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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

by 격암(강국진) 2020. 12. 7.

최근에 손흥민 선수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축구선수는 경기가 끝나면 팬서비스로 경기중에 입었던 옷을 관객에게 주는 일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손흥민은 유독 아이에게 옷을 주는 일이 많아서 그런 일만 모아서 동영상을 하나로 만들었더군요. 아이를 사랑하는 손흥민이라고 말입니다. 어린 아이를 보면 귀여워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아주 흔하게 보는 광경입니다. 얼마전에 본 BTS의 동영상도 그걸 보여주더군요. 팬미팅 장소에 나타난 9살짜리 팬을 보며 BTS도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같았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노약자에게 친절하라는 것은 세계적 보편 윤리입니다. 아니 윤리이전에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피라는 것은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종의 유전적 특징이고 대를 이어 문화와 문명을 이어가기 위한 문명의 필수요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의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누가 아이인가하는 점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에서도 이게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겠죠. 

 

한국은 보통 미성년자를 아이로 취급합니다. 청소년은 이제 아이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어른도 아니고 관대하게 다뤄져야 할 존재로 여기죠. 나이든 어른들은 초등학생 이하의 아이들처럼은 아니더라도 대개 중고등학생도 귀여운 존재로 여깁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는 이렇지 않습니다. 또 일본은 일본대로 굉장히 다릅니다.

 

미국도 물론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길거리로 나서면 사람들이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봅니다. 그런데 워낙 독립성을 강조하는 미국문화때문인지 미국에서는 초등학생도 자기를 아이 취급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귀엽다는 눈빛으로 접근하면 초등학교 1학년생이 내가 애인줄 아냐는 표정을 얼굴 가득히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남의 아이 함부로 만지다가는 추행으로 고발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동양인에 비해 서양인은 같은 나이에서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학생정도만 되면 정말 이걸 애로 취급해야 하는 싶은 외모를 가지는 일이 많죠. 

 

자기가 성인임을 주장하는 아이의 태도는 단지 생김새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인들이 모두 이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제가 개인적으로 보고 들은 미국인들의 아이 훈육법은 아주 일찍부터 아이를 어른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미국인들이 아이들을 존중하기만 하는 것같지만 이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른대접이란 규칙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며 여기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애교나 떼쓰기가 통하지 않는 다는 거죠. 아이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후 네가 그걸 선택했으니 그 선택의 결과도 네가 책임지라고 하는 겁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부모의 정 특히 한국인이 모두 눈물흘리는 절절한 엄마의 정같은 것이 좀 없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한국 시스템도 그렇듯이 좋은 부모밑에서라면 문제가 없지만 나쁜 부모밑에서라면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규칙을 지키라고 하고 선택은 네가 하라고 한다지만 그렇다고 미국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아이들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제 말은 그 규칙은 어차피 어른이 만든 거고, 아이들은 어른만큼의 지식과 경험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아이 스스로 선택한 것같이 만들면서 부모맘대로 아이를 움직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애초에 공평할 수가 없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네가 선택한 것이니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하면 아이에게 공평하지는 않죠. 

 

애교와 떼쓰기는 한국 문화의 중요한 한 특징입니다. 한국인은 대개 정해진 게임의 법칙을 따르는 성인처럼 행동하지만 때때로 이런 규칙에서 파격을 시도합니다. 아이들이 더 그렇게 많이 하기는 하지만 종종 어른들도 그렇게 할 때가 있죠. 내가 선택한 것도 알고, 내 책임인 것도 알고, 규칙에 어긋나는 것도 알며, 공평하지도 않은 것도 알지만 그래도 한번 봐달라고 하는 겁니다. 예외적인 것이지만 한국은 이런 떼쓰기가 어느 정도 통합니다. 

 

서양인은 이런 걸 하지 않습니다. 특히 성인들은 절대 안하죠. 그런데 한국드라마를 본 한류팬이나 한국에서 오래 생활을 한 사람은 영향을 받아서 그러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는 프랑스여자가 프랑스로 돌아가서 자기 엄마에게 애교를 부렸다가 혼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어른도 부모앞이나 연인앞에서 혹은 아주 친한 친구에게는 그렇게도 하는데 그걸 서양인은 이해못하는 겁니다. 유치원생같아보이니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한국엄마의 반응을 기대했던 그 프랑스여자는 실망이 컸겠죠. 

