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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회적 협력의 가치를 폄하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20. 6. 6.

 2011년에 나온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라는 책에서 저자 김광기는 미국의 현실을 이렇게 소개한다. 인구의 64%가 현금 천불이 없고 14.6%가 음식을 타먹는 푸드 스탬프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나라. 그보다 일찍 2004년에 제레미 리프킨은 유로피안 드림이라는 책을 써서 미국적 자유주의는 보다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유럽적 가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리더쉽은 빛이 바랬다. 그렇다고 유럽이나 중국이나 일본이 세계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한때 있는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이것은 세계가 영원히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개척, 발전, 풍요의 꿈이 더이상 현실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그 안에서 미래를 찾아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말은 추상적이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 사태때문에 이 추상적인 말이 아주 구체적이 되기 시작했다. 전세계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묻는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오직 경제적 성장만을 위해 최고속으로 돌리던 사회 시스템은 코로나로 문제가 생기자 생각보다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유럽도 중국도 미국도 모두 멈춰섰다. 관광산업은 끝장이 나다시피 했고 의료지원이 한심한 수준이다. 국가간 공조는 거의 즉각적으로 파괴되었다. 중국과 미국이 싸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심지어 유럽도 각자도생의 길로 갔다. 국경은 폐쇄되었고 유럽이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여러 나라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생활침해니 뭐니 하는 말로 본질을 흐리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코로나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의 핵심을 나는 사회적 협력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오직 사람들의 단합된 힘만이 이 병과 싸울 힘을 만들어 준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지금 사회적 협력의 가치를 누가 왜 평가절하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협력에는 적어도 세가지 종류가 있다. 시민과 시민의 협력이 있고 정부와 시민간의 협력이 있으며 국가와 국가간의 협력이 있다. 시민과 시민간의 협력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은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다. 만약 당신이 상위 0.01%의 부자라면 당신은 사회적 협력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첫째로는 당신은 안그래도 살 수 있을 만큼 이미 부자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당신은 이미 훌룡한 사회적 협력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당신에게 연락을 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 사회적 협력이란 훨씬 절박한 문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무력하고 예기치 못한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사회적 협력을 통해 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부부는 단지 아이가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된 것만으로도 난리가 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한두달의 짧은 불황이라도 그걸 버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서로 뭉쳐서 돕지 않으면 치명적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지금 전세계 정부가 돈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국사회가 선전하는 독립과 자유라는 개념이 이 공동체 정신과 반드시 공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지극히 뻔한 사회적 공조가 상대적으로 무시될 수 있다. 좋은 예는 의료보험과 총기소지다. 미국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은 모든 사람이 의료보험혜택을 받는 반면 미국에서는 한번의 질병이 빈곤층을 파산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총기소지도 그렇다. 지금 미국은 흑인을 과잉진압한 끝에 살해한 백인경찰때문에 난리다. 그리고 이 문제의 근원에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권력은 과도한 진압을 정당화한다.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경찰이 누군가를 목졸라 죽이는 것을 주변사람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왜 비디오만 찍으면서 말리지 않았을까? 그 바탕에는 총기소지의 현실이 만들어 낸 관행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반시민이 경찰에게 손을 대면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왜 총기소지를 금지하지 않는가. 개인은 자기가 자기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의료보험과 총기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는 사람들은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보험이 없고 위험한 동네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그냥 내버려둔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개척하라고 한다. 이것은 조직적으로 빈곤층의 사회적 협력을 막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는 않은가? 뭔가의 이유로 빌게이츠같은 부자도 한번의 큰질병으로 파산할 수 있으며 주변 사람들이 총격을 종종하는 상황에 빠진다면 과연 미국부자들이 그런 현실을 그대로 내버려 둘까? 

 

의료보험이나 총기소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독립의 강조는 법은 법이라는말로 가난하고 인적자원이 없는 빈민과 부유하여 자원이 넘치는 부자를 1대 1로 싸우게 만들기 쉽다. 이건 마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에게 너는 독립적 인격이니 알아서 근로 계약을 맺고, 일단 계약을 했으면 법은 법이니 법을 지키라는 태도와 비슷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빈민을 비하하는게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누구나 사회적 협력없이는 거대한 시스템앞에서 어린애같이 미약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보면 미국이란 사회는 무책임하고 착취를 일삼는 나라처럼 보인다. 

