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I 학교, AI 환경

다시 철학의 시대가 올까?

by 격암(강국진) 2025. 1. 19.

제목 그대로 질문해 보자. 다시 철학의 시대가 올까? 우리는 철학은 물론 인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며 대학의 인문학과가 폐과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누군가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AI 시대처럼 새로운 시대가 오면 인문학을 비롯한 철학의 중요성이 다시 커질 거라는 주장도 그럴듯하다. 그러니 다시 철학의 시대가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같다. 

 

나는 다시 철학의 시대가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말에는 큰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오늘은 이걸 생각해 보자. 먼저 이걸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한때 철학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박사를 말하는 ph. D는 Doctor of Phylosophy이며 Doctor는 본래 지도자이고 Phylosophy는 철학이다. 물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나도 이렇게 말하자면 철학의 지도자라는 학위를 가진 셈이다. 이는 본래 우리가 철학으로 번역하는 Phylosophy가 지식내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모든 지식의 추구를 아우르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걸 바탕으로 관점을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근대이전 그러니까 아직 과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아서 뉴턴은 당연히 철학자로 여겨졌던 시대에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해보자. 미래는 철학의 시대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철학이 죽었다고 자주 말하는 21세기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틀린 것으로 들릴 것이다. 지금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그 21세기 사람은 앞에서 말한 전근대의 사람이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과거의 사람이 21세기에 와서 무슨 말을 할까? 과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이 생각하기에 지금이야 말로 철학이 지극히 발달된 시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과학자들은 다 철학자로 보일 것이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과학자란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과거의 사람에게는 21세기야 말로 철학의 시대로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우리가 계몽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뉴턴이 살던 시대의 전후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철학의 영웅들은 다수가 그 시대를 살거나 그 시대에 일어난 사고의 후계자나 비판자들이다. 테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듀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 말이다. 누군가가 데카르트보다 이전에 살았고 고대 그리스 플라톤 시대 이후에 살았던 철학자들을 물으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이름은 상당히 작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면서 서양철학사를 생각해 보면 마치 고대 그리스에 철학이 번성했다가 철학이 죽었고 그리고 나서 계몽주의 시대이후에 철학이 막 번성했던 것같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철학이 죽었고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근대화가 진행되고 인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은 문자의 번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구술문화가 문자 문화로 전환되면서 사고의 큰 변화가 있었고 말하는 법인 수사학을 통해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던 소피스트의 시대가 간 것이다. 그리고 문자문화의 철학자들이 보다 보편적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사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마치 종이위에 써진 지식처럼.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쓴 월터 옹은 이때 철학이 만들어 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이 철학자들이 해야 했던 중요한 과업은 구술문화 시대에 만들어진 사고와 전통을 문자 문화 시대와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즉 달라진 사회적 환경에 그때까지 발달했던 인간의 정신을 적응 시키고 연결시키는 것이 새로운 사고를 접한 철학자들이 해야 하는 과업이었다. 

 

같은 일은 계몽주의 시대에도 일어난다. 중세 시대까지 내려왔던 신비주의적인 자연에 대한 설명을 타파하려고 노력하던 그 시대에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생겨난다. 그걸 확고하게 만든 것은 뉴턴의 고전역학이었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가 분명해 질수록 철학적 과업이라는 게 다시 절박해진다. 새로운 과학적 시각으로 보면 진리는 어떻게 되고 신앙심은 어떻게 되며 인간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기계이고 물질인가? 데카트르의 심신이원론 같은 것은 세상을 신앙심이나 윤리의 영역과 물질과 과학의 영역으로 나눈다. 따라서 과학지식의 무서운 발전이 인간을 윤리적으로 타락시키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게 하기 쉽다. 뉴턴이후 스스로가 과학자였던 칸트는 지식에 대한 이론인 인식론을 철학의 중심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계몽시대 이래 뉴턴 이래의 철학자의 과업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의 과업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낡은 정신과 새로운 환경을 연결하고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쯤 해놓고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과 이제까지 우리가 했던 말을 조합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시 철학의 시대가 올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AI는 우리가 아는 과학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이 발달한 사회가 과학적 사고를 요구하듯이 AI가 발달한 사회는 AI 시대에 걸맞는 사고를 요구한다. 이 새 시대를 위한 사고의 이름은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걸 확률적 사고라고 부르지만 이름이 뭔가는 중요하지 않다. 원한다면 우리는 그걸 개소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AI가 과학과 다르듯 그것은 과학적 사고와 다르다는 것이다. 

