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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불확실성의 산책

불확실성의 산책 9

by 격암(강국진) 2020. 3. 12.

9. 생명과 복잡성


생명현상의 무경계성을 강조해서 내가 생명을 무슨 허깨비나 유령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뇌의 복잡성과 비선형성을 강조해서 내가 뇌를 흔히 말하는 것처럼 복잡한 컴퓨터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린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저기 원숭이가 있다라는 말을 쓸 수 있으며 뇌는 부품 하나 빠지면 멈춰서는 컴퓨터가 아니다.


사실 뇌는 상당부분이 부서져도 놀라울 정도로 제 기능을 유지하는 그런 안정된 기관이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예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제일 무시무시한 예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수만건이 행해졌다는 전두엽 절제술이다. 1935년에 최초로 행해진 이 치료법은 한마디로 얼굴뼈의 틈사이로 칼날을 머리속에 넣고 휘저어서 뇌의 전두엽 상당부분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감정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환자가 치료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치료효과는 둘째치고 이렇게 해도 환자들이 즉각 사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뇌가 회로 한 개 끊어지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에가스 모니츠박사는 이 치료법으로 노벨상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뇌를 고의적으로 손상시키는 수술이므로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생명은 끝없이 세상의 불확실성과 싸우면서 자기의 존재를 지킨다. 한 방울의 잉크를 물에 떨어뜨리면 잉크는 물분자의 요동에 따라 흩어지고 만다. 본래 자기를 지켜나가는 힘이 없다면 요동과 불확실성이 가득한 환경안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은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들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죽으면 시체가 썩어서 그렇게 되듯이 말이다.


생명은 환경과 또렷히 구분되지 않지만 만약 생명이 그저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변화는 마치 흐르는 개천의 물줄기에 생기는 물의 쿨럭임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의 변화로 우리로 하여금 저기 마땅히 이름을 받아야 할 뭔가가 있다고 느끼게 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안정성을 만들어 내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다. 예를 들어 일찌기 슈뢰딩거가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했듯이 생명현상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DNA 분자의 화학적 안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방사선에 쬐이는 것이 나쁜 이유는 이런 안정성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생명은 주변 환경에 의해 무력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생명은 자신의 주체성 내지 정체성을 지킨다. 생명의 첫번째 특징은 항상성 (homeostatis)이다.


그러나 만약 안정성만이 전부라면 우리는 왜 돌멩이가 아닐까. 우리는 왜 이렇게 복잡한 생명체일까? 왜 보다 간단하고 지속적으로 분열하는 아메바 같은 생물이 아닐까. 지켜야 할 것이 많고 복잡한 삶은 그래서 뭐가 좋은 것일까.


우리는 왜 아메바가 아닌가.


아메바 같은 단순한 단세포 생명과 인간 같은 복잡한 다세포 생명체를 비교해 보자. 도대체 인간 같은 생명체는 왜 생겼을까. 왜 우리는 그냥 아메바가 아닌가. 뭐하러 우리는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가. 사실 우리는 몇 십년 밖에 못살고 죽는데다가 자손도 몇 명 못 만들고 몸의 각 부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화되어 있는 만큼 오히려 약화되었다. 심장이 파괴되면 개체 전부가 죽는데다가 손이 잘려나가면 그 손은 혼자서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생존과 번식에 있어서 어느 부분이 보다 단순한 생명인 아메바보다 우수한가.


