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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짧은 역사와 미래

by 격암(강국진) 2025. 1. 28.

세계의 경제 역사를 요약하는 한가지 방식은 그것을 생산과 소비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세부사항이 달라짐에 따라 그걸 다루는 방식인 경제학의 입장도 달라져 왔다. 우리는 경제학의 역사를 전근대- 산업혁명 시대 -제국주의 - 복지국가의 시대로 나누고 우리가 지금 어디로 달려가는가를 고민할 수 있다. 

 

먼저 전근대의 농업 기반 사회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때를 언제나 생산이 부족했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의 생산은 주로 농산물이었고 전쟁이나 가뭄, 질병등으로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고는 했기 때문에 과잉생산이라는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때는 인구를 늘리고 농산물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만이 유일한 경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이라는게 이때 있었다면 경제학은 그냥 생산을 어떻게 늘리고 인구를 늘릴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답하면 되었다. 그 답은 소나 닭을 치는 법이나 농사 짓는 법을 개량하는 것이 아니면 영토와 인구를 늘릴 방법을 고민하는 것일 것이다.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말해지는 애덤 스미스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공장생산이 늘어나던 시기에 국부론을 썼다. 그리고 이때 과잉생산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경제학은 과잉생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스피넘랜드라는 빈민구호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빈민이란 사실 아주 소수의 귀족 계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스피넘랜드는 마치 자식들을 공평하게 먹이려는 부모같은 입장의 법으로 모든 백성들이 얼마나 노동하고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같은 대우를 하는 법이었다. 마치 집안에 머슴들이 있고 그걸 부리는 주인이 있으면 머슴들에게 최소한 밥은 주는 식이랄까. 

 

애덤 스미스는 이에 대해서 생산을 늘리려면 경쟁을 강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쟁을 통해 증가되어지는 생산물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효율적으로 소비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제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구조를 연구하고 그를 통해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본격적인 경제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애담 스미스가 경쟁을 말한 것은 잔혹한 시각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능력있고 근면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었다. 보상이 없으니 더 많이 노동할 동기도 없는 것이 안타까웠달까.  

 

그런데 기술이 더 발달하자 문제가 생겼다. 잉여생산물이 더 늘어났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주장은 맞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는 말한다. 언제나 인간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개입중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생산이 있을 때 그 생산물을 처리해야하는 소비자를 찾는 것이다. 생산을 소비를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면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이 말은 생산자들이 무한 경쟁을 하고 어떤 생산자들이 망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비되지 않는 생산물은 가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산자란 귀족이고 자본가고 기득권자들이다. 이들의 무한 경쟁을 기본적으로 이들이 다스리는 국가가 좋아할 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소비자를 찾는 제국주의의 시대로 접어든다. 생산과 소비의 균형 문제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에서 저절로 해결되기는 커녕 가장 인위적인 방법 즉 가장 잘 보이는 손인 군대의 무력에 의해서 소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해결된 것이다. 서구 열강은 무장한 배를 여기저기 보내서 내 생산품을 소비하라고 다른 나라를 억압한다. 그게 강제 통상 조약이다. 식민지를 만들면 그 식민지의 인구는 본국의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생산이 쉬워졌는데 그걸 소비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생산자인 자본가는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고 산업혁명이 더 많은 나라에서 성숙해질수록 이 방법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 진다. 잉여 생산물은 더욱 늘어났다. 그런데 식민지 개척은 오히려 한계에 도달한다. 생산능력은 계속 증가하기 마련이다. 기술이 더 좋아지면 극적으로 증가한다. 그런데 식민지가 없으면 과잉생산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먼저 근대화된 나라들은 식민지를 두고 경쟁을 벌이게 되고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이제 이런 식으로는 계속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이런 모순이 폭발한 것이 유럽에서의 세계 1차대전이다. 먼저 식민지를 점령한 세력이 다른 세력의 팽창을 억압하니까 모순은 누적되고 결국은 그런 억압은 한꺼번에 전쟁으로 폭발한다. 잔혹한 견해이기는 하지만 이는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한가지 방법이기도 했다. 거대한 전쟁은 생산기반을 파괴해서 생산을 줄인다. 게다가 파괴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소비해야 할 곳을 늘린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파괴가 일어나고 나면 한동안 과잉생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발달한 기술덕분에 생산능력은 계속 늘어나고 같은 문제가 금방 돌아온다. 그러니 이건 절대 해결책이랄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것이 국내 소비의 증가 혹은 복지 국가다. 즉 식민지로 소비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이제 한계도 있고 문제도 있으니 포기하고 국내 소비를 늘리자는 것이다. 포디즘은 포드 자동차를 만든 포드의 생각이다. 노동자가 높은 임금을 받아야 그들이 포드 자동차를 살 수 있다고 포드는 말했다. 케인즈 주의는 뉴딜정책처럼 정부가 지출을 크게 늘려서 사람들이 돈을 가지게 하면 소비가 늘고 이는 생산을 늘리는 선순환을 만든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근대화 이래 나타난 핵심적 사회 문제는 기술발달로 나타난 과잉생산을 소비를 늘려서 해소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걸 식민지 개발로 해결했지만 그 다음에는 노동자의 임금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복지국가의 건설로 늘리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금방 한계에 도달할 것이 뻔한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당장 지적할 수 있는 문제가 3가지나 있다. 

