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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쿨섹좌 화법에서 우리는 뭘 배울 것인가.

by 격암(강국진) 2020. 6. 15.

요즘 일본의 정치가 고이즈미 신지로가 펀쿨섹좌 어록이라는 것을 유행시키고 있다. 그가 한말은 동의어를 반복하거나 무의미한 말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여러분 감염만 안되면 옮지 않습니다.

경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불경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고 반성합니다.

 

 

한 나라의 정치인이 하는 말이 이 모양이어서야 물론 농담거리나 될뿐이다. 하지만 나는 신지로 어록을 보면서 두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실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무의미한 말을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것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 할 뿐이다. 정치인은 직업상 너무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말을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직업에서 아마도 제일 처음 배우는 일은 무의미한 말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은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너무 많이 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신호등을 설치하겠다라는 말보다는 신호등의 설치에 대해 알아보겠다라던가 관계기관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겠다라던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해 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후자와 전자의 차이는 후자의 경우는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서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안해도 약속을 어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지로는 아마도 정치가 생활 속에서 자기 생각이 없는데도 인터뷰를 하고 연설을 하는 일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저런 어법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신지로나 정치가가 그렇다는 것은 제쳐두고 우리는 조금 더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신지로와 다른 정치가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듯이 이 문제로 해서 일반인들도 신지로와 같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성적으로 매우 유사한 행동을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일찌기 포퍼는 이 문제를 본질주의자의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패러다임의 문제와도 관련 깊은 이 문제를 나는 무지의 벽의 문제라고 부르겠다. 무지의 벽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의로 이뤄진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동의어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쉽다. 이 문제의 최악의 부분은 우리가 현실을 시스템과 동일시 한 나머지 현실의 어떤 부분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 시스템 안에서는 현실의 그 부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조폭이라고 해보자. 나도 조폭인적이 없으니 그 세계를 액션영화나 만화에서 본 것으로 추측할 뿐이지만 조폭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과 의리 그리고 충성처럼 보인다. 즉 조폭 눈에는 남을 두렵게 만들고 자신은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훌룡한 사람이며 동료와 조직을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훌룡한 사람이다. 

 

세상을 이렇게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뭘 알고 있는가라던가 취미가 어떤가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사람을 폭력으로 위협했는데 그 사람이 꿈쩍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벌벌 떨면 나쁜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권력이 어떻게 생긴 것이건 대단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학문이나 요리 혹은 춤에 미친 사람을 이해시키기란 어렵고 학교졸업하고 직장잡아서 적당히 남들에게 굽신거리면서 자기의 일상을 지켜가는 보통 사람도 이해시키기 어렵다. 그들은 그런 삶에 존재하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폭에게는 조폭의 언어가 있듯이 과학에는 과학의 언어인 수학이 있다. 대표적인 수학 시스템중의 하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보통 기하로 불린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300년경에 원론을 썼는데 이 책은 23개의 정리와 10개의 공리를 제시하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리를 조합해서 유클리드는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증명해 나갔다. 그런데 증명이란 결국 동의어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기하에 존재하는 수많은 증명된 명제는 사실 공리들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에서 펀쿨섹좌 신지로의 어록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매우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는 기하학의 증명된 명제가 '감염되지 않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같은 말처럼 느껴질 것이다. 뭘 한 이야기를 하고 또하나 할 것이다. 

 

조폭의 정서는 언어적으로 매우 거칠고 조악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훨씬 더 엄밀하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인간의 언어나 문화나 학문이 있다.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묘사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처럼 여러가지 것들을 등장시키고 그것들의 정의를 나열한 다음 논리적으로 인간 경제의 여러 부분들을 서로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 관련시켜 나간다. 다만 여기서는 필요한 모든 공리들 즉 모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사실들을 다 나열할 수 없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그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경제학이론이나 경제학 에세이의 뒷편에서 말없이 사용되어진다. 

 

그런데 유클리드 기하학은 우리에게 아주 귀한 교훈을 준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아주 오랜동안 인간이 순수하게 이성만으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너무도 당연한 공리를 인정하고 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같은 명제가 증명되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만으로 도달한 진리가 아닌가? 인간은 무려 2천년 이상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닌 기하학 즉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러시아의 로바체프스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일단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자 현실에서 삼각형을 그렸을 때 그 내각의 합이 정확히 180도가 될거라고 믿을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것이 180도에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용해 왔을 뿐이다. 기하학이란 마치 옷과 같다. 옷은 몸 자체가 아니다. 그 옷을 입어보면 몸에 잘 맞을 수도 있지만 약간 안맞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란 현실과 매우 잘 맞는 수학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사회과학적이거나 철학적 체계를 묘사한 책들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우리의 문화도 생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물론 그 관점내지 시스템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패러다임 비슷한 것을 이루며 우리의 눈을 그 시스템이 가지는 약점에 대해 멀게 한다. 

 

굳이 패러다임 비슷한 것이라고 한 이유는 그 엄밀성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 기하학같은 것은 패러다임이라고 할만 하다. 우리는 명확히 우리가 뭘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는가를 아는데도 그것과는 다른 공리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2천년 이상이 걸렸다. 패러다임은 본래 이처럼 깨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에 훨씬 더 조악하고 일관성없는 시스템은 우리가 용기를 조금 내고 조금 부지런 을 떨면 쉽사리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걸 패러다임이라고 까지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만 정성적으로는 패러다임과 비슷한 성질을 가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패러다임과 분리해서 무지의 벽의 문제라고 부른다. 

 

우리들은 뭔가 그건 당연히 이렇다라고 인정하고 더 이상은 왜를 묻지 않는 사실들을 가지고 있다. 수학에서는 공리라고 부르고 일상생활에서는 상식이나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끝없이 왜를 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만 보면 짖는 개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 개에 대해서 그 개는 사람만 보면 짖는다라고 기억해 두고 멈출 수도 있다. 이 경우 이 개는 그저 고약한 개로 평가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개가 왜 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우린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개의 주인이 밥을 잘 안주거나 개를 학대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 우리는 그 개를 피해자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여기서 멈출 수도 있지만 질문을 더 계속해 나갈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디선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질문을 멈춘다. 우리의 지능과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걸 팩트 운운하면서 그 너머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고 해버린다. 나는 그 행위를 무지의 벽을 세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무지의 벽들에 둘러쌓이게 되는데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들이 공리를 기반으로 증명되듯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 무지의 벽들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책이나 스승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경우 책이나 스승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의 벽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꼭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들은 국가란 이것이고 경제란 이것이며 국민이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정의를 나열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펼쳐갈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시스템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만든 감옥안에 갇히게 되기도 하며, 그 결과 이 세상의 어떤 부분에 대해 눈멀게 되기도 한다. 책을 읽기전에는 오히려 똑똑했는데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나면 자신이 알던 일을 모르게 되기도 한다. 그게 사회적 영향력이다. 조폭생활을 하면서 조폭들에게 둘러싸여 살다보면 그들의 언어와 관점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고이즈미 신지로를 보고 웃는다. 확실히 그의 경우는 정도가 좀 지나치다. 하지만 이런 저런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서 신지로 화법을 자신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신지로를 비웃는 일은 뒷맛이 씁쓸해지게된다. 우리도 신지로 일 수 있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감옥의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감옥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지로의 기괴한 어법속에서 그걸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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