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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국뽕의 역습

by 격암(강국진) 2020. 12. 26.

2020년이 끝나간다. 올해를 말하는데 있어서 코로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겠지만 국뽕이라는 말도 상당히 중요하다. 코로나 세상에서 한국은 전혀 다른 이미지를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세계에서도 만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위 국뽕이라고 여겨지는 게시물이나 방송이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 컨텐츠들인데 유튜브에는 지금 스스로도 국뽕방송이라고 인정하는 유튜버 채널이 꽤 많다. 이는 그런 컨텐츠들이 큰 조회수를 얻기 때문이지만 상대적으로 공중파방송이나 신문같은 기성미디어가 국뽕컨텐츠를 굉장히 막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성체제가 국뽕 컨텐츠를 전달해줄 정보채널을 필요하게 만들고 있다. 

 

2020년에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보편과 특수의 구도는 크게 흔들렸다. 우리는 보편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 특수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흔한 것이지만 이 질문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보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특수가 되고 특수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편이되는 문화역전현상 혹은 게임 역전 현상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한국에서 보편과 특수란 세계와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세계적 보편상황이 있는 가운데 한국적인 특수성이 강조되었고 이 구도에서 한국은 대개 배우고 쫒아가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한국이 지난 반세기 이상동안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를 경험했고 또한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세계는 서구 사회 중심적인 곳이므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물론 세계의 진정한 보편이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들에 의해 결정되지만 우리가 세계 보편을 따르자고 할 때 이 보편이란 사실 선진국의 문화와 생활수준을 말하는 것이었다. 윤리적 문화적 보편 기준을 말할 때 우리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어느 가난한 독재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잘 사는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같은 나라를 보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과 특수의 이해속에서 한국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은 반성과 변명을 의미했다. 대개 반성은 시민들에 대한 것이고 변명은 기득권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한국이 선진국들에 비해 혹은 세계 보편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말할 때 우리는 한국이 특별하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불과 5년 10년전만해도 한국인 형편없다, 한국은 헬조선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했다. 교통신호를 어기거나 줄서는 질서를 어기는 한국인이 있으면 선진국은 이렇지 않다고 하는 말이 습관처럼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더욱 극단적이어서 조선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누가 봐도 일제시대 일본인이 할 것같은 말인데 말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특수성에 기반한 변명은 기득권에게 쏟아졌다. 그들의 성추행, 폭력, 폭언이나 탈세, 불법적 회사운영같은 것은 언제나 한국적 특수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거나 관행이라고 말해지고는 했다.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재벌의 세습문제다. 전 세계에 삼성규모의 주식회사를 혈연에 기반하여 세습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진정한 회사의 주인이 주주라는 보편적 상식이 한국에서 무너지는 것을 변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은 특별하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의 기득권과 한국의 기성언론은 이런 보편과 특수의 구도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이것이 당연한 것이며, 세상을 보는 유일한 답이라고 만 생각한다. 아예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3조를 훔친 사람은 걱정해 주고 3천원을 훔친 사람은 엄히 벌해서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게 정의라는 것이다. 

 

기성언론들에게 기득권은 변명해 줘야 하고 한국은 못난 나라라고 욕하는 것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연히 한국이 잘난게 있다면 그것은 박정희나 이건희처럼 몇몇 개인의 공이며 한국대중은 수준이 낮다고 설명하게 된다. 그 반대로 기득권의 경쟁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역량이 높아 한국이 발전했다는 민주적 관점을 가지는 사람은 포퓰리스트정도로 욕하면 다행인 정도다. 그야 말로 인생을 탈탈 털어서 뭐하나라도 나오면 죽여버리려고 하거나 아예 아무 것도 안나와도 증언만으로 유죄를 내린다. 연매출 조단위의 다스를 키우고 소유한 이명박 일가에게는 무한히 관대하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노무현의 사저는 아방궁이라는 기사가 얼마나 세상을 뒤덮었던가. 삼성이 탈세를 하면 그걸 비난하는게 아니라 한국 경제가 위험하다면서 이건희 이재용일가 걱정해 주기 바쁘다. 

 

하지만 이런 보편과 특수의 이해가 가지는 모순은 한국이 발전함에 따라 누적되어 왔는데 그것이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폭발해 버렸다. 그걸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20년 초, 코로나 사태의 초기에 일본에 기사를 송고해 오던 한국의 보수언론들의 기사를 한국 대중이 보게 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때 기묘한 몇가지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로 일본 야후같은 곳에서 한국 신문의 일본어판 기사가 아주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포털사이트에서 일본 아사히나 마이니치 한국어판 기사가 최고 인기기사였던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일본 포털에서는 그렇다. 둘째로 그 기사는 일본은 무조건 칭찬하고 한국은 무조건 저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일본이 선진이고 보편을 차지하고 한국은 후진이고 특수하다는 인식을 반복하는 기사들이다. 이무렵 일본이 보여주는 그 모든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의 전수진 기자는 한국인이라서 미안합니다라는 기사를 쓴다.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이런 수치와 충격을 주고도 여전히 기자를 계속하면서 컬럼을 쓰고 있다. 

