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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은혜를 갚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

by 격암(강국진) 2020. 12. 13.

오늘날 한국사람은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와 의로운 사람의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일본과 한국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한국 내부의 사람들도 겪는 문화적 차이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한류의 인기비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그런데 각각의 문화는 내부적 눈으로 볼 때 당연한 것으로만 보인다. 이 문화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두 개의 문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은 유달리 빚지기를 싫어하고 조심스러워 한다. 일본 윤리의 핵심은 은원관계이다. 이는 일본 문화 이야기를 하면 꼭 언급되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도 나오는 내용이거니와 사실 그 책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미 70년전에 나온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의 젊은 세대는 좀 다른 듯도 하지만 어차피 지금의 일본은 나이든 기성세대에 의해 지배되는 매우 보수적 국가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 그것이 여전히 일본문화의 핵심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남에게 빚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은혜를 입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마치 노예라도 된 것처럼 굽신거려야 한다는 것이 일본문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깔보는 일본 혐한의 기본적 관점은 조선은 일본에게 은혜입은 부하나 동생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는 명제는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옳기만 한 것같지만 현실을 그렇게 간단하게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아빠를 좋아해야 한다는 명제는 자식에게는 당연한 명제이지만 누가 아빠가 더 좋냐 엄마가 더 좋냐고 하면 어리석은 질문이 되지 않는가? 현실에서 문제는 어떤 하나의 명제가 옳냐 그르냐가 아니라 대개 여러가지 명분과 가치가 충돌하는 가운데 그것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에서 나온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다는 명제를 포함한 어떤 주장도 절대적이지 않다. 은혜를 입었으면 살인이라도 도와주고 나라를 팔아먹어도 숨겨줘야 한다는 결론은 어리석은 것이며 적어도 당연한 것은 될 수 없다. 

 

사실 좀 더 큰 시야에서 보면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유치한 윤리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나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진짜 은혜는 공기나 물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걸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은혜를 잊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말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는 그런 은혜 빼고는 전부 자기 힘으로 살고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누구도 자기가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다. 내가 너무 힘들 때 나를 도와주고 세상이 나를 무시할 때 나를 알아준 은혜는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없었다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 은혜 말고는 세상에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은혜는 갚기가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권위주의적 사회를 만들게 된다. 가난한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은혜나 경험없는 부하직원에게 충고와 기회를 준 상사의 은혜는 얼마나 하면 갚을 수 있는 것이 될까? 사실상 갚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개 그럴 기회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 은혜를 입으면 평생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은원의 윤리는 사회를 종적으로 줄세우게 된다. 이는 봉건사회에서 종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는데 아주 편리한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일본 전국이 통일되지 못하고 혼란하여 국가질서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 만들어 진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는 수신을 중요시 한 조선선비의 윤리나 기독교적 가치를 소중히한 서양 종교인의 윤리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욕망이 다르면 윤리도 다르다. 

 

결핍은 욕망을 만든다. 옷이 없는 사람은 옷을 가지기 원하기 마련이고 배가 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하기 마련이며 인간다운 존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인간답게 대우받을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그것을 간절하게 원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런 시대의 여러 욕망들은 종종 서로 충돌하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다 바라는 것을 적어도 지금 보다는 더 가질 수 있는 방식을 열심히 찾는다. 그것이 사회적 문명적 변화를 이뤄내는 비전이 만들어지는 방식이고 혁명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그리고 개혁과 혁명이 하는 일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내세우는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그 이전시대가 가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이 삶의 방식은 처음에는 인위적으로 느껴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것은 윤리적인 규범으로 여겨진다. 즉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질문이 필요없는 당연히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봉건 국가에서 국가의 권력은 왕에게 집중된다. 따라서 왕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것은 사회적 질서의 붕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사회에서 왕에게 복종하고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누가 스스로 충성의 윤리를 만들겠냐고 하겠지만 사실 더 광범위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생겨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더 평등해진다. 왕을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이 왕에게만 충성하면 깡패걱정을 안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동안 계속 되면 이제 백성과 신하가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그냥 당연히 옳은 윤리적 규범이다. 백성이라면 당연히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왜 충성해야 하냐고 그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불충스러운 행위다. 