 

사회적 협력에는 시민과 정부간의 협력도 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정치적 무기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정부가 시민들을 존중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치에 관한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현실은 대개 그 반대다. 정치를 독점하는 사람들은 되도록 민중이 정치에 무관심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정치적 독점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국이 코로나 19에 모범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지난번 촛불혁명의 덕이 크다. 이번 정부는 촛불혁명의 결과로 태어난지 몇년 되지 않는 정부이므로 시민사회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면이 컸던 것이다. 시민들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또 무슨 정치적 계산에 따라 숫자를 조작하거나 은폐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산을 집행하는 것도 느렸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정부는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존경한다. 그들이 국민에 의해서 탄생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나라는 현실이 이렇지 않다. 가난한 나라들은 오랜 부패정부아래서 좌절하고 국민들은 정치적 무기력증에 빠져있다. 심지어 존중할만한 선진국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비록 좋은 정치관행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혁명은 아주 오래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대중이 정권을 바꾸고 시스템을 바꾼 기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직도 링컨이나 프랑스혁명 운운하면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정작 대중은 백여년 이상전에 확립된 시스템이 보수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시민과 정부간의 협력을 막는 것은 이런 무기력증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민들은 정부와 뭔가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정부는 나를 내버려 두기를 바란다. 정치와 나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치가란 광대에 불과하다. 어차피 세상은 굴러가던 대로 앞으로도 굴러갈텐데 뭔가를 하는 척하는 광대놀음이나 하는 존재다. 

 

지금의 선진국들은 대개 낡았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그들은 이미 아주 오랜간 1등이었으므로 사실은 지금 이대로 세상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아무 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욱 더 가열차게 아무 것도 안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꿀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마지막 사회적 협력은 국가와 국가간의 협력이다. 이 부분에서 미국의 리더쉽이 빛바랬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미국은 지금 국가간의 협력을 촉진하는게 아니라 국가간의 약육강식을 촉구하는 것같다. 일단 미국이 코로나 최대피해자라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트럼프는 코로나가 아니라도 세계와 협력할 생각이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미국으로 되돌리고 미국은 혼자 살아가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미중간의 위기는 여러가지를 의미하지만 그중의 하나는 미국이 자신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은 중국에게 자신이 질거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등소평을 미국으로 초대하면서 중국의 문을 열었을 때는 반대였을 것이다. 오히려 중국이 우리가 문을 열면 우리가 무너진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다. 한국과 일본간의 협력이 약해지는 것도 일정부분 이런 미국의 행동에 영향을 받았다. 아베는 마치 미국이 중국에게 하는 것을 일본이 한국에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같다. 일본은 미국이 아니고 한국은 중국이 아닌데 말이다. 

 

협력은 항상 자신에 대한 신뢰와 상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의 세계는 상대에 대한 신뢰 이전에 자기에 대한 신뢰가 많이 망가져 있다. 세계에는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걸 알면서도 세계는 왜 바뀌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비전의 부재때문일 것이다. 바로 맨처음에 말했던 미국적 꿈의 붕괴다. 

 

이건 꼭 국력이나 돈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리더로서 세계에 비전을 제시하는가? WHO를 탈퇴하고 세계기후협약을 탈퇴하며 북미간의 협상을 뒤집어 버리고 아랍세계와 지속적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미국이 누구를 구원하는가? 미국은 점점 악당국가처럼 변해가고 있다. 세계를 이끄는게 아니라 세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존재처럼 되어간다. 미국이 군사력이 강하고 돈이 많다는 것이 국가간 협력을 촉진할까?

 

비전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은 할말이 좀 있다. 촛불혁명이후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따져보면 그렇게 자신감만 발휘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래 사회에 대한 하나의 모범으로서 한국은 나름의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에 코로나 상황에서 설득력있는 대처모델을 제시함으로서 그러면이 많이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국가간 협력을 계속하자고 한다. 코로나 대처에 대해서 돕겠다고 하고 비결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한국의 힘은 부족하지만 한국말고는 사실상 성공모델이 거의 없다. 혹자는 대만을 말하고 홍콩을 말하며 베트남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자학이다. 한국은 그중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대만보다 인구가 두배고 경제력은 3배다. 베트남이 대처를 잘했다고 해서 혹은 그렇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선진국들이 베트남을 따라하지는 않는다. 자신들과는 현실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은 한국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이 한국이상으로 이번 사태에 잘대처했다면 세계는 지금 미국을 표준으로 하는 대처매뉴얼을 수입하고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한국이 국제공조에 힘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그만큼 미국의 힘이 떨어져서 그렇다. 

 

누가 사회적 협력의 가치를 폄하할까? 사실상 온세상이다. 특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인간적 신뢰를 이미 문제를 드러낸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바꿨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게 아니라 예를 들어 시장이 바꾼다고 생각한다. 시장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쌓여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답은 사회적 협력에 있다. 한국의 미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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