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고의 특징
우리는 다양하게 근대의 특징들을 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정치적 예술적 철학적 분야에서 각각 어떻게 근대가 시작되었는가를 논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서 민주주의제도의 발전이나 개인주의라던가 인간 중심적 예술의 시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한가지 요소가 근대로의 변화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매우 눈에 띄는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뉴턴의 고전역학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근대 정신의 핵심인 과학적 사고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는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과학연구의 한계를 넘어서 경제, 정치등 사람들의 일상생활속으로 퍼져갔다. 근대화의 정신적 핵심은 과학이다. 근대화된 나라에서는 과학자처럼 말하고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당연하게 보이게 된다. 나는 주로 과학을 통해 근대의 특징을 추출할 것이다.
물론 근대인의 사고에 과학적 사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사고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낭만주의 철학이나 생태주의 철학도 있다. 근대인이라고 해서 종교를 전혀 믿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사고 방식들도 과학적 사고와 모순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사회나 경제의 중심에는 과학적 사고가 있고 근대화이래 근대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제안도 이러한 틀을 완전히 넘어서는 대안적인 사회나 경제를 성공적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우리는 때로 근대의 틀이 답답해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도시의 직장을 그만두고 모아둔 돈으로 잠시 산에서 살다 오는 것을 지속가능한 문명적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근대 사회속에서 살자면 원하지 않아도 과학적 사고를 흡수해야하고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는 장기간 살 수 없다. 근대사회 안에서는 학교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적 규율에 따라서 사는 것 모두가 사람들에게 과학적 사고를 요구한다. 과학적 사고는 근대사회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영원한 진보라는 미래비전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뉴턴 역학이 보여주는 이 과학적 사고란 무엇인가? 뉴턴 역학은 다른 무엇보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다. 즉 그것은 과학적 설명을 수학적으로 구성해 내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만큼 분명하게 철학자와 과학자를 구분하는 특징이 없다. 본래 과학은 자연철학으로 불리며 철학과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뉴턴 역학이 나온 이래 형이상학과 개념적 명확성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철학자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과학자는 엄밀하게 측정된 양들간의 수학적 관계를 연구해서 새로운 자연법칙을 찾아내거나 그런 법칙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구성해 내는 사람들을 의미하게되었다. 뉴턴이 중력법칙과 운동법칙에 기반해서 케플러의 법칙들을 설명했듯이 말이다.
엄밀하게 측정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학적으로 구성된 과학적 설명은 예술작품이나 철학적 논의같은 인문학적 작품과는 다르다. 과학적 설명은 기본적으로 그 기반이 되는 자연법칙의 수정이 있지 않은 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수천년전 고대 그리스에서도 참이었고 지금 여기서도 참이듯이 그 주장의 진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이와는 달리 어떤 예술이나 철학적 주장은 언제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완전히 부정되지 않고 다른 예술과 철학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21세기 철학을 가진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공자의 철학을 잊어도 좋다고 말해지지는 않는다. 이는 과학의 배중률적 특징과는 다른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과학 이론이 있다면 적어도 둘 중의 하나는 틀린 것이다. 이 세상에 두 개의 옳지만 서로 다른 과학이 존재할 수는 없으며 옳다고 증명된 과학이론이 있으면 그와 예측이 다른 이론들은 결국은 부정되어 철저히 잊혀지게 된다. 우리는 역사적 관심에서가 아니면 천년전이나 이천년전의 과학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 심지어 19세기의 화학에도 관심이 없다.
과학 지식의 이러한 특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감정을 주지만 이것이야 말로 근대로의 변화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든 특징이다. 이 특징은 한가지 결과를 낳는다. 한번 발명된 것은 두 번 발명될 필요가 없고 한 번 증명된 것은 두 번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대에 만들어진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더 복잡한 지식을 빠르게 구성할 수 있다. 뉴턴 과학이래 지식이 누적되는 속력은 전근대 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공장을 통한 상품의 대량생산이나 표준화가 도입된 이후의 산업발전도 결국 뉴턴 과학의 수학적 특징을 반영한 정신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뉴턴이 살았던 계몽주의시대가 산업혁명 시대보다 앞서 존재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적 결론을 맹신하면서 그 위에 철학적 논리를 쌓아올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은 사소한 문구 해석의 변화로도 무너지는 탑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분명한 수학적 원리들이다. 구구단을 써서 더 복잡한 계산을 할 때마다 구구단이 정말 맞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엄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수학적 법칙은 일상어로 말해지는 철학적 결론과는 달리 그 의미가 명확하고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므로 지식의 탑이 쌓여지는 속도가 전혀 다르다.
