이 환자의 경우에는 의식적 촉각을 느낄 정도로 까지 강하고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의식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들은 보통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연결되어져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대개 오랜동안 여기 이 곳에, 공간적으로 제한된 이 곳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루시나 나로 부르는 사회적 관습에 노출되어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자꾸 습관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루시는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는 식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본질적으로 착각한다. 우리 자신을 주변 환경과 분리되어 홀로 정의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런저런 성질을 가졌고 루시가 이런 저런 성질을 가졌다. 나와 루시는 각각의 작은 공간들 안에 있다. 루시는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런 생각에 익숙하다.


그러나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라 바다위에서 밀려가는 파도 같은 현상이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숨쉬며 성장하고 때로는 팔다리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매일 같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고 옛기억을 잃어버리면서 살고 있다. 우리 몸의 물질들은 매일같이 매순간 조금씩 바뀐다. 물질들은 몰려와서 내 몸을 이루다가 다시 내 몸을 떠나간다. 우리는 허공을 떠다니는 파도다.


한 파도가 다른 파도에게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구나 하고 말했다. 다른 파도는 답한다. 우리는 모두 바다의 일부고 너와 나는 애초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우리가 서로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라는 뜻이라고.


그래도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라는 물리적인 생각이 이해가 쉽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저기에는 무관심해진다. 나는 저기와 무관하게 여기 있기 때문이다. 여기와 저기는 연결이 끊어지고 우리는 여기는 느끼지만 저기는 점점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어느새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가족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철저히 혼자가 되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아는 우리로 남아 있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을 느끼지 못할 수록 우리는 작은 생명이 되고 어떤 의미에서 죽어간다. 이것이 신비감과 경외감이 없이는 우리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다.


우린 생명이다. 생명은 엄격히 말해서 공간상의 어느 한 점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몸을 이루는 물질이 생명이 아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을 수록 우리는 무한정으로 넓어진다. 우리가 뭔가의 이유로 느끼는 능력,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만큼 덜 살아있는 존재, 더 작은 존재가 된다.


생명을 진화하는 과정의 결과로 생각하는 진화론적인 시각은 원자론적 시각에 비해 모든 동물들이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며 함부로 그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흔히 사자를 동물의 왕이니 뭐니 하고 말하는데 생물의 진화와 생존은 균형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 모든 동물은 식물들과 함께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데 누가 왕이니 뭐니 하는 것은 마치 손이 발보다 높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인간사회에서 왕이란 왕의 역할을 못해도 왕일 수 있다. 판사역할을 잘못해도 판사일 수 있으며 경찰 역할을 잘못해도 경찰일 수 있다. 즉 직함과 기능이 따로 따로다. 자연은 기능에 따라 균형이 즉시 바뀐다. 각자 자기일을 하는 것일뿐 사자로 태어났다고 고기를 가져다 바치는 백성 동물이 있는게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높은 동물도 낮은 동물도 없다. 사자의 삶은 편안하고 영양의 삶은 고달픈 것도 아니다. 인간 사회의 구조가 현실과 따로 움직이고 권위주의가 퍼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생명을 고정된 것으로 보는 원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는 여기에 있다라는 표현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풍선이나 공기방울을 떠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바닷가에 앉아서 구름도 보고 새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파도도 보면서 풍선과 물속의 공기방울을 명상하듯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불리는 이것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때로 이런 말을 하면서 조용히 생각에 빠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아마도 우리가 잊고 있던 어떤 기억과 감각이 살아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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