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불확실성
모르는 것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알고 있는 무지고 또하나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무지다. 예를 들어 노벨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의 스승이기도 했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리스크와 불확정성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은 바로 앞에서 말한 이 두가지 종류의 무지에 대한 구분이다. 대개 전자의 무지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있어서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무지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무지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무지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위험한 무지는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무지, 자신이 뭘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다. 이런 무지는 진정으로 위험하지만 종종 자신이 뭘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어 큰 위험을 만들어 낸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적이려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자. 사실 이 말도 틀린 것만은 아니다. 경제력은 이성에 대한 매력의 일부이고 종종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다. 이렇다고 할 때 이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맘에 들어 한다면 이 남자에게 주어지는 내적인 질문은 이렇게 되기 쉽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으면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인가.
이 남자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남자가 말하는 무지란 얼마나 돈이 있으면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무지다. 이 남자는 여자가 남자를 볼 때는 돈이 얼마나 있는가 이외에 다른 것 예를 들어 외모라던가, 문화적 취향, 가족관계등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사람은 한 여자와 가정을 이뤄서 살 때 자기 생활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 애초에 그렇다고 한다면 돈으로 사랑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남자는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 남자는 기꺼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그의 무지는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에 대한 무지다. 그러므로 이 남자가 설사 자신의 무지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 노력은 돈에 대한 노력일 뿐이고 돈에 대한 무지의 인정일 뿐이니 노력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지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잘못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러다가 이 남자의 인생은 큰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건 바보들의 문제고 우리 보통사람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최소한 이런건 그냥 일반인들이 저지르는 실수고 과학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과학자도 자기의 시각에 매달린 채 버젓히 보이는 사실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과학은 수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공동으로 연구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틀릴 수가 있을까? 나는 생명체는 전자와는 달리 애매하게 존재한다고 했는데 확실히 보이는 과학적 이론도 그런 것일까. 어떻게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 바뀔 수가 있는가.
토마스 쿤은 그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어떻게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사고방식의 전환과 관련되어지는가를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발전이란 조금씩 개량되어져 일어나기 보다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물리치고 세상에 대한 전혀 다른 묘사를 만들어 내는 일이며 하나의 비약처럼 일어나는 일이다.
그건 왜 그런가. 그건 복잡성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기를 둬본 사람이라면 장기에는 이런 저런 전술이라는게 있다는 것을 알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우리는 그 전술에 따라 일단 진영을 가다듬는 일을 한다. 그런데 전술을 개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전술을 조금씩 조금씩 끝없이 개량해 나가는 과정인가? 그럴 때도 있지만 진정한 전술의 개량은 비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다른 종류의 전술은 둘 다 상당히 강력한 전술이라고 해도 완전히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의 전술에서 또 다른 전술로 우리가 방법을 바꾼다고 할 때 그것은 작은 개량이 아니라 종종 완전히 전혀 다른 곳으로 비약을 하는 것이 요구 된다. 한쪽을 고치기 시작했더니 나중에는 그게 모든 것을 고치게 만들어서 최종적으로는 본래의 전술과 전혀 다른 모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등산을 하기 위한 등산로를 찾을 때라던가 자동차운전을 배울 때 등 우리가 아는 수없이 많은 일들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핵심은 바로 복잡성에 있다. 복잡한 시스템은 간단한 시스템과는 달리 최적화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전혀 동떨어진 해결책들을 만들어 낸다. 최적화과정은 하나의 국소적 해결방법을 포기하고 비약을 해야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비약이 없으면 소위 국소적으로 최적화된 답에 빠져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전이를 한다던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서 코페르니 쿠스의 천문학으로 전이를 하는 것은 큰 비약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저 방정식이나 근사방법을 조금 바꾸는 정도에서는 그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패러다임이란 언어가 우리가 사물을 생각하는 기본이 되듯이 문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본적 배경이 되는 가정과 이론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란 빨간차에서 검정차로 옮겨타는 것 같은 그런 일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영어문화권에 있던 사람이 한국어 문화권으로 옮겨서 문화적 가치관을 바꾸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의심없이 믿으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도약은 불가능하다. 공간이 휜다던가 시간이 천천히 간다던가 입자와 파동성을 동시에 가진다던가 하는 발상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에 널리 존재했던 가설이나 믿음들을 수정한게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게 가설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자기가 그런 걸 믿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뭔가를 가정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즉 그와 같은 사실들은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실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과학적 이론은 실험적 검증에 의해서 그 예측을 검증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과학적 예측이 틀렸을 때도 반드시 한 패러다임이 포기되고 다른 패러다임을 찾거나 다른 패러다임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다. 쿤은 만약 그렇다면 과학자들의 대부분의 연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어떤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고 있다. 즉 기존의 패러다임 속에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믿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수수께기 풀이를 모르고 있을 뿐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이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불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란 증거가 없으니까 믿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의 패러다임을 믿고 문제풀이를 계속했을 때 설명을 찾아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 현재의 패러다임으로 문제풀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한 비약을 요구하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실한 근거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항상 직관에 근거한 결단이 필요하며 확실한 증거가 저절로 비약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일단 패러다임의 위기상황이 벌어지면 기존 패러다임에서 말하는 여러가지 개념이 문란해 지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기되고 그것이 과학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면 옛 패러다임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런 좋은 예는 위에서 말한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의 전환 같은 것인데 고전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측정할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양자역학은 하나의 존재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해석을 만든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깊숙히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른 패러다임으로 부터의 이야기는 애매하고 개념적 혼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느려진다고? 시간이 뭔지 잘 모르는구만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의 개념을 굳게 믿고 있는 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럴 듯해 보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시각에 확실하고 명백해 보이는 것들에 매달리고 있는 한 그는 결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수 없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믿고 있는 사람은 다른 패러다임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분명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쿤에 따르면 이러한 패러다임의 문제는 과학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강하게 발생한다고 한다. 교육과정과 평가과정을 통해서 정상과학 즉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패러다임이 더더욱 자명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거듭해서 듣고, 그것도 권위있는 사람들, 대학들, 언론사들로부터 거듭 듣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방에 그런 이야기밖에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게 되고 어떤 대안적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우리는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학 그 자체는 어떤가. 이 과학, 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하고 믿는다는 그 패러다임 자체는 어떨까? 처음에 말했듯이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문화, 혹은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에 빠져있다. 그래서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이란게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과학이 너무 친숙해서 과학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과학이 아닌 것도 과학이라고 믿게 된다. 종교가 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멋대로 믿음의 체계를 만들어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그걸 진짜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학을 보려면 거꾸로 과학을 의심하고 그 한계를 봐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과학은 실재 이상으로 작게 보이고 그것이 연구실의 한구석에서 특이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구석구석에, 우리의 머리속 구석구석에 박혀서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마치 항상 숨을 쉬면서도 공기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과 선택 하나하나가 모두 과학적 전통의 영향에 따라 행해지면서도 이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문화에 빠져있기 때문에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큰 위험에 빠져들 수 있다. 과학을 피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며 과학의 중요성을 충분히 느끼지도 못한다. 과학을 잘 몰라서 과학의 한계도 모르고 그러면 과학이 주는 위험을 피할 수도 없다. 우리는 과학을 직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과학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서도 마음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그 과학란게 뭔지 우리가 안다고 동시에 생각한다. 과학이란게 이런거 아니냐고 단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우리는 과학의 얼굴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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