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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불확실성의 산책

불확실성의 산책 10

by 격암(강국진) 2020. 3. 12.

10. 인식하는 생명, 진화하는 생명.


우리는 유한한 시간에 유한한 자원을 동원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한가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얻는 그 정보라는 것이 세상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빨간 색안경을 쓰고 본 세상은 빨갛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가 색안경을 쓰고 있다는 알 수 있을까? 세상은 본래 빨간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언제나 이 세상이 진짜로 어떤 곳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세상을 딱 한번 잠깐 봤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면 이 색안경의 문제는 푸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현실은 이 경우보다 그리 상황이 훨씬 더 좋지도 않다.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세상과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없다. 언제나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 우리가 뭘 믿을 지를 선택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 이 믿음과 생각의 되먹임관계는 기본적으로 많은 경험만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선택과 학습하는 태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수학자들이나 공학자는 확률론의 한 분야인 베이지언 추론을 통해 이런 문제와 싸워왔다. 물론 여기서의 당면과제는 인간처럼 혹은 인간이상으로 지적인 판단과 인식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매일의 일상을 당연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해 보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우리가 매 순간 일상적으로 하는 이 인식이란 아주 복잡한 과정이며 우리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아침을 먹으면서 티브이로 뉴스를 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그저 평범한 일상이지만 이것이 정말 그렇게 평범한 일이기만 할까? 먼저 이 사람은 아나운서의 말소리를 해석하고 있다. 말소리란 공기의 진동이 시간에 따라 미묘하게 그리고 물론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는 신호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는 이 공기의 진동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전달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만약 아나운서가 3배로 빨리 말해도 우리가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다면 아나운서는 기꺼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니운서는 정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우리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의 한계 선상에서 말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말소리만 그런 게 아니다. 시각적 패턴의 해석도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독자처럼 티비를 보는 사람도 티브이 화면에 흘러가는 글자라는 시각적 패턴을 의미로 환원해 나간다. 단 한 개의 글자를 잘못봐도 전체의 의미는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천천히 문자를 읽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하나 한없는 정확도로 읽지는 않는다. 상황은 말소리의 해석과 같다. 우리는 한계선상에서 빠르게 문자들을 읽어 내리고 그 시각패턴은 실시간으로 우리의 머릿속에서 의미로 환원된다.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정보처리는 겨우 시작일 뿐이다. 이런 기초적인 정보처리가 끝나고 나면 이제 그 의미가 다시 분석되어져야 한다. 티비 뉴스가 뉴욕의 주식이 폭락하고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때 우리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이것이 한국경제과 나의 가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 이 소식이 전부 일까? 왜 저 언론사는 하필 아침에 이 뉴스를 전할까? 말을 제대로 알아 들었다지만 우리는 정말 그 말이 가지는 이면의 의미도 제대로 알아 들은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뒤져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우리가 새롭게 취득한 정보를 합치기 시작한다.


언제나 현실세계는 우리의 인식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매순간이 이런 한계적 상황이다. 비교적 조용한 삶조차도 그렇다. 세상과 우리의 인식능력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와 인식의 내용은 바뀌게 된다.


이제 한단계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우리가 엄청나게 낡은 티브이를 통해 서울광장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티브이가 낡아서 화면이 흔들리고 여러가지 이상한 선들도 보인다. 여기서 티브이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정보채널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 정보는 두 개의 신호가 합쳐진 것이다. 하나는 진짜 바깥세상의 모습이고 또하나는 우리의 정보채널이 거기에 더해놓은 잡음이다.


만약 당신이 서울 광장의 현재 모습을 알고 있다면 -혹은 그렇게 믿고 있다면 - 당신은 화면속에 보이는 그림속에서 뭐가 잡음이고 뭐가 원래신호인지를 분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상식이 있다. 다시 말해 화면에 서울광장에 있을 리가 없는 괴상한 선이 하나 보인다던가 하얀 점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게 된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도 문제는 쉬워진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가 보는 세상이 흔들리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정보채널이 잘못된 것이 이유이기 때문이다. 움직일리가 없는 전봇대가 흔들흔들거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엄밀히 말해 가정이고 믿음일 뿐이다. 진짜 세계는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이 가진 진짜 모습을 추론해 내기 위해 이런 믿음과 가정을 도입한다. 어떤 믿음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같이 아주 원천적이고 어떤 믿음은 나는 곧 호랑이를 보게 될거라는 믿음처럼 훨씬 더 구체적이다. 만약 우리가 가진 정보신호가 상당히 정확하다면 우리는 비교적 원천적인 가정과 믿음만으로 세상의 모습을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신호가 부정확한 경우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가정과 믿음이 아주 구체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추론은 결론이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 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식이다.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축적하고 만들어 온 기대치다. 하늘에서 무거운 돌이 자유롭게 떨어진다면 우리는 그 돌이 대충 어떤 괘적을 그릴 지 미리 알고 있다. 추가 왔다갔다 흔들리거나 자전거가 바람에 밀려 쓰러질 때도 우리는 미리 어떤 식으로 일이 벌어질지를 대충 알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의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베이지안 추론에서는 프라이어라고 부르는 확률분포다. 우리가 뭔가를 강하고 구체적으로 믿을 때 이 확률분포는 아주 좁아진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믿거나 아는게 별로 없을 때 이 확률분포는 넓게 퍼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프라이어에 포함된 정보로만 세상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관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이 프라이어는 아주 좁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도 세상이 어떤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정보 신호가 더 필요하다.


