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이럴까? 이에 대해서 답하는 한가지 방법은 이 세상을 주도하는 미디어를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디어란 사람들이 각자의 혹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보를 나누고 협력을 하게 해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렇게 미디어를 말하면 사실 상당히 많은 것들이 미디어라는 말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예를 들어 언어는 물론 사회도 하나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어떤 주어진 사회에 모여살기 때문에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이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형식을 가진 미디어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미디어는 흥망성쇠를 겪는다는 것이다. 이는 일찌기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서 조지프 테인터가 말한 바 있다. 다만 그는 문명에 대해서 말했지만 나는 이것이 일반적으로 모든 미디어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명의 붕괴이건 미디어의 붕괴이건 그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나의 미디어는 일단 그것이 출현했을 때 희망차고 빠르게 성장하는 작은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대안적 공동체인 이유는 이미 세상을 지배하는 주류적 미디어가 존재하고 그 세상에서 잘 살고 있는 기득권은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미디어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던 2000년대 초반이나 1990년대에는 사이버 공간에 작고 행복하며 진보적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그때도 인터넷이 무균의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누구나 인터넷을 쓰지도 않았고 주류 기득권이 인터넷에 관심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문 방송을 장악한 사람들에게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모여서 정보를 나누고 새시대에 대한 희망에 차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거나 기괴한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사이버공간은 청정하고 좋은 컨텐츠가 무료로 많이 넘쳐나는 좋은 공간이 된 것이다. 그것은 훨씬 더 엉성하지만 바깥세상과는 분명히 다르고 자유로우며 그래서 대안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점이 알려지면 새로운 미디어는 급격히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하면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제는 커진 공동체를 이익을 추구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미디어가 혼란스러워지면 점차로 그 미디어의 매력은 떨어지고 성장의 한계가 오게 된다. 조지프 테인터의 문명의 붕괴란 이렇게 성장의 한계가 온 미디어가 극단에 도달해서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패턴은 생각해 보면 아주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같은 미디어도 그랬다. 처음 등장할 때는 소수의 사람들이 참여 했고 그것은 나름 새로운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었으며 좋은 정보가 많은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섭게 성장하는데 성장이 어느 이상 이뤄지고 나면 이젠 번거러운 쓰레기 정보가 넘쳐나는 곳이 된다.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그 미디어를 무섭게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엄청난 힘이 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미디어들은 아직 붕괴하여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처음에 희망에 넘치고 좋았던 시절과는 이미 거리가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또 다른 예는 TV다. 미국에서 TV가 보편화된 것은 1950년대였다. 그리고 1960년에는 젊고 잘생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960년대의 미국 문화는 광적인 희망에 가득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TV로 인해서 생긴 희망의 시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대의 문화는 물론 여러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만 미디어는 정보들이 종합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낡은 미디어는 새로운 종합을 불가능하게 하고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종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디오나 TV 이전에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문자로 소통했다. 그래서 세상을 알아가는 일은 훨씬 덜 직관적이고 많은 교육이 필요했다. 하지만 라디오 특히 TV가 보편화되자 이제는 어린 아이들이나 아주 무식한 사람들도 세상을 실감나게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tv는 정보를 민주화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을 뽑을 때 그 사람이 누군지 누구나 실제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정보 폭증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던 시스템을 집어던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 이미 영상 매체에 익숙한 우리는 이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평생 TV라는 것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TV의 대중화는 마치 봉사가 눈을 뜬 것같았을 것이다.
TV는 물론 처음부터 자본과 광고주들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어떤 미디아이건 새로운 미디아는 참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대중에게 독단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 아무도 TV를 사지 않고 보지 않으면 초기 투자가들의 투자는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TV도 처음에는 대중에게 봉사하고 열려있는 미디어일 수 밖에 없었다. 즉 보다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대중에게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TV 미디어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그리고 그에 따라 높아진 희망은 점차로 절망으로 변한다. TV는 결국 주류의 매체가 되었고 세상을 해방시키지 못했다. 이제 그 정보는 기득권에 의해서 오염된다. 즉 통제된다. 공평히 말하자면 TV는 세상을 바꿀만큼 바꿨지만 더 바꾸기에는 더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매체가 된 것이다. 이제 TV는 그 미디어를 장악한 자본이나 광고주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대중을 외면하며 더이상 진보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고 그것이 새로운 대안적이고 진보적인 공동체를 키우고 잠시잠깐 세상을 희망으로 채우는 일은 세상에서 자꾸 반복된다. 미디어의 힘과 영향력은 강대하므로 우리는 그때는 세상이 왜 그랬고 지금은 왜 이런가 하는 일을 미디어의 유행과 상태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이 뭔가에 시끄러운 이유는 어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해서 힘을 얻었거나 그것이 비주류 문화에서 주류문화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완전히 주류 문화의 그것이 되면 그것은 힘을 잃고 길들여진다. 이제 사람들은 거기에 흥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 그때의 혹은 지금의 세상의 미디어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맥루한은 이것을 뜨거운 미디어, 차가운 미디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사람들은 요즘 AI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이유는 사실 AI도 하나의 미디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보편화된 AI라고 할 수 있는 네비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교통 시스템, 지리 정보 시스템과 사용자를 소통하게 해주는 기계다. 네비가 보편화되는 것에는 실시간 교통정보가 네비에 반영되기 시작한 사건이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렇게 되고 나자 아무리 길을 잘 아는 사람도 네비보다 자신이 길을 잘 안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교통상황과의 소통을 네비보다 인간이 더 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비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길을 찾는 것을 보편화 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AI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AI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은 이와 같이 AI가 미디어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분야가 아주 많고 앞으로도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와 이 점을 결합하면 우리는 다음과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AI 역시 희망의 진보적 공동체를 곧 만들게 될 것이다.
일단 이런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AI의 대중화는 매우 빨라질 것이다. 먼저 AI로 소통하는 세상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안적인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으면 그 매력이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AI는 TV나 SNS가 세상을 바꾼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 AI는 이제까지의 어떤 미디어보다도 더 광범위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과 견줄만한 것은 문자나 구술언어 정도가 있을 뿐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그냥 출현하지 않는다. 기술이 중요한 문제지만 기술만이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미디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대안적 문화를 찾는 것에서 새로운 미디어가 대중화되는 것이다. 한국은 인터넷의 보급이 매우 빨랐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한국에서 기존의 미디어 그러니까 책과 신문 그리고 잡지같은 출판이라던가 라디오, TV같은 전파 매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이 기성 미디어를 장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소통과 개선을 방해할 때 새로운 삶을 원하는 진보적 대중은 새로운 미디어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새로운 미디어 속에서 비로소 억압되어 있던 가능성이 실현 가능해 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사이버 공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가끔 만난 적이 있다. 인터넷 초기의 해방공간을 경험한 몇몇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이버 공간에서 갈 곳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같은 사이버 공간이지만 그것은 어느새 억압되는 곳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느낌이다. 마치 주식시장에서 크게 성장하는 주식에 초기에 투자에 참여했던 사람이 느끼는 착각이랄까. 테슬라같이 크게 성장한 회사에 초기에 투자한 사람은 주식이 매달 쑥쑥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장의 단계가 지나고 나면 그런 경험은 이제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터넷의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이 영향력있는 글을 쓴다던가 운영진이 된다던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작고 희망찬 공동체가 쑥쑥 크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단계가 지나고 나면 그런 경험은 이제 찾기 어렵다. 이제 기존의 미디어는 초기 성장의 시대를 지났기 때문이다. 아마 아직은 제대로 출현하지 않은 AI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 그런 경험을 찾을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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