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적 관점에서 혹은 과학적 관점에서 한의학은 사기처럼 느껴지기 쉽다. 사실 한의학에서 말하는 무슨 혈이니 맥이니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말해서 나도 한의학은 과학이다같은 말을 할 생각은 없으며 한의학의 쓸모가 증명된다고 단언 할 생각도 없다. 서양의학의 의사도 그러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엉터리 한의학 의사가 나오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물리학과 뇌과학 그리고 AI를 공부한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하다보면 한의학은 잘못 이해되고 있으며 그 나름의 문맥에서는 옳은 의술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대비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한의학도 의학으로서 서양의학처럼 일종의 과학이라고 가정하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한의학도 분명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요즘은 현대진료 기구도 쓰는 등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의학은 그 중심적 접근 방식에서 서양의학과는 다르다. 한의학은 본질적으로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과학적 시각에서는 사기로 취급되기 쉽다. 과학의 시대인 오늘날 이런 시각은 당연해 보인다. 나는 비과학적 사기를 모두 옹호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학이 아니면 소용없다는 결론은 옳지 않다.
이 세상에는 분명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작곡이나 글쓰기같은 예술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분석적 이해를 통해서 좋은 음악이나 좋은 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까? 어떤 음악이나 시는 인간의 영감을 통해 탄생한다. 그리고 그걸 만든 사람조차도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한의학 의사의 치료법은 마치 영감에 의해 탄생한 시나 음악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런건 사기라고 단정짓기 전에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분명 좋은 음악과 시가 있다. 그 이외에도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탄생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분명 효과가 있다. 한의학 치료가 사기이며 소위 플라시보 효과일 뿐이라는 주장은 분명 진실의 한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진실은 아니다. 한의학도 사람을 구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너무 신비주의적이지 않기 위해 서양 의학으로 돌아가 보자. 서양 의학은 인간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전통의 일부로 여겨지는 서양 의학은 치료를 정상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가 정상이 아닌 인간 즉 아픈 인간을 보았을 때 그것을 수정해서 정상인 인간으로 만드는 일로 이해 한다. 그건 마치 잘 접어놓은 타월이 정상 상태라고 할 때 펼쳐져서 구겨져 있는 타월을 다시 잘 정돈해서 정상상태인 접어놓은 타월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혈압이나 혈당량이 정상 수치를 넘었다면 그 수치를 바꿔서 정상상태로 만드는 것이 병의 치료인 것이다.
서양의학에서는 인간이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의 이데아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분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몸이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이해된다. 그것은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고, 그 각각의 부분중 어떤 것이 정상이 아닌 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몸이 아픈 것이다. 그래서 서양 의사는 그 잘못된 부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거나 변형시키는 약을 줘서 환자의 몸을 정상상태로 되돌린다. 서양의사는 비록 내가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인간역시 자연법칙을 어길 수 없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설계도를 다 몰라도 분명 설계도대로 조립되었을 자동차나 전자렌지처럼 말이다. 자동차에 펑크가 나면 바퀴를 바꾸면 된다. 그러면 자동차는 정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서양의학이다.