만약 이 관찰정보내지 감각신호가 아주 정확해서 정확히 세상에 뭐가 있는지를 보여준다면 우리는 프라이어를 상당부분 무시할 수 있다. 감각이 정확한 정답을 알려주는 데 선입견이나 사전지식은 필요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감각신호는 대개 부정확해서 세상에 뭐가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고 확률적으로만 알려 준다. 예를 들어 감각신호가 X라고 들어오면 세상이 A 상태에 있는지 B 상태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A 상태에 있으면 X라는 신호가 있을 확률이 70% 세상이 B 상태에 있으면 X라는 신호가 있을 확률이 30%라는 식이다. 즉 X만을 보고 세상에 A 상태인지 B 상태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확률을 최대공산확률(maximum likelihood probability)라고 부른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 대한 확실한 믿음도 없고 확실한 감각 정보도 없기 때문에 이 두가지를 합쳐서 즉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을 합쳐서 세상에 뭐가 있는지를 추론한다. 이것이 베이지언 추론의 기본 출발점이다.


베이지언 추론의 문제는 일단 그렇게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에 가득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날 방안에서 파리가 한마디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그 파리를 눈으로 쫒다보면 매번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파리의 모습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아주 흔한 경험이지만 동시에 마술쇼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다면 매우 신기한 경험이다. 왜냐면 내가 그 파리의 모습을 놓치기 직전까지는 그 파리의 모습이 상당히 또렷하게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파리의 모습을 놓치는 순간 파리는 마치 투명해 지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일단 그렇게 되면 왱왱 소리가 들릴 때에도 우리는 한동안 그 파리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파리의 괘적을 쫒는 것은 베이지언 추론의 문제다. 만약 어떤 파리가 일정한 속력으로 날고 있다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정확히 같은 속력으로 원운동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파리의 미래위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파리가 3초에 한번 그 원을 돈다면 3초후에 그 파리는 같은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프라이어가 매우 좁은 경우 즉 우리의 사전정보가 매우 정확한 경우다. 이 경우에 나는 눈을 감고도 파리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파리는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파리는 불규칙하게 날아다닌다. 일직선으로 같은 속력으로만 날아가는 파리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사람도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다면 일직선으로 달려가지는 않는다. 이따금 불규칙하게 옆으로 틀어서 쫒아오는 사람의 예측이 틀리게 만든다. 시각인식의 경우는 예측의 실패란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다.


빠르게 날아가는 작은 파리의 모습에 대한 시각적 신호는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정확한 시각신호로도 우리의 예상대로 파리가 날고 있는 경우는 우리는 파리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측한 대로 눈을 움직이고 우리는 우리 시각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을 시각신호를 받아들이는데 쓸 수도 있다. 말하자면 최대공산확률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아도 프라이어가 훌룡한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예측에 실패하게 되는 순간 시간신호는 더욱 나빠진다. 파리는 이제 우리 시각의 촛점 바깥쪽으로 빠졌기 때문에 최대공산확률은 더 나빠진다. 그렇게 되면 현재 위치를 잘 모르니 미래 위치를 예측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프라이어도 나빠진다. 더 나빠진 시각신호와 더 확장된 프라이어가 합쳐진 결과 파리의 위치는 금새 전혀 알 수 없어지고, 뇌는 시각적 이미지의 형성에 실패한다. 결국 파리가 마술처럼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베이지언 추론은 우리가 모기나 파리를 놓치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해 준다. 사실 이것이 마술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마술사는 우리의 관심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돌려서 우리가 잘못된 기대를 하게 한다. 그래서 시각적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파리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마술처럼 사라질 수 있고 우리를 당혹시킬 수 있다. 물론 파리나 모기를 쫒다가 놓치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베이지언 추론의 문제 나아가 인식의 문제가 적용되는 것은 물론 단지 파리나 모기를 쫒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쫒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인식의 근본적 문제