단순한 생명은 환경적 변화에 취약하다. 인간적 관점에서 말하면 그들이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을 인식하는 폭은 매우 제한적이며 그들은 그저 주어진 운에 맡기고 세상을 산다. 적당한 온도, 적당한 영양소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순한 생명체들은 한마디로 떼죽음을 하고 만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서 돈을 내고 밥을 먹지만 단순한 아메바는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환경의 변화에 저항해 싸울, 즉 세상의 불확실성과 싸울 방법이 없다. 아메바가 '이해' 할 수 있는 세상은 매우 제한 적이다. 아메바는 고작해야 자기 세포막 바로 안과 밖의 염분 농도나 느낄 뿐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데 날아오는 칼날을 보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자기 기준으로 좋지 않은 환경을 느낀다고해도 아메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환경이 오래 지속되지 않길 바라면서 한동안 자기를 지켜줄 보호막이 될 껍질을 만들고 수면상태로 빠져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다가 그런 상태가 오래되면 죽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적절한 영양분과 산소를 가진 피를 순환시켜서 몸 안의 세포들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다시 말해 우리 몸 안의 세포들은 복잡한 생명체의 일원이 된 대가로 보다 안정적인, 보다 예측가능한 환경 안에서 살게 된 것이다. 우리 몸 안의 세포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갑자기 주변 온도가 바뀌거나 영양분이 없거나 어떤 유해한 화학물질과 만나거나 해서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각각의 부분이 어떤 분야로 전문화한 대신에 전체로서의 생명이 환경의 불확실성과 싸워서 내부적으로 예측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전문화에 대한 보상은 불확실성의 감소다. 그들은 무질서로 가득 찬 세계 안에서 질서를 확보한 작은 세계를 만들었다.


만약 지구의 환경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것이라면 인간과 같은 복잡한 생명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기억하고 판단하는 생명체는 생겨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단순하게 살고 번식에 최선을 다하는 단세포 생명 쪽이 훨씬 존재를 유지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설 것이며 인간 같은 복잡한 생명은 그런 환경에서 쓰지도 않을 장비를 잔뜩 들고 있는 사람처럼 된다. 물론 매우 매우 안정적인 물리적 환경이라면 애초에 생명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화학적 반응도 없는 안정된 물속에서 생명이 탄생할 턱이 없고 말그대로 우리는 모두 돌멩이 일것이다.


불확실성이 없어서 생명이 자신이 가진 장비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불확실성의 정도는 생명을 어떻게 변화하게 만드는가? 아돌프 이나스는 그의 책 꿈꾸는 기계의 진화에서 재미있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멍게의 일생을 보면 멍게는 유생일 때는 올챙이처럼 생겼으며 바닷물 속을 훌륭하게 헤엄친다. 이 단계에서 멍게의 유생은 훌륭하게 뇌라고 불릴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유생이 어딘가에 유착하여 움직이지 않게 되면 멍게는 말 그대로 자신의 쓰지 않는 뇌를 소화해서 먹어버린다. 그리고 멍게는 뇌없는 동물이 되는 것이다. 멍게는 이제 식물처럼 한 곳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아돌프 이나스는 뇌는 기본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 같은 차이를 걸어다니는 인간과 움직이지 않는 나무 사이에서도 발견한다. 우리는 뇌를 가지고 있으며 나무는 뇌가 없다. 우리같이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생명체는 환경의 변화를 더욱 더 잘 예측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절벽에서 떨어질지 모르고 아예 걷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대신 인간은 먹이가 있는 곳, 적당한 온도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눈도 귀도 다리도 없는 나무는 산불이 나도 가뭄이 들어도 제자리에서 버티다가 죽는다.


우리는 비슷한 사실을 의식현상에서도 발견한다. 사람이 왜 잠을 자는 가는 인간의 의식이란게 뭔가 하는 것과 함께 풀리지 않은 질문중의 하나다. 그러나 잠이나 의식현상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예측이 필요 없는 상황에서 즉 불확실성과 싸우지 않는 상황에서 의식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이 들면 우리 몸의 활동성은 줄어든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나무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사라진다.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을 때도 우리가 뭔가를 습관적으로 행할 때 즉 똑같은 행동패턴을 반복할 때 그런 행동에 우리의 의식은 관여하지 않는다.