 

한국의 기성언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지금이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영광의 시대라는 것을 보도하지 않는다. 전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처를 칭찬해도 그걸 무시하고 OECD 국가중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도 코로나 이전에 비해 경제가 침체되어 있다고 말하며 한국의 주식이 미국의 주가상승률을 압도하면서 역사상 최고점에 올라도 그저 한국경제는 폭망했다고만 말한다. 이런 보도 태도의 기묘함이 폭발한 한가지 사례가 바로 위에서 말한 일본어판 기사들이다. 한국인들은 이게 한국의 관점인 건지 일본의 관점인 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런 자학적 기사들이 일본정부가 한국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어서 한국 국익을 망치고 있다. 일본정부가 한국에 경제제재를 할 때 그들은 한국정부의 항복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문재인을 탄핵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조중동만 보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문재인 정권은 인기도 없고 한국은 그런 힘없는 나라였을테니까 그렇다. 우리는 협박하면 바로 항복한다고 외국인들을 설득하는 신문이 한국의 주요일간지들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태도는 미친 반역행위로 여겨질 것이다. 

 

코로나때문만은 아니지만 코로나 시기가 길어지면서 보다 빨리 분명해 진 경향은 바로 보편과 특수의 역전이다. 보편이란 보편이 아니라 서구 중심적이고 세계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기성 선진국 중심의 특수한 관점이 되었다. 코로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미국과 유럽의 상황도 그랬지만 과거의 보편과 특수의 이해속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BTS라는 한국 남성 그룹에 열광하는 서양의 백인 소녀들이었다. BTS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빌보드 1위를 하고, 서구 사회가 유독 동양인 특히 동양인 남성에 대해서 비하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한국 가수, 한국 영화와 드라마, 한국의 음식등 문화적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이것은 한국의 방역뿐만 아니라 한국의 치안, 한국의 의료, 한국의 자연, 한국의 의복으로 끝없이 넓어진다. 일단 보편과 특수의 역전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이 생겼다. 해외의 외신들이 한국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유명 게시판에서 한국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늘어놓는 게시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이나 미생, 도깨비 같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감동해서 폐인수준이 되었다는 외국인들의 고백따위는 세상에 흔하다. 한국인은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한국 학교의 급식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상황에 어리둥절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깨닫는다. 이제까지의 보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이 아니었다. 그것도 역시 특수였는데 바로 외국인들의 눈으로 보는 특수였다. 이제까지의 특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특수였는가? 그것이 특수인 것은 한국이라서 그랬다는 것인데 한국인들만을 위해 만든 노래와 영화와 음식이 세계인의 인기를 누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특수인가 보편인가. 소수자가 주류가 되고 주류가 소수자가 되는 특수와 보편의 역전은 흥분을 만들고 감동을 준다. 지난 미국 아카데미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했을 때 승리의 함성을 울린 것은 단순히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만은 아니었다. 먼저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 나아가 동양인들이 뜨겁게 탄성을 내질렀다. 게다가 흑인이나 백인등 동양인도 아닌 사람들도 펄쩍 펄쩍 뛰면서 좋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단순하게 한편의 영화가 성공하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한국음악이 pop속의 Kpop으로 불리듯 보편의 게임속에서 특수한 게임으로 여겨지던 소수 문화가 주류로 나아가는 것을 본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차별이 드디어 무너지는 사례를 본 것이다. 이것이 감동적인 문화 역전 현상이고 게임 역전 현상이다. 이 세계에서는 일본인들이 일본인만으로 된 니쥬가 kpop 본고장인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가 없는가를 신경을 쓴다. 세계인이 빌보드만 신경쓰는게 아니라 한국의 음원순위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보편-특수라는 관점에 갇혀 있는 한국 사람은 많다. 지금도 한국안에 잠재한 모든 위기는 한국이 폭망할거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여기면서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유럽이나 중국이 가진 그 모든 모순과 위기는 별거 아니라고 단언하는 한국 사람은 많다. 그들은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미래를 열어갈 것이고 우리는 희망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태도는 단순히 뒷골목의 노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기성 언론들에게서도 발견되고 그래서 요즘은 BBC나 뉴욕타임즈가 민족 언론이라는 비꼬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하다. 한국인의 언론 신뢰도나 사법 신뢰도는 OECD 최저다.  

 

그리고 여기에 국뽕이라는 말이 있다. 당연히 한국을 칭찬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거나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자아도취에 빠져서 한국이 거만해 진다면 국뽕은 한국에 역습을 가할 것이다. 하지만 국뽕의 역습이란 꼭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가 운영되어지는 것은 사안 사안마다 각각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기로 하고서 엔진을 만들었다고 해도 바퀴가 없으면 쓰레기일 것이다. 그러니 바퀴만들기를 한사코 거부하면서 엔진은 쓰레기라고 말하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대안없는 비판이 가진 문제가 이것이다. 과거의 보편속에 갇혀서 빈정거리고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이 가지는 문제가 이것이다. 

 

이건 패러다임의 문제다. 국뽕을 억누르기만 하는 것이 한국을 살리는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뭘 부끄러워하고 뭘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자랑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중이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발전시킬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 이유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기계적 중립 운운 하면서 과거의 패러다임을 반복 생산하고 있는 기성 언론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지극히 편파적인 언론이다. 요즘 시절에는 그 편파가 거의 매국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편파가 매국이 될 때, 보편과 특수의 역전이 전세계적인 흐름을 얻을 때 기득권은 또다른 종류의 국뽕의 역습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억눌러온 국뽕의 역습이다. 패러다임이 바뀔 때 가장 늦게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시대의 처벌을 받게 된다. 그들이 미쳤다고 부르는 사람들이 보편이고 보편이라고 믿는 자신이 미친 사람 소리를 듣는 것은 그 처벌중의 하나다. 또다른 예도 있다. 코로나 위기로 주가가 폭락했을 때 한국 주가를 지킨 개미투자가들을 동학개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모두는 아니라고 해도 이들은 주로 한국의 미래가 밝다는 것에 투자한 사람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경제적 피해를 입는 것도 국뽕의 역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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