이렇게 단순화해서 말한 서양의학은 한의학의 입장에서는 오만한 것으로 보인다. 한의학의 입장은 보다 전체론적이며 불가지론적이다. 인간의 몸이란 기계가 아니고 분할 될 수도 없으며 그 전체를 우리가 다 알게 될 어떤 물질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절대로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대상이며 다만 우리는 그것과 소통하고 상호작용함으로 해서 그것의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서양 의학에서 인간이 기계라면 한의학에서는 인간이란 같이 춤을 출 상대다. 그것은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자친구나 아내처럼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모르는 상대방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그것을 소중히 다룬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다. 한의학도 서양의학도 모두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서양의학이 환자를 자동차처럼 우악스럽게 다루고 그 환자의 말에 귀를 닫는다면 한의학은 환자의 말에 주목하고 환자와의 소통에 집중한다. 서양의학은 고장나지 않는 자동차는 고칠 것이 없다는 태도라면 한의학은 인간이란 계속 변하는 것이므로 평상시부터 계속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한다.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또다른 분야는 경제학이다. 경제학은 말하자면 사회를 환자로 생각하는 의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고장난 부분이 있으면 칼을 대서 수술을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려고 한다. 적어도 이것이 서양의 경제학이다. 그런데 경제학은 우울한 학문이라고 불린다. 경제학자가 의사라면 결과로 봐서 돌팔이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양의학처럼 접근한 해결책으로 경제가 살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에 대한 답은 내가 위에서 말한 것들을 반복한다. 사회를 우리가 아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정상 사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과학적으로 접근할 때 사회가 건강해 지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사회를 동적 평형을 이루고 있지만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통의 대상, 관리의 대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국가 예산은 어떻게 배분되어야 할까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그걸 논리적으로 배분하는 것이고 처음부터 정답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지만 한의학적인 접근은 지금의 상태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상태를 바꿔가는 것이다. 세심하게 반응을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조금씩 조금씩 모두가 좋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런 행보는 당연히 직선이 아니다. 왼쪽 다리에 피가 나니까 그 피나는 곳을 멈추자 같은 식으로 문제가 있는 곳을 명확히 경계짓고 그 치료제를 내미는 식이 아니다. 사회는 그렇게 특정 부분에서 국소적으로 문제를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혀있어서 한쪽에 집중하는 치료는 오히려 전체를 해칠 수도 있다.
이런 접근은 소위 베이지안 확률 추정이라고 하는 확률론에서의 접근과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해온 전체론적이고 불가지론적인 태도가 서양에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무슨 신비하게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한의학 내부에도 서양의학적인 면이 있듯이 서양의학에서도 전체론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면은 있다. 다만 과학적이고 환원론적인 접근이 워낙 세상을 채우고 있어서 그 이외의 것을 간단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기를 느낀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일까? 나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앞으로도 몸이 아플 때 서양의사의 말을 잘 따를 생각이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고 느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기는 쉽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나는 거대한 공장이 되어버린 병원을 보았다. 수 많은 환자들을 더 빨리 처리하기 위해 전문분야로 나뉘어 기계적으로 일하는 의사들로 그 병원은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환자의 말이나 형편은 살피지를 않는다.
자동화된 기계로 물건을 대량생산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물건을 쓸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그릇이나 신발이나 옷이 그렇다. 그런 기계화 자동화의 효과를 부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때로 한땀 한땀 장인의 정성으로 만든 물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조심스레 전체를 살피면서 만든 물건과 기계가 대량생산한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그런 프로세스의 대상이 쓰고버리는 컵이나 신발인 경우와 인간의 생명인 경우는 또 의미가 서로 다르다. 공장이 된 병원이 통계적으로 더 많은 환자를 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말 그런 병원에 가고 싶을까? 인생의 마지막을 삶의 질을 무시하고 기계취급을 받으며 고통스러워 하면서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 할까? 그걸 넘어 평상시에는 어떤가? 한번 뿐인 인생의 시간은 어떻게 써야 할까?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우리는 매순간 자기 자신과 전체를 살피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빨리 뛰기만 한다고 멀리 가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경제학이 사회를 구하지 못하는 우울한 학문이라고 말해지듯이 느낌을 놓치고 머리만 돌리는 사람은 실은 당황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어떤 쪽이 옳다거나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강조를 위해 대비시킨 것처럼 양쪽이 극명하게 한쪽의 특성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대비를 통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소중한 뭔가가 잊혀질 뻔 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내가 아는 의사들 중에는 몸이 안좋은 의사들이 꽤 있다. 그들은 몸을 자동차처럼 생각해서 아프면 약으로 고치면 된다는 확신이 너무 크다. 정신에 대한 고려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기계적이다. 그러다가 몸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생긴다. 정신이 단순해 진다. 그들로서는 철학책을 읽어서 몸을 고친다는 발상은 말도 안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의학적인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 마음이 몸의 상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은 잊지 않는 것이 좋다. 잊혀지면 그것이 손실되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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