뉴턴 역학의 발표이래 분명해 진 것은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건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복잡한 공식 하나를 외우면 긴 계산을 건너 뛰고 결론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편리한 공식들을 증명한다. 즉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과학적 사고는 단순히 과학이론을 만드는 일을 넘어서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사용되는 근대적 사고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사회를 우리가 건설해야 할 집이나 우리가 분석하고 개선하기도 하는 기계처럼 보게 되었다. 사회는 이제 더이상 원래 그렇게 주어진 변할 수 없는 것, 신이 만들어 낸 가능한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회계약론이 나왔고 그 시대의 마지막에 프랑스는 혁명으로 사회를 재설계하려고 했으며 유럽의 여러나라에서는 통계적 자료를 통해 사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벽돌을 쌓아서 집을 짓듯이 필요한 시스템을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그 시스템은 편리한 공식처럼 인간의 문제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다 농사를 짓고, 하수구를 청소하고, 신발을 만드는게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채소를 주고 하수구 청소 서비스를 제공하며 신발도 제공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인간을 위해 일할 것이고, 우리가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 수록 인간은 더 번영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우리가 더 좋은 시스템을 건설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법의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근대화는 결국 엄격한 법치주의를 강조하게 된다.
과학은 인간을 자연적 제약과 사회적 관행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과학기술의 힘을 통해 강력해진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관습적 억압에도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자판기 내부의 구조를 몰라도 누구든 제대로 버튼을 누르면 상품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정확한 기계적인 시스템이 된 사회는 우리가 그 구조를 다 몰라도 제대로 된 스위치를 누르면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인종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힘이다 그리고 지식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따라서 법도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우리가 만들 미래의 시스템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 평등하게 취급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지식들을 찾아내고 그걸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기계인 위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이 발전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근대 사회가 가진 미래비전의 핵심이다. 그것은 끝없이 강력하게 성장하는 시스템에 대한 꿈, 무한한 진보에 대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설명할 인간관과 함께 이러한 미래 비전은 자연스레 대중 교육이 가르칠 주요 메세지가 된다.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미래비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제시없이는 교육은 본질적으로 변화할 수 없고 실제로 교육은 근대화이래 이제까지 그 핵심이 변하지 않았다.
근대인의 영광과 한계
근대사회에서 개인은 왜 중요한가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고 싶은 질문이다. 먼저 개인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과학적 사고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인간이 시스템을 만든다는 부분이다. 종종 그 객관적 성질때문에 잊혀지지만 과학적 방법은 인간을 그 핵심으로 한다. 왜냐면 자연을 관찰해서 데이터를 얻고 그 속에서 법칙을 찾아내며 그 법칙을 기반으로 과학적 설명을 구성해 내는 것은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없이 과학이론이 만들어 질 수는 없다. 누군가가 가설을 제출하기 때문에 그 가설을 검증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에게서 온다. 과학적 가설은 몇천년전에 기록된 성스러운 책에서 찾을 수 있는게 아니다. 인간이 상상력을 가졌고, 답이 될 수 있는 가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졌기에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중심적이다. 인간은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 즉 이성을 가졌다. 그것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건설하고 구성할 수 없다. 더 좋은 사회를 위한 더 좋은 설계도도, 어떻게 하면 체스게임을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한 더 좋은 답도, 어떤 수학공식을 증명하는 방법도 모두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다. 적어도 AI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그랬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다. 이성이 인간을 영광되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의 미래비전은 설득력이 약해졌다. 우리는 발전의 한계에 이른 것을 느끼며 이것은 동시에 인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적 사고가 나아가 그것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사고가 구성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어떤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하게 되면 그 거대한 시스템을 기초부터 다시 구성하는 일은 점점 더 비현실적이 된다. 그것은 너무나 긴 노력끝에 쌓아올린 탑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은 과학은 점점 더 높은 탑을 쌓는 것처럼 선형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으면서 비선형적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온갖 과학적 설명들을 만들어 낸 후에 과학적으로 설명을 구성할 수 없는 현상이 생겨도 과학자들은 쉽사리 그들의 과학을 기초부터 수정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정상과학이라고 부르는 이미 쌓아 올려져 있는 과학지식의 시스템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엄밀한 데이터에 기초하며 수 많은 사람들이 검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혁신적이다. 기존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데이터가 증가함에 따라 결국 어느 순간 정상과학이라고 불리던 기존의 과학은 포기되고 새로운 자연법칙에 기초한 과학이 등장해서 옛 과학을 대체한다. 고전역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대체하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을 대체했듯이 말이다.
문제는 과학적 사고는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 전개되었고 그런 곳에 존재하는 시스템은 과학보다 바꾸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제 시스템을 점점 더 복잡하고 거대하게 쌓아올렸을 때 그 경제시스템을 우리는 언제 그 기초부터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설사 그 경제시스템이 주기적으로 파산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바꾸기 어렵다. 변화는 표면적일 것이다. 왜냐면 너무나 많은 제도를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시스템 안에서 교육받고 직업과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뿌리부터 바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민주적으로 지지받아서 쉽게 일어날 일이 아니다. 인간은 방정식이 아니다. 뉴턴 역학을 양자역학으로 바꾸는 것은 종이위의 방정식이 바뀌는 것이지만 거대하게 구성된 자본주의 시스템 같은 것을 원천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어렵다. 공산주의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처음의 의도가 좋았건 그렇지 않건 제대로 되기 힘들다. 혁명은 너무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한다. 따라서 근대사회는 기본적으로 점점 보수적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보수성은 문제를 일으킨다. 전근대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성장한 것이 근대의 질서지만 이제 인간은 거꾸로 자기가 만든 근대적 시스템에 억압되게 된다. 비록 처음에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 번영하게 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떤 시스템이건 시스템은 더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혹은 사람들의 비판에 답하기 위해서 차차 더 커지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시스템은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사람들을 억압하게 되어도 개혁하기가 어렵다. 사회전체는 커녕 물류시스템이나 대학입시시스템 혹은 사법시스템이나 의료시스템을 개혁하는 일만해도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때문에 고통당하면서도 그걸 고치지 못한다.