 

우리는 윤리적 교육을 통해 조상들의 낡은 꿈과 욕망을 새로운 세대에게 주입한다. 새로운 세대도 대개 기성세대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세대에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도구와 지혜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빨리 변하고 보수성이 너무 커지면 낡은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이고 존재하는 문제는 보이지 않도록 하는 가림막이 된다. 낡은 윤리가 새로운 시대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잡한 삶의 방식 저 아래를 파고들어가 보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시대의 욕망 그러니까 부국강병이라던가, 쌀밥에 고깃국 먹는 꿈이 존재할 수 있다. 지금은 홍수가 문제인데 가뭄때의 욕망이 우리의 윤리에 남아있을 수 있다. 이건 뼈아픈 오류다.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와는 달리 의로운 사람의 문화는 그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을, 좋은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람과 도움을 준 상대의 관계에 주목한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의 문화는 이런 1 대 1의 관계보다 우리를, 공동체나 세계를 먼저 의식한다. 그것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하며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의로운 사람의 문화다. 이에 비하면 개인적인 부채를 해결하는 것은 뒤로 순위가 밀린다. 

 

의로운 사람의 문화가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와 반드시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이 기회가 되는데 은혜를 갚지 않을리가 없다. 하지만 좋은 사람은 조폭같지는 않다. 형님이 키워주고 보살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사람의 문화에서는 암묵적으로 은혜는 세상에 갚는 것이 된다. 앞에서 말한대로 은혜란 다 갚을 수도 없는 것이거니와 어떤 은혜도 갚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의 문화에서는 공동체와 세계가 존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매개로 서로가 서로에게 진 빚을 갚게 되는 것이다. 

 

기회가 되어 도움을 받았으면 기회가 될 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 된다. 살다가 인연이 되어 만나고 도움을 주고 받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금방 또 자기 길을 간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 내 도움을 받게될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가 비올 때 나에게 우산을 줬다고 해서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우산 빌려줄 기회를 찾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 사람이 그랬듯이 나도 살다가 누군가가 우산이 없는 걸 보면 우산을 빌려주면 된다. 

 

은혜의 윤리는 보다 낡은 욕망의 흔적이며, 보다 낡은 방식의 삶의 흔적이다. 그것은 같은 마을에서 대대로 뭉쳐 사는 사람들의 윤리이며 기초적 사회적 질서가 없던 무질서에서 탈출하고자하는 욕망이 만들어 낸 윤리다. 그것은 단순하고 강력하지만 확장에 한계를 가진다. 이에 비하면 의로운 사람의 윤리는 사람들이 끝없이 오고 가는 도시의 윤리이며 기초적 사회질서는 예전에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고민하여 만들어 진 윤리다. 이웃이며 동창이며 친척도 정신없이 변하고 옮겨다니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에 가깝다. 한때 매우 가까웠다고 해도 정신차려 보면 각자 사느라 바빠서 서로 십수년간 연락한번 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이 현대의 삶이다. 그런데 도움을 받았으면 그걸 그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는 윤리는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언뜻 보면 아름다워 보이는 은혜를 갚는 윤리는 무서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남의 도움을 감사히 받기 위해서는 나는 그 도움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 도움이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아야 하며 나는 그 도움을 갚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나의 원칙을 지키고 가치를 지킬 것이며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계속 신경쓰며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도움을 받는 것은 노예 문서에 팔려가는 것에 어떤 패거리에 가입하는 것에 가까워진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실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다. 이러니 단순히 감사할 수만은 없다. 이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적 상징중의 하나가 할복인데 이것은 일본이 얼마나 허약한 사회인가를 보여준다. 물론 현대일본에서 할복이 마구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나름의 체계를 가질 정도로 일본의 전통 문화는 위계질서 내부의 혼란이 생기면 이걸 극복해 내질 못하는 것이다. 은혜를 입으면 어떤 위계질서에 편입되게 되고 그 질서에 혼란이 생겨 그 은혜를 갚을 방법이 없어지면 극단적 선택밖에는 할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면 자살이고, 명령을 받으면 자살이다. 물론 어느 나라나 사형제도가 있지만 이는 사법적 판단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말해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적응력이 떨어진다. 의로운 사람의 문화는 복잡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적응력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사회적 혼란이 있을 때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에서는 자살이 일어나지만 의로운 사람의 문화에서는 혁신과 혁명이 일어난다. 해결하지 못할 내부적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므로 우리는 새로운 삶의 규칙을 설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게임을 바꾸는 것이다. 

