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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불확실성의 산책

불확실성의 산책 11 (끝)

by 격암(강국진) 2020. 3. 12.

11. 이야기의 시작과 끝.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1925년에 쓴 그의 에세이 길을 찾아서에서 현대 물리학의 기초에 있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우리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화이트 헤드는 이 과학적 물질주의의 오류를 잘못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저기 시공간의 한점에 물질이 존재한다라는 믿음이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 수학의 추상적 성질을 현실로 착각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철학자이자 교육가였던 듀이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확실한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 과학의 특징이라고 지적하고는 철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촉구했고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힌 철학책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작가 피시어그는 이 새로운 형이상학을 정신병이 생길 정도로 추구했었습니다.


과학을 이해하고 그 과학을 넘어서는 것 즉 과학을 부정하거나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근본에 있는 믿음을 이해하고 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한가를 이해하는 것은 과학의 힘이 점점 증가하기만 하는 시대에는 시대적 과제가 됩니다. 왜냐면 그것에 실패하면 할 수록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과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지 그리고 이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오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시각은 우리에게 불확실한 것을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면 시공을 초월한 법칙이나 객관적이고 검증된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래서 애매함이나 불확실성이란 과학의 적이며 과학의 시대에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은 우리는 실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보다 과학의 핵심적 과제가 이제는 유한한 시간을 존재하고 그 경계가 불확실한 것에 대한 연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학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관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과학의 객관성이나 보편성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가치판단이 없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은 존중해 마땅한 것이지만 과학도 하나의 거대한 신화고 이야기입니다.


과학적 시각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환경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고 생명을 물질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뉴튼 역학에서 말하는 입자가 텅빈 공간에서 혼자 존재할 수 있듯이 환경이란 주변 세상이 없어도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연이 없고 사회가 없어도 한 개인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겁니다. 또 뉴튼 역학이 날아가는 입자에 주목하듯 우리는 생명에서도 물질에 주목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도 살아있는 생명이므로 이런 착각은 우리 인간을 물질과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라 파도와 같은 현상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원소가 그런 성질을 가진 게 아니라 물질들의 집합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파도가 지나간 바다가 그 파도와는 더이상 상관이 없다면 시체는 그 시체가 살아있었을 때의 인간과는 더 이상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의 일종인 인간 역시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특이한 현상이죠.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실은 단순히 살아있는게 아니라 의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슈뢰딩거는 인간의 본질이 의식이며 의식의 본질은 자기 부정을 통한 진화에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실은 정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뭔가가 얼마나 살아있는가라는 표현으로 생명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불확실한 경계를 가지고 동적평형을 통해 자기를 지켜가는 생명은 자기를 둘러싼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반응하고 느끼는가에 따라 그만큼만 살아있습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 경외와 신비를 느끼는 만큼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은 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일 뿐이며, 인간은 그 인간이 사회적으로 축적한 명성과 물질이라고 믿는 순간, 그래서 자기 부정과 진화의 과정을 멈추는 순간 실은 그 인간은 죽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아가 생명은 세상을 보는 만큼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인식의 문제가 생명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가 생명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인식의 문제는 더이상 철학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수학자나 공학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나 로보트의 연구를 통해 어떤 의미로 살아있는 하인이나 친구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공학자들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같은 철학적 질문에 골몰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죽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과학적 사고가 스며든 이 세상의 시스템들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서구의 역사에는 낭만주의적 반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오늘날 과학의 문제가 서구의 문제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날은 전세계가 과학의 시대니까요.


제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 볼 때 저는 그 길에 있었던 가장 큰 화두가 합리적 삶이나 합리적 판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물리학이나 인공지능 그리고 뇌과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그래서 이런 저런 철학책들을 들춰보기도 했으며 그래서 이런 저런 글들을 써서 생각을 정리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분명 특별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사실 과학이나 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문제일 것도 같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면 이것이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이것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에서 어떤 정치가에게 투표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뭘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에 이르는 문제입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당장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 판단이란 무엇인가라던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제가 쓴 것은 이 세상에서 불확실성이 가진 역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주목할 때 우리는 과학이 주는 죽음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일종의 지식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기를 되돌아 보는 순간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아 나는 이런 걸 믿었는데 그게 아닌가라던가 그러고보면 내가 이걸 잊고 있었군하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순간들 말입니다. 이 글들은 그걸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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