 

아이에 대한 기준과 문화가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미국에는 학폭이 없습니다. 미국의 학교에는 불량배가 없고 폭력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중고등학생이 그런 식으로 폭력을 저지르면 그걸 기본적으로 성인범죄와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폭력범죄가 있을 뿐입니다. 30대 남자들이 누군가를 패면 폭행이지만 10대 아이들이 그러면 장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국과는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컨닝이나 레포트 베끼기가 때로 낭만 같은 걸로 여겨집니다. 성인이 다른 사람 과제를 훔치는 것과는 다르게 보죠. 이도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관대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겁니다. 미국에서는 학생이 그렇게 하다가는 퇴학도 당할 수 있습니다. 학생과 어른사이의 경계가 한국기준으로 보면 없다시피 한 거죠. 

 

이런 서양과 정말 극단적으로 다른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은 온 국민이 아이같습니다. 옷차림도 아이같고 행동도 아이같은데 특히 여성들이 그렇습니다만 사실 겉보기만 그럴 뿐 아이같기는 남녀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여성의 외모를 칭찬하고 싶으면 아름답다라는 말을 쓰는게 아니라 귀엽다고 해야 합니다. 물론 인구 1억 3천만이나 되는 나라에 한 종류의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본은 이 아이같음에 푹빠져있습니다. 일본의 행동이 잘 이해가 안 갈때 그걸 거대한 어린아이로 보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때가 많습니다. 철부지가 그냥 떼쓰고 억지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 행동에 별로 책임지고 싶어하지도 않고, 일관성이고 뭐고 없이 마구 행동하는 겁니다. 일본인들은 그 문화속에서 이런 철없음과 무책임함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서로 바보같은 행동을 하면서 정을 쌓고 서로 서로 바보라고 부르면서 행복해 하는 그런 문화입니다. 물론 그들도 회사나 학교나 관공서에서는 근엄한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행동합니다만 그 얇은 껍데기 안에 있는 것은 어린애입니다. 일본인의 잔인성도 실은 자기가 뭘 하는지 잘 모르고 책임지는건 별로 생각도 안하는 어린애의 잔인성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신기한 일인데요. 일본은 서구문명을 한국보다도 훨씬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20년전쯤의 일입니다만 저는 미국에서 일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가 본 많은 일본인들은 미국 생활에 잘 적응을 못했습니다. 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한국인들중에도 있지만 일본인들은 유독 그런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때문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은 일본바깥에서 살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포 사회도 한국이 큽니다. 유학도 한국만큼 오지 않습니다. 

 

지금와 그 이유의 바닥을 보면 일본문화가 그만큼 서구문화에서 멀어서 그런 것같습니다. 그들은 껍데기 안쪽이 완전히 어린애이므로 그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서구인과는 잘 맞지가 않는 겁니다. 물론 그들도 미국식으로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것은 그냥 억지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화적으로 공감한다기 보다는 억지로 규칙을 지키는 것같은 것이죠. 겉모습이 비슷해도 주체적으로 약속한 것을 지키는 규칙준수와 마치 어린애가 이런 규칙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규칙은 규칙이니까 착한 아이로 칭찬을 받겠다고 규칙을 지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직설적으로 속마음을 잘 말하지 않고 예절을 잘 지킨다는 일본인의 모습은 여러가지로 이해될 수 있으며 제가 뭐라고 한 들 그것도 또 하나의 설명일 뿐이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그냥 초등학생들이 교칙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초등학생에게 선생님이나 학교의 결정은 거의 신적인 결정이죠. 왜가 없습니다. 그냥 규칙은 규칙이라고 따르는 것이고 규칙을 잘 지키면 착한 학생이라고 칭찬 받는 것이며 내가 뭘 배워야 할 것인가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것이죠. 이는 아마도 메이지 유신 이래 천황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며 살았던 시대의 모습에서 일본인이 전진한게 별로 없어서 그런 것같습니다. 지금의 일본인들은 진짜 진지한게 뭔지 잘 모릅니다. 책임감이나 진정한 자기 선택이 뭔지 모르는 어린애들처럼 말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떼쓰면될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한국식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만 사실 정도의 문제일뿐 한국과 서구와 일본간에 여기까지가 한국식이라는 분명한 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어느 선이 적정선이냐에 대한 고민과 조정도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한국도 미성년자범죄에 대한 고민이 깊어갑니다. 이 일의 바닥에 있는 것은 물론 아이라는 개념에 대한 조정과 이해죠. 