의식이란 불확실성과 싸우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어두운 숲속에 뭐가 있을까, 내가 잘 모르는 미지의 곳에서 무슨 공포스러운 것을 만날까 두려워하는 것도 의식이고 골목 골목을 돌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동네의 신비함을 느끼는 것도 의식이며 연인에게서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것도 의식이다. 불확실성이 없으면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한다. 불확실성은 생명과 의식의 기원이다.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1925년에 쓴 에세이 길을 찾아서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은 진화라고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자기를 지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제까지의 자기를 부정하고 진화하는 것이 인간의식의 본질이며 의식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성장하고 진화하지 않을 때 우리의 의식은 잠이 든다. 그리고 의식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본질이다. 불확실성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변화하기를 포기한 순간 우리는 죽는다. 생명의 본질은 항상성과 자기 유지에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본질은 진화와 변화에 있다.


정리하자면 환경속의 불확실성은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우리가 우리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다. 우리가 아메바가 아닌 이유는 세상에 그래야 할만한 양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느끼고 관찰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으로 불확실성과 싸우고 유기체내에서는 불확실성이 보다 적은 상태를 유지한다. 돌멩이는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풍화되어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그 불확실성을 꽤뚫어 보기 위해 고등생명으로 진화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산 것과 죽은 것을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는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살아있냐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있고 또 모든 것이 죽어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살아있음은 그것이 얼마나 넓은 세계를 보고 느끼고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살아있음은 그것이 맞서 싸우는 불확실성의 정도와 관련이 있다. 진화는 덜 살아있는 상태에서 더 살아있는 상태로의 변화다. 그래서 생명의 본질에는 불확실성과 인식의 문제가 있다. 불확실한 것이 없으면 인식할 것이 없고 생명이 없다. 인식이 없으면 생명이 없고 진화도 없다. 세상이 뻔해 보인다면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


이제 인식의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여기서 나는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철학적이기 보다는 공학적이고 과학적으로 말해 보고 싶다. 하지만 결국 이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예들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간단한 예들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한 것이라는 점을 보이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무한한 세계속에서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을 지나치게 믿는다. 그리고 그때 세상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세상은 신비를 잃고 우리는 경이의 감정을 잃으며 우리의 죽음은 시작된다. 과학자들은 이제 실험을 통해 우리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아메바처럼 단순한 생명은 주변 용액의 염분 농도 같은 환경의 단순한 성질로만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한다. 아메바는 세계의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없기에 그만큼 불확실성을 덜 느낀다. 말하자면 아메바는 세상을 비추는 조잡한 거울이다. 플라스크 바깥쪽은 아메바에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세포막 바깥쪽의 세계는 그 구조적 단순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매우 단순화된 형태로 세포막 안에서 반영되고 재생되고 적합한 반응을 이끌어 낸다.


반면에 고등동물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기억한다. 더 폭넓은 환경에 반응한다는 의미에서 고등동물은 아메바보다 더 살아있고 그 결과 이 세상의 불확실성과 더 잘 싸워 자기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어느 생명도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세상 전부와 비교하면 언제나 매우 제한된 구조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한한 존재인 그들도 그들이 보기로 선택한 것만을, 그들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 아메바는 물론 인간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각적 인식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머리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눈에는 여러가지 물건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시각신호를 가지고 구축해낸 이미지다. 시각 신호란 매우 높은 차원을 가지는 복잡한 신호이며 모든 생물학적 신호가 그렇듯이 그 안에 잡음을 가지고 있는 신호다. 게다가 대개 우리는 신호처리를 할 시간도 별로 없다. 우리는 친구의 얼굴이나 호랑이의 낌새를 재빨리 인식해야 한다. 하루 종일 주변을 살핀 끝에 호랑이를 발견해 내서는 곤란하다.


감각 신호의 빠른 해석을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보려고 하는 대상 혹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가정을 도입해야 한다. 가능한 경우를 줄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자동차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를 관찰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는 이 자동차는 동서 방향이 아니면 남북방향으로 밖에 움직이질 않고 북동쪽이나 남서쪽으로는 움직이질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는 자동차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질문받는다면 우리는 동서방향인가 남북방향인가만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신호를 해석하기 전에 신호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 쉽고 정확하게 만든다.