지식의 시스템이건 사회적 시스템이건 그 시스템이 거대화됨에 따라 이제 위대하다던 인간은 점점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식이 너무 많아서 인간이 그걸 다 검토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사회적 시스템이 너무 거대해져서 인간이 그걸 개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지식과 사회적 복잡성의 폭발적 증가는 점점 더 많은 댓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제 근대의 비전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시스템이 인간의 역량을 너무 넘어갈 정도로 크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한때는 인간을 해방시킨 시스템이 이제는 인간을 억압한다.
예를 들어 지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전문화다. 이제 누구도 모든 걸 공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야를 나눠서 그 분야만 공부한다. 그래도 공부할 것은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적인 질문이 생기면 그 전문가들에게 의존한다. 항공기를 만드는 법에서 케익을 만드는 일까지 현대 사회는 전문가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렇게 전문화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그리고 그렇게 전문화된 지식은 어떻게 다시 합칠 수 있을까? 물리학자와 화가가 만나서 국가의 예산 배분을 논한다면 서로의 분야를 모르는 두 사람은 예산을 어떻게 나눠야 할까? 댐을 건설하려면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공학적 측면등 여러 전문 평가가 필요한데 각각의 전문가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의견들을 합칠까? 게다가 사회가 이렇게 전문화되었는데 정치인을 뽑는 투표는 어떻게 할까? 정치인들은 전문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리학자나 화가를 일반인 투표로 뽑지는 않는다. 핵무기를 만드는 법을 투표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정치인은 일반인 투표로 뽑을 수 있을까? 어떤 정책이 옳은가를 알아내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이제 세상은 마치 인간이 기억하고 조작하기에는 너무 많은 버튼들을 가진 기계처럼 변했다. 인간을 위한 법인데 법이 너무 복잡하다. 인간을 위한 교육과 의료시스템인데 그것도 너무 복잡하다.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은 매우 어려워 졌다.
시스템의 억압이 만들어 내는 결과 중 하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좁은 시야를 가지도록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어차피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토록이나 자유를 강조하는 근대사회지만 이렇게 말고 다르게 살아보자는 대안적 삶에 대한 의지는 시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억압당한다. 누군가 특정인이 억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개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로 사람들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것과는 다른 미래가 올 희망은 아주 작게 느껴지게 된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복잡한 시스템을 가질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더 행복한 시대일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마치 계속 개혁되어지는 대학입시 제도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졌지만 그것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던 40년전보다 더 좋은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근대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어떤 인간인가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과학적 사고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 심지어 어느 정도 수학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과학적 문제해결법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론이란 이 세계에 대한 데이터를 통해 세계와 우리를 이어주는 소통의 미디어로도 볼 수 있다. 일단 공식과 기계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세부사항을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해도 그걸 쓸 수 있다. 마치 복잡한 구조를 가진 자동차를 직접 만들 수 없어도 그걸 사용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나의 기계나 수학공식은 많은 양의 정보가 정확하고 단단하게 누적되어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굴삭기처럼 인간의 손끝이나 머리안에서 세상을 바꾸고 조작할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교육이 필요하다. 근대 사회속의 인간은 전근대 사회속의 인간과는 다르고 선사 시대의 인간과는 더욱 다르다. 선사시대의 인간들은 문자없이 아예 구술 문화속에서 소통했다.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문맹이어서는 곤란하다. 신문과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수학교육, 과학교육을 어느 정도 받아야 한다. 근대 사회란 이런 개인들이 이런 미디어와 지식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사회다. 그래서 근대 사회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전근대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고 과학적 사고의 발전은 과학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소통의 방식이 바뀌자 사람들은 이제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이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자유주의라는 사상도 변화를 설득하고 해명할 수 있는 이런 기초가 있었기에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소통의 주체와 방식이 바뀌는 것이 세상을 바꾼다.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근대의 이상이 한계를 보인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람과 시스템 사이의 소통의 실패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왜 우리가 새로운 AI 시대에 새로운 교육없이 도달할 수 없는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전근대에 살았던 사람과 근대인이 다르기때문에 근대인은 근대문명을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해서 근대인이 계속 근대인으로 남아있는 한 AI 시대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새로운 소통의 미디어를 가진 인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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