 

요즘 최고의 지구적 화제는 한류입니다. 심지어 코로나라는 재앙속에서도 한국뉴스는 늘어만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라마다 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문화가 퍼질 때 그것이 이쪽방향으로 영향을 많이 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한국과 서구와 일본이 모두 다르다고 말했지만 응답하라 1988이나 아저씨같은 드라마는 전 지구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더군요.

 

이 두 드라마 모두에서 아이와 어른이라는 개념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응팔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이였던 시대에 대한 추억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것은 그 시절에 정정했고 우리를 돌봐주시던 부모님과 이웃 어른들에대한 추억이기도 하죠. 아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른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응팔에는 가득합니다. 외국인들이 이 드라마에서 인상깊은 장면중 하나로 꼽았던 것이 덕선이가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우는 아버지를 보는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울지 않는 아빠를 보고 아빠는 참 독하다고 생각했는데 큰형이 오자 그 앞에서 우는 아버지를 보고 어른도 그저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라는 것을 말하는 장면이죠. 이것은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뭔지를 말해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이유가 주연했던 아저씨라는 드라마는 드라마의 주제자체가 진정한 어른을 찾아서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어른이란 세상의 온갖 쓴 맛을 다 보면서도 인간적인 정을 잊지 않고 특히 어린애의 아픔에 등돌리지 않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줍니다. 이 드라마에서 이선균이 아이유를 불쌍해 하면서 아직 애가 아니냐고 외치는 장면이 몇번 나오는데 그런 장면에서 우리는 진짜 어른을 보게 되는 거죠. 

 

이런 드라마가 계속해서 인기가 있을 때 서구와 일본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요. 일본은 서구와 너무 문화적으로 떨어져서 서구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서구와 일본의 중간쯤에 서서 양자를 모두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아이를 사랑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흑인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요. 흑인사회에서는 75%의 아이가 아빠없는 편모가정에서 자란다고 하더군요. 그 사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아마도 한국문화일 겁니다. 부모는 자식을 책임져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며, 공부열심히 하고, 선생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그 문화말입니다. 

 

일본의 아이돌 문화가 잘 보여주듯이 일본문화는 거의 퇴행병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이에 몰입해 있습니다. 겉으로만 강한체 하고 진짜 강한게 뭔지 잘 모르죠.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 떼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짜 강한 걸 알겠습니까. 일저지르고 할복하면 강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는 것보다는 살기가 진짜 싫어도 어떻게든 살아서 자기 할 일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인 것이죠. 

 

한국드라마가 들어갔을 때 일본에서 두가지 평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남자도 울어도 되는지 몰랐다는 겁니다. 서구도 그랬지만 일본드라마에서 남자배우는 절대 울지 않았거든요. 속은 어린애면서 겉으로만 강한체 하는 허세있는 일본문화가 이미 한방 맞은 겁니다. 둘째는 한국드라마에 너무 감정적으로 몰입해서 괴로울 정도라는 것이죠. 그들은 드라마안에서도 진짜 아픔이나 고통을 계속 회피해온 겁니다. 어딘가 드라마도 애니같은 걸 실사로 만든게 아닐까 싶게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죠. 물론 연기를 잘 못해서 그런게 크겠지만 이는 진짜 문제 즉 정치적 문제, 진짜 책임을 지는 문제를 외면하고 계속 환각속에서 사는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에서 등돌리고 눈만 감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애같은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 한국문화가 일본에 전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메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흔하지만 옳은 말이죠. 그런 건 힘들고 가치없는 인생낭비니까 그냥 나는 나 가진 것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거나 하며 살다가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한국의 미래, 나아가 인류의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새 도전이 없어지고 흥분이 없어져서 무슨 시한부 불치병환자만 사는 병동같아지겠죠. 젊은이들의 활기는 아주 중요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이에 대한 어른의 사랑이 사라지면 작게는 나라가 망하고 나아가 인류가 망할 겁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누구를 어떻게 아이취급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이렇게 세계화된 시대에도 나라마다 다릅니다. 그러니 계속 고민해야겠지요. 학폭문제같은 것도 이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미성년의 선을 조금 더 내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정답은 없으니 고민과 대화가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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