공학분야에는 PCA나 ICA같은 분석기법이 있다. 이런 기법들은 신호에서 통계적으로 중요한 부분만을 뽑아내는 일을 한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시각피질에 존재하는 신경세포도 비슷한 일을 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풍경들을 ICA같은 방식으로 분석하면 자연 풍경속에서 중요한 시각신호들을 찾을 수가 있다. 이렇게 찾은 것은 어디까지나 공학적 계산의 결과물이지만 생물학적인 실험으로 확인해 본 결과 뇌의 일차 시각 피질에 있는 신경세포들도 이런 시각신호성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결국 자연 풍경에서 오는 같은 빛을 처리하는 것을 고민한 공학자와 진화과정은 비슷한 답에 수렴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신경은 모든 가능한 주파수의 빛 중에서 가시광선만을 본다. 가시광선으로 보여지는 것 중에서도 가능한 시각적 형태를 모두 똑같은 민감도로 보지 않는다. 자연에서 자주 발생하는 형태에 집중해서 신호를 확인한다. 뇌는 이미 경험을 통해 특정한 시각적 형태가 자연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올려지는 것은, 즉 우리가 뭔가를 본다고 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은, 우리의 눈이 보는 것보다도, 우리의 시각피질 신경세포가 보는 것보다도 더 작다. 우리의 뇌가 보는 것과 의식을 하는 우리가 보는 것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이 점을 양안 경쟁이라고 불리는 현상에서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양안경쟁실험에서 실험자는 두 개의 눈으로 서로 다른 그림을 보게 된다. 왼쪽 눈에는 나비 그림 신호가 들어가는데 오른 쪽 눈에는 자동차 그림 신호가 들어가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뭘 보게 될까? 그럴 때도 우리는 이 두 개의 그림이 겹쳐진 그림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그림 중 하나만 인식하고 우리가 어느 쪽을 보게 되는가는 이따금씩 바뀐다. 즉 나비가 한동안 보였다가 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동차가 보이게 되는 식이다. 우리는 나비와 자동차를 동시에 보게 되지 않는다. 이 경우 들어오는 시각신호는 변하지 않는다. 두 눈에 비춰진 그림은 시간에 따라 변함이 없는 데도 우리의 시각적 인식은 왔다갔다하면서 한 쪽만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양쪽 눈의 그림들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싸우는 것같다. 그래서 이것을 양안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쪽 눈이 같은 것을 본다고 해도 우리가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고정된 것은 점점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보기 위해 일부러 우리의 시각을 뒤흔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뭔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고 하자. 우리는 우리가 그 물건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눈은 작아도 여러가지 운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조금씩 우리 눈이 점프하듯 움직이는가 하면, 우리의 눈이 보는 곳이 흐르듯 옆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한가지 물건을 계속 본다고 할 때 실제로는 눈을 쉴새 없이 흔들면서 보는 셈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망막에 비춰지는 그림은 항상 똑같지 않아서 망막에 있는 빛을 수용하는 세포는 계속 그림의 다른 부분을 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고의로 이 운동이 의미없어지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거울을 장치한 컨텍트렌즈 같은 것을 사용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이젠 눈동자를 움직여도 거울이 눈동자와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같은 그림이 망막에 맺힌다. 진정으로 한 물체를 계속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문제의,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보는 그림은 수초 안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의식 속에 나타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실은 특수한 장치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 현상은 이미 항상 일어나고 있다. 눈에도 피가 흘러야 하기 때문에 망막에는 혈관이 있는데 우리는 그 혈관을 보지 못한다. 혈관의 그림자는 항상 같은 곳에 맺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같은 자극에 무감각해진다. 우리가 뭔가를 보기위해서는 변화와 불확실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라는 인식행위는 신호를 축소하고 선택한다. 이러한 축소와 선택의 과정은 때로 아주 복잡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체의 동작 때문에 어떤 물건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 (motion induced blindness)도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이걸 보여주는 웹사이트를 찾을수 있는데 여기서는 어떤 간단한 무늬의 배경 그림이 중앙의 한 점을 중심으로 빙글빙글돌고 있다. 그리고 세 개 정도의 점이 그 회전하는 중심 주변에 고정되어 보여진다. 우리가 그 회전의 중심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그 고정된 세개의 점들은 실재로는 존재하지만 이따금씩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