 

달라진 기술 그리고 달라진 사고는 다시 새로운 시대적 과업을 예고한다. 우리는 이것은 문자 문화가 발달하던 초기나 과학 문화가 발달하던 초기와 다를 바가 없으므로 다시 한번 새로운 철학의 시대가 오리라고 예측하게 된다. 다만 우리는 이름들에 속아서는 안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전에는 지금의 과학이 철학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지금의 시대가 철학의 시대라고 말해도 옳고 과학의 시대라고 말해도 옳다.

 

철학의 시대가 온다는 뜻이 반드시 우리가 다시 낡은 철학을 더 배워야 한다는 뜻은 꼭 아니다. 예를 들어 설사 철학과 교수라고 해도 AI를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의 철학에 대해 한마디도 옳은 말을 못할 수도 있다. 앞으로의 시대를 보면서 말하는 우리는 마치 근대를 예언하고 있는 전근대의 인간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의 시대가 철학의 시대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철학이 우리가 대학의 철학과에 가면 배울 것같은 뭔가와 비슷할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철학은 내가 확률적 사고라고 이름붙인 새 시대를 위한 사고를 반영하는 새로운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그게 뭔지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걸 전혀 알아듣지 못하거나 너무 시시하고 당연한 것으로만 여길 수 있다. 여기에 확률적 사고가 뭔지를 설명할 공간은 되지 않으므로 그 대신 우리가 익숙한 과학적 사고에 대한 전근대인의 생각을 상상하면서 왜 그런지를 설명하고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과학적 사고가 뭐냐고 하면 귀납이니 검증이니 하는 어려운 단어들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과학적 사고의 핵심에 가깝고 앞에서 말한 단어들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엄밀성, 정확성이다. 즉 정확하게 측정하고 관찰한 정보에 기초해서 사고한다는 것이 과학적 사고의 핵심이다. 이게 없으면 귀납이니 검증이니 하는 것은 추상적 말들의 혼돈속에서 사라진다. 사실 사람이 일상에서 쓰는 말들은 대개 추상적이고 불분명해서 과학적으로 무의미하다. 우리는 지능이나 인간의 정의도 없다. 심지어 생명의 정의도 없다. 뜨겁다, 맛있다, 훌룡하다같은 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과학적 방법론이 일상생활까지 번진 과학적 사고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는 굉장히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들과 연결되어져 있다. 예를 들어 약속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다. 물건을 팔 때 1근이라고 하면 정확히 600g을 파는 것이다. 땅을 거래할 때는 정확히 1평 1평 따져서 거래하는 것이다. 그래야 거대한 기계가 된 근대 사회는 그 힘을 발휘해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 약속은 아침 쯤에 보자고 하고, 1 근이란 그냥 잡히는 대로 주는 것이고, 땅을 거래 할 때는 이 근처의 땅은 내거 라는 식이면 근대사회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같은 것을 전근대인에게 설명한다면 전근대인은 그게 매우 시시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나도 그걸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확하고 엄밀할 수록 좋다는 걸 누가 몰라. 우리도 그걸 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그런 과학적 사고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도시들을 직접 본적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은 80억이나 되는 인구가 사는 지구를 상상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으로 얼마나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이 책으로 기록되고 누적될 것인지 상상도 하지못하며 더구나 손바닥안에 들어가는 기계가 그 많다는 지구상의 모든 책을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도 법이 중요한 거 알아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인간이 가끔 법을 어길 수도 있지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해?라고 생각한다.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소달구지 밖에 모르는 사람은 제트기에서 부품 하나 빠지면 어떻게 되는 지, 그냥 눌러본 핵폭탄의 스위치가 어떤 정도의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지를 모른다. 

 

이같은 것은 확률적 사고도 마찬가지다. AI 기술의 특징들로부터 추출해 낼 수 있는 그것은 근대인에게 대개 사소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뭐야 그런 거라면 나도 이미 알고 있어라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상상력을 가지고 지금 발달하는 AI 기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대해 듣게 되면 사실 기절할 것처럼 놀랄지도 모른다. 그 잠재력이 인간을 존재위기로 빠지게 한다고도 느낄 지 모른다. 그 기절할 것같은 충격은 다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철학의 시대는 다시 온다. 이 시대는 다시 철학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계몽의 시대가 전근대인을 근대인으로 만들었듯이 우리는 근대인을 새로운 철학으로 AI 시대의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사람은 마치 맨몸으로 마그마에 뛰어든 사람처럼 위기에 처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