 

첫째로 기술은 끝없이 증가하고 생산능력은 지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는 선형적으로 증가한다. 결국 어떤 방법을 쓰건 소비를 늘리는 것은 한계가 뻔한 방법이다. 둘째로 이 늘어난 잉여생산의 처리 방법은 인간 사회만 주목하지 자연환경은 무시한다. 생산할수 있으니까 한계까지 생산하고 그걸 다 써버리려는 태도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마치 폭식증에 걸린 미친 사람같은 태도다. 덕분에 우리는 이제 환경문제, 자원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소비가 미덕인 것도 한계가 있다. 기술로 인해 무한히 증가하는 잉여생산을 소비시키려고 하다보면 우리는 이제 소비에 중독된 사람들이 정말 행복하기는 한가하는 질문을 잊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뭐하러 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인가? 부자들이나 자본가들이 더 부자가 되도록 일반 노동자들은 소비중독에 빠져서 잉여생산물을 소비하는 기계가 되는 것인가? 그게 인간이 태어난 이유인가? 

 

소비를 늘리려고 돈을 정부가 뿌리면 정부는 균형적인 지출을 할 수 없다. 즉 세금이 걷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게 되고 빚을 진다. 이것이 계속되면 정부는 천문학적인 빚을 지게 된다. 그래서 정부의 균형적인 지출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잉여생산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도 옳지 않다. 이미 20세기 초에 있었던 뉴딜 정책이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이 과잉 소비였고 그걸 대체할 대안이 제출 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정부가 균형적인 소비를 하면 잉여생산의 문제로 경제가 죽기 시작한다. 그걸 누가 책임지는가? 다시 식민지라도 건설할 셈인가? 정부지출이 과도하면 안된다고 도덕군자처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정말 대책은 있으면서 하는 소리인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오래되면 역시 모순이 누적된다. 일본같은 경우는 GDP의 260%나 되는 빚이있다. 그래서 금리가 낮다. 금리가 올라가면 정부의 빚에 대한 이자로 정부 수입이 모두 날아갈 판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문제는 이미 심각하고 점점 더 심각해 진다. 어느 나라나 심각한 정부의 빚이 있다. 상황이 심각해 지면 돈의 의미가 점점 의심받을 것이다. 결국 정부가 그냥 돈을 마구 뿌리고 있으며 정부정책에 따라 생산물을 그냥 나눠주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점점 더 명백해 질 것이다. 그런거라면 왜 부자와 가난뱅이가 있어야 하나? 집도 자동차도 티비도 그냥 나눠주면 안되나?

 

문제는 최근에 더욱 심각해 진다. 기술은 더욱 극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이야기다. 그래서 AI의 시대가 오니까 아예 기본소득제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생산능력이 거의 무한대로 늘어난다는데 그럼 소비는 누가하나? 그러니 아예 돈을 그냥 뿌리자는 기본소득제를 옹호하는 주장이 나온다. 아니면 잉여생산물의 문제가 크게 발생할 것이다. 기업들이 무더기로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환경문제도 날로 심각해 지고 있다. 인간도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불분명하다.  우리는 거대한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고 이제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인 것일까? 이제는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돌아보면 이 문제는 소통의 문제다. 인류는 마치 입과 위장이 소통이 안되는 사람같다. 위장은 들어오는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서 죽겠다고 하는데 입은 보이는 음식마다 집어넣는다. 위장으로부터의 연락을 받지 못하는 것같다. 애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룬다는 주장은 처음에 그 주장이 나올 때도 말이 안됐지만 21세기 현재에도 말이 안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더 소비할 주체를 찾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른 소통으로 우리가 경제학을 처음 만들었을 때 꿈꾸던 그런 상태로 나가야 해결될 것이다. 자연파괴도 결국 소통의 문제가 만드는 것이다. 숲의 나무로 책상이나 의자를 만들면 우리는 그것을 생산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숲의 나무가 없어졌을 때 우리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해 질 수 있다. 의자 몇개 만들고 산사태가 나거나 공기의 질이 나빠지거나 생태계를 파괴하면 손해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제나 숲의 나무를 의자로 만드는 것이 생산적인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의 나무를 의자로 만드는 눈먼 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눈 먼 손은 소통이 느리거나 소통을 못하는 것이다. 

 

근대화의 시작이래 인간은 거대한 기계를 만들어 왔다. 인간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다. 문제는 이 기계는 둔하다는 것이다. 마치 소통하지 않는 입과 위장처럼 각자가 각자의 일을 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보면 손해 보는 일을 한다. 서로 서로 문제를 만든다. 우리는 기계가 된 사회를 하나의 뇌나 생명체처럼 살아있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더 많은 감각 신호를 오고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무식한 생산 증가를 소비 증가로 막아보겠다는 정책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소비하겠다는 신호가 있어야 생산도 이뤄지는 세상을 만들면 과잉생산의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된 AI 사회를 위한 비전이다. 사람의 몸이 뇌를 포함한 복잡한 신경계를 요구하는 것처럼 미래 사회는 빠르게 복잡한 정보를 처리할 기본 인프라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해내는 것이 AI다. AI가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해서 정말로 소비와 생산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기존 사회의 방식, 기존 경제학의 방식이 만들어 낸 모순은 한계까지 누적되어 있다. 그래서 시간이 별로 없다. 우리가 더 빠르게 소통하는 살아있는 사회로 진화하는데 실패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문제를 파괴적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의한 파괴이건 전쟁에 의한 파괴이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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