 

조선은 본래 의로운 사람의 윤리를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그 지역의 봉건영주인 번주가 왕처럼 사는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일찌감치 개국때 부터 중앙에서 관리를 내려보낸 법치국가였다. 외적이 처들어 오면 의병이 일어나는 나라였고 무력보다 문화와 학문을 숭상해서 세상의 보편질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의 왕은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쇼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왕의 모든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의 문화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지나고 군사독재시절을 거치면서 한국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갚는 사람의 윤리를 믿게 되었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다. 보통 보수세력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때로 친일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렇게 문화적으로 그들이 일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일제시대의 유산이다. 

 

하지만 일본이 21세기에 적응하지 못해 30년 이상 정체를 보이고 있듯이 이 보수성향의 사람들도 요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서 스스로도 불편하게 살고 남들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많다. 예전에 직장에서 나이든 남성들이 보이는 리더쉽에는 아주 간단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술이나 밥을 부하직원에게 먹이고 사석에서도 위아래 직장관계를 그대로 강조하며 때로는 자식이나 동생처럼 부하직원을 여긴다고 말하고 행동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와도 연관이 있는 이런 관행은 결국 조폭의 윤리고 은혜를 갚는 사람의 윤리이며 일본적인 윤리다.

 

이런 인간관계의 저변에는 공식적인 규칙이나 명분보다 일대일의 개인적 친분이 더 중요하다는 가정이 숨어있다. 한마디로 내가 너에게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도 나에게 그렇게 해서 우리끼리만의 잘먹고 잘사는 패거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내 친구와 지인에게 친절하게 행동한 것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런식으로는 그 지인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이 자연히 차별받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는 의로운 사람의 문화와는 다른 것이고 후진적인 문화다. 그때문에 오늘날 리더쉽 문제로 고생하는 가장이나 나이든 직장 상사는 한국에 수두룩 하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비판이나 도움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은혜를 갚는 문화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노예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도 자신의 독립성이 침해받는 것이 싫기 때문에 간섭이 싫고 도움도 번거러워할 수 있지만 은혜를 갚는 문화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

 

의로운 사람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의 세계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민주적 관점을 가진다. 모든 사람들은 게임에 참여하는 참여자이고 공동체의 일원일 뿐이다. 자신이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의 정체성은 자기 개인 내부의 생각에 의해서 정해진다. 즉 자기 성찰과 수신이 중요하다. 하지만 은혜를 갚는 문화에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을 수직적 위계속에서의 위치로 파악한다. 즉 자리가 자신의 정체성이다. 체면이 상하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 자체가 위협받는 일이다. 장군이 졸병으로 살 수는 없다. 

 

문화적 매력이란 표면적으로는 신기한 묘기나 맛있는 음식에서 나오는 것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하나 하나의 문화적 측면이 매력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조화를 이루게 만들 삶의 전반적 방식이 매력적이지 못하면 문화적 매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과 중국의 소프트 파워가 가지는 한계다. 이들은 여전히 봉건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은혜를 갚는 사람의 문화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미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한 서구 문화가 자랑하는 민주주의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서구 문화의 대안으로, 서구 문화의 한계를 반성하는 계기로 작동하기 어려운 것이다. 세계인은 일본과 중국을 쓸모있는 국가라고는 생각해도 존경할 수 있는 국가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아직 한국이 완벽히 세계인의 관심을 감당할 만큼의 역량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도 그렇다. 우리는 한민족도 제대로 포용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한류의 기둥에는 의로운 사람의 문화가 있다. 이는 20세기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증명되고 부활한 것이지만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전통 문화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방식의 삶인데다가 서구와도 다른 것이다. 이것은 존경할 만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고 서구적 삶이 가진 한계를 분명히 해주는 것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서구적 개인주의를 포용하면서도 공동체의 이익을 저버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이는 조선이 이미 5백년 이상 전부터 근대국가가 가지는 특징을 보이며 운영된 나라였기 때문에 배양된 잠재력이다. 그 조선은 한글을 만들어 글자를 대중화 시킨 나라였고 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교육적 열정을 키운 나라였으며 국가가 국방과 무력보다 정신에 집중한 드문 나라였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 망했고 일본은 그들이 조선보다 강하며 조선인들은 쓸데없이 싸우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어 세계가 초정보 사회로 변하자 문화의 강함과 약함은 다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호랑이도 물속에서는 약하듯이 애초에 강약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환경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는 한국의 문화가 강하다. 조선의 문화가 더 강한 문화고 보편적이며 포용성이 큰 문화다. 이것이 한국이 일제시절의 잔재에서 벗어나면서 보여주고 있는 문화적 저력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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