또한 서로 다른 감각신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건이 어디서 일어나는가에 대한 시각적 신호와 청각적 신호를 동시에 받을 때 그 두 가지 정보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때로 스크린에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스피커는 엉뚱한 곳에 있는 경우를 만난다. 이 경우 눈 앞에서 자동차가 달려가는데 소리는 뒤에서 나온다. 눈 앞에서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소리는 뒤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이 감각신호들을 통합적으로 처리해서 소리가 말하는 사람이 있는 쪽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우리의 인식과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태양은 대개 우리의 머리 위에 떠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공적인 조명이 아닌경우 보통 빛의 광원을 우리 머리위에 가지게 된다. 우리의 인식은 이 가정의 영향을 받아서 편향성을 가지게 된다.


아래의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2차원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통상 이 그림을 보고 둥근 모양의 것이 돌출되어져 있거나 들어가 있는 그림이라고 느낀다.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가는 빛이 어디서 들어오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가정에 달려 있다. 같은 그림도 만약 조명이 아래에서 오는 것이라면 움푹 들어가 있는 그림으로 인식되어져야한다. 이 때문에 똑같은 그림이 뒤집어져 있는 경우에 사람들은 대개 그 그림을 이제 움푹 들어가 있는 그림으로 인식한다.





아담, 그래프와 언스트는 2004년에 네이쳐잡지에 발표한 연구를 통해 이런 우리의 기대치는 경험을 통해 수정될 수있다는 것을 보였다. 촉각정보를 줘서 즉 손으로 노출을 느끼게 해춰서 실제로 이것이 돌출된 물체인지 들어가 있는 물체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계속하게 되면 우리의 기대치가 달라지고 우리의 인식은 달라진다. 다시 말해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어떻게 기대치를 축적했고 학습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모든 예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우리는 세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가 보는 것은 여러가지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시각적 인식은 세상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구성해 낸 세상에 대한 추측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감각신호를 받는 경우에도, 외부 세계가 객관적으로는 똑같을 때도 우리가 뭘 기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세상을 보게 된다.


이것은 시각의 문제만도 물론 아니다. 우리가 가진 왠지 이럴 것같은 느낌인 내적인 직관도 이렇다. 그리피스와 테넨바움은 2006년에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예측을 하는가를 연구한 적이 있다. 그들은 실험대상자들에게 특정한 나이 예를 들어 60살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인가라던가 어떤 영화가 개봉 후 이제까지 천만불의 매출을 올렸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매출을 올릴 것인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60살까지 살아남았다면 얼마나 더 살더라라던가 영화가 몇주만에 천만불의 매출고지를 달성했다면 보통 얼마나 더 매출을 올리더라라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경험 혹은 감이 필요하다. 그리피스와 테넨바움은 이런 연구를 통해 사람들의 예측이 실제로 정확한 통계치를 가지고 베이지언 추측이라고 부르는 수학적 방법에 따라 예측을 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예측을 하더라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설문에 답한 사람들은 실제로 어떤 수학문제를 푼 게 아니라 자신의 감에 따라 답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그 감이란 결국 불확실한 상황에서 실제가 될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예측의 문제를 수학적으로 푼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이 경우에도 우리가 어떻게 경험을 축적했는가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느낌을 결정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 싼 불확실성과 싸우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택을 해 나간다. 그에 따라 우리의 인식은 달라지고 확장되기도 한다. 수학적으로 이것은 확률적인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확률 통계적 계산에 대한 생각이, 인공지능이나 컴퓨터 비전에 대한 공학자의 고민이 경제학과 심리학을 넘어서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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