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국을 보면 민주주의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시민들의 뜻대로 나라를 운영하는 거라고 했을 때 만약 그 뜻이 나라에, 시민들에게 해로운 거라면 어떻게 하는가?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깨어있고 단합을 가능하게 하는 상식을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현실이 그와 같지 않아서 때로는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은 스스로 아프고자 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입장과 비슷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입으로는 안 아프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스스로 몸이 아파질 일을 하는 환자를 의사는 어떻게 치료하는가? 사람들마다 생각도 다르지만 설사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처럼 동의하기 쉬운 같은 목적과 가치관을 가진다고 가정해도 민주주의제도하에서 사회는 결코 그걸 위해 직진하지 않는다. 때로는 후진 하는 것같다. 마치 여성평등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여성차별주의자에게 투표하는 유권자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답은 실수와 실패는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이리저리 시도하다보면 우리는 최적의 상태를 향해 전진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개인이 그게 잘못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답은 이리저리 많은 시도를 하는 도중에도 우리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요즘처럼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정당화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사람이 많이 탄 버스를 운전하는데 운전자를 번갈아서 바꾼다고 해보자. 그런데 2-3번에 한번은 면허가 없는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과연 그 버스는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착할게 될까? 그 이전에 운전면허가 없는 운전자가 운전하는 동안에 사고로 모두가 죽는거 아닐까? 다시 말해 다양한 시도가 발전적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다양한 시도들이 최소한 자멸적이지는 않아서 불가역적인 피해를 남기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약들이 내 몸에 맞는 약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모든 독들을 먹어보고 그 결과로 좋은 약을 찾아내자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왜냐면 몇번 하다보면 죽거나 영원히 회복불가능한 장애가 몸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번은 좋은 대통령을 또 한번은 나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하자. 그런데 나쁜 대통령의 피해가 너무 커서 좋은 대통령의 의미가 별로 없으면 어쩌는가? 단순한 농경사회나 수렵 사회에서는 나쁜 지도자가 그리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사람들은 거의 자립적으로 살고 세상은 천천히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간의 상호의존이 크고 빠른 현대 사회에서는 정부정책이 치명적이고 빠르게 비가역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하나의 나쁜 정책은 컴퓨터같은 복잡한 기계에 커피를 쏟는 것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원숭이가 아무렇게나 타자를 쳐서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만들 수는 없듯이 좋은 정책은 만들기 어렵고 반면에 나쁜 정책은 만들기 참 쉽다. 즉 독이 쉽사리 만들어 진다. 게다가 그 결과마저 너무 커서 사회의 체질을 바꿀 정도라면 이리저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발전해 간다는 자유주의적인 주장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내란을 일으킨 윤석렬을 보라. 그가 만든 문제는 끝이 없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신뢰다. 사람들이 이제는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군대도 사법부도 정치인도 대학도 기업도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끝없이 쏟아지는 판결속에서 사람들은 판사도 검사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 경찰은 믿을 수 있을까? 경찰도 내란에 동조한 세력이 아닌가? 김건희의 논문에 대한 판결도 내리지 못하는 대학들을 우리는 앞으로도 믿을 수 있을까?
신뢰의 파괴는 비가역적이다. 즉 한번 신뢰가 크게 파괴되면 다음부터 잘하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언제 또 헌법을 무시하는 판결이 나오거나 대학이 학문적으로 분명히 오류가 있는 논문을 판정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시장 논리, 법 논리, 학문적 논리가 한번 무너지면 그건 고속으로 달려야 할 자동차의 부품이 문제가 있는 경우와 같다. 그럴 때 차가 고속으로 달리다가 사고가 한번 나면 다 죽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회를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다.
윤석렬의 계엄이 이런 경우다. 내가 한국 사회를 믿고 내 전재산을 이 사회에 투자했는데 어느 날 계엄으로 그걸 휴지조각을 만들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이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만약 헌재가 이번 탄핵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국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도 그래서 실패를 해도 대통령을 계속 할 수 있다고 법이 인정해 주는 꼴이다. 불법적 계엄을 고도의 통치행위 운운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정말 우리가 신뢰할 수 있을까? 이런 소리하는 사람들은 코앞에 있는 자신의 작은 이익만 생각할 뿐 그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윤석렬의 반란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도 다음번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이명박을 겪어도 박근혜를 뽑고, 박근혜 탄핵을 겪고도 탄핵해야 마땅한 윤석렬을 뽑는가? 언론은 왜 이다지도 엉터리인가? 세상이 AI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나가려는 이때 우리는 전근대적인 봉건정치, 왕정정치와 공화국 정치도 구분 못해서 성장의 한계를 겪고 있다. 기술은 아주 소중하지만 사회적 발전에 있어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것은 사회적 합리성과 단합이다.
이걸 못해서 한국은 지금 너무 큰 비용을 들이고 있고 성장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윤석렬같은 대통령이 나와서 사회적 자원을 고갈시켜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사실 이번 윤석렬의 난도 끝나려면 멀었다. 우리가 그를 무사히 탄핵하고 재판해서 관련자를 처벌하는 일이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난다. 헌재가 탄핵을 인용한다고 해도 내란죄를 수사하고 그것에 가담한 사람을 일일이 처벌하는 일은 다음 정권이 끝나기 전에 끝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이 많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반란죄의 수괴인 윤석렬은 사형이 당연하지만 그 당연한 것도 일의 엄중함을 생각했을 때 재판이 순식간에 끝날리는 없고 그 와중에 너무나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시킬 것이다.
나는 결국 정보가 문제라고 믿는다. 즉 정보가 어떻게 생산되고 저장되고 배포되고 정리되는가가 집단 지능, 사회 지능을 결정한다. 그래서 언론이나 학교나 법원이 중요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이런 기관들이 모두 한계를 보이는 것도 있고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이런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즉 근대가 가지는 한계 자체도 존재하고 한국만의 역사가 만들어 낸 더 큰 한계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유튜브나 SNS가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한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유튜브 방송이 공중파 방송을 이기는 경우도 있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유튜브 방송같은 것은 너무 영세하다. 그건 마치 동네 사설 학원이 대학을 대체할거라고 믿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적 물적 자원이 훨씬 더 많이 투자되어서 사회적 상식을 지키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것이 대학이나 언론의 개혁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위키피디아나 AI같은 것이 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대중의 시선과 데이터가 지금과는 다르게 집대성되고 쉽게 배포되는 것이 가능해져야 사회가 좀 더 튼튼한 기반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인들이 극우 유튜브 방송을 보는 대신에 합리적인 AI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사회적 실패를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AI란 기술이전에 데이터의 집합이다. 그러니까 사회적 시선들을 균형있게 축적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AI의 응답이란 오늘날 우리가 사전을 찾아보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줄 것이다. 즉 AI를 통해서 상식과 일관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내가 기존의 제도에 대해 지나치게 절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솔직히 언론이니 사법이니 대학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 이상으로 그들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별로 없다. 세상이 지금보다 더 좋아진다면 그것은 정보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하기 때문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래야 지금의 민주주의가 가지는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옳다면 그런 발전이 있기 전에는 우리 사회는 성장의 한계를 보이면서 계속 위기에 빠져들고 자원을 낭비할 것이다. 우리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AI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걸 널리 보급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없이는 위기와 낭비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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