다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이번에는 베이지언의 언어로 말이다. 우리의 인식이란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이 합쳐져서 만들어 낸 결과인데 우리는 프라이어도 최대공산확률도 모른다. 다시 말해 세상 그 자체와 우리 자신에 대해 동시에 학습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X와 Y를 더하면 얼마가 되는지만 알면서 X와 Y에 대해 알아내야 하는 불가능한 문제다. 세상에 대해 경험을 축적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정보채널이 가지는 불확실성 즉 최대공산확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최대공산확률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면 우리는 애초에 세상이 어땠는 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인식결과는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에 대한 어떤 가정에 근거한 것이고 그 가정은 당연히 우리의 경험 즉 우리의 인식결과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논리적 순환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경험을 통해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을 수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범하는 흔한 실수중의 하나는 여기서 프라이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속의 인간은 매우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거의 겪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베이지언 계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베이지안이라고 부르는데 베이지안들은 이런 예를 좋아한다. 당신이 한번은 병원에 가서 희귀병 검사를 해봤다. 예를 들어 이 검사가 당신이 희귀병이 있다면 95%의 확률로 양성결과가 나오고 당신이 희귀병이 없어도 5%의 확률로 양성결과가 나온다고 해보자. 그런데 의사가 당신의 검사결과가 양성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이 병에 걸렸을 확률은 얼마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경우 자신이 병에 걸릴 확률이 95%라고 생각한다. 이 검사는 당신이 희귀병이 있다면 95%의 확률로 이 병에 걸린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 문장에서 '당신이 희귀병이 있다면'의 부분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귀병이란 희귀하기 때문에 희귀병이다. 세상에는 더 희귀한 병도 있지만 이 병이 천명중 하나가 걸리는 병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이 병에 걸릴 프라이어 확률은 0.1%다. 이 경우 양성판정이 나왔다고 해도 이 병에 걸렸을 확률을 계산해 보면 아직 1.86%밖에는 되지 않는다. 낮은 프라이어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았을 확률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당황하지 말고 추가 검사를 해봐야 한다. 처음부터 단정적으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은 확률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큰 수나 아주 작은 수를 다루는데 있어서 자연스럽지 않고 오류를 범한다.


하지만 자주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여러번 경험을 쌓으면 다시 말해 여러번 베이지안 추론을 반복하다 보면 프라이어도 최대공산확률도 다 정답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아도 우리의 인식은 엉뚱한 곳으로 수렴할 수 있다. 잘못된 인식이 잘못된 학습을 만들고 잘못된 학습은 다시 더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처음에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하면 제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아도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결론을 베이지언 추론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분석해서 답할 수도 있다. 정성적으로도 그럴 것같지만 정량적인 분석을 해 본 결과도 그 결과는 같다.


말하자면 호랑이 소리를 호랑이 소리로 믿지 않는 사람은 나쁜 프라이어 때문에 호랑이 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호랑이 소리를 듣지 못하니 호랑이는 없다는 믿음은 점점 더 굳어지고 학습된 프라이어는 우리를 더욱 더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가 어느날 호랑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 사람은 호랑이와 만나게 될 것이다.


인식을 학습과정의 결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위에서 말한 되먹임이 일종의 감각장애를 일으켜서 우리를 특정한 종류의 감각신호에 완전히 무감각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일단 그렇게 되고나면 학습으로 거기를 탈출하기는 어렵다. 그런 종류의 감각신호를 보내는 존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이 이 감각장애인의 ‘경험적 진실’이기 때문에 경험이 늘어갈수록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는 확신은 더 깊어지기만 하기 쉽다.


이것은 정성적으로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정상과학과 패러다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있는 사람은 관찰과 경험만으로 그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것에는 항상 불확실의 벽을 뚫는 비약이 필요하다.


베이지언 모델에 대한 정량적인 분석에서 우리는 똑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학습을 해도 그 학습의 결과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학습을 계속 해도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이 더이상 변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자기 일관적 상태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그런 자기 일관적 상태는 여러개 존재한다.


이런 자기 일관적 상태중 하나는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이 실재와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경우를 현실주의자의 상태라고 부르기로 하자. 하지만 학습은 프라이어와 최대공산확률이 실재와 다른 경우로 수렴한다. 이 상태를 우리는 광신자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신자의 상태가 현실주의자의 상태보다 대개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학습은 광신자의 상태로 수렴하게 만든다.


이 상황을 변화시키는 한가지 방법은 학습에 무작위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즉 엄격한 학습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소음을 포함해서 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광신자 상태를 자기 일관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소음의 존재는 어느 정도까지는 오히려 인식의 정확도를 올리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불확실성이라는 말과 만나게 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사회는 결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도약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뇌를 하나의 기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로 이뤄진 하나의 사회로 본다면 우리는 뇌가 온갖 소음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뇌세포는, 그리고 뇌의 여러 부분들은 기계부품처럼 주어진 대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학습과 망각의 과정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일종의 동적평형상태에 있다. 그러니까 신경세포들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을 때에도 자발적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자극하고 학습하는 준비상태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극이 없는 상태를 정상상태로 여기며 그에 걸맞게 퇴화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끊임없이 흔들리듯이 뇌 역시 자발적인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 자발적인 활동은 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사람에게는 소음으로 측정된다. 실제로 뇌는 이런 자발적인 소음으로 가득 찬 기관이다. 외부로부터 아무런 감각신호가 유입되지 않아도 감각신경세포들은 자발적으로 소음같은 활동신호를 다른 부위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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