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른 계획없이 시작한 여행도 하루 하루가 지나갈 수록 틀이 잡혀가고 의미가 생겨난다. 나는 어느새 새로운 도시에 가면 내가 뭘 먼저 찾아야 하는지를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세가지인데 하나는 산책로고 또 하나는 도서관이며 마지막은 마트다. 뜻밖에 맛집이나 카페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나도 그런델 가는 걸 좋아했는데 말이다.
마트라는게 좀 이상할 수 있지만 좋은 마트에 들리면 필요한 식자재와 물을 싸게 살 수 있고 원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다. 도서관은 그 도시가 책에 대해 얼마나 진심인가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전주에 살았었고 지금은 세종에서 가까운 오송에 사는 내 눈높이는 굉장히 높다. 전국에서 가장 도서관이 잘되어 있는 도시들이 이 도시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교하자면 속초나 강릉의 도서관은 도서관의 건물이건 책의 양이건 만족스럽지가 않다. 산책길은 물론 꽤 훌룡하지만 말이다. 여행하기보다 살아보기라는 컨셉은 진심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이사온다면 제일 먼저 확인할 것들에 나는 집중하게 된다.
속초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이마트에 들러 어제 먹었던 햄버거를 다시 하나 더 샀다. 속초 이마트는 주차가 공짜다. 시간제한은 있지만 체크를 잘하는 편은 아닌 것같다. 경고문 뿐이다. 동해안은 주차인심이 좋아서 고맙다. 이마트에 차를 세워두고 이마트 앞에 있는 전주콩나물국밥집에 들렀다. 뜨끈한 국물은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지만 여행길에서는 특히 괜찮고 더구나 가격이 5500원이니 고맙다.
나는 차를 충전하고 슈퍼차저 옆에 있는 외옹치항에 차를 주차시켰다. 이곳은 차박하기 좋은 곳이라 이전에도 몇번이나 차박을 했던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 바다가 바로 보이고 추천할만한 횟집들이 늘어서 있어서 술한잔하고 차박하면서 자기 좋다. 오늘은 집에서 가져온 캔맥주와 마트에서 산 햄버거로 술상을 대신하기로 했다.
맥주와 햄버거를 먹고 약간 쉬다보니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걸 알았다. 아까부터 약한 빗방울이었는데 이젠 완전히 그쳤다. 그래서 외옹치항에서 시작하는 바다향기로를 걸었다. 이 길은 바닷가 데크길인데 그 끝은 해변길로 이어지고 계속 가면 속초해수욕장의 대관람차까지 갈 수 있다. 외옹치항부터 시작해서 왕복 5km정도의 길이니 한시간 정도의 산책길이다. 바다향기로는 추천할만한 유명한 산책길이고 속초해수욕장까지의 길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산책을 끝내고 다시 한동안 쉬다보니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11시가 넘었다. 그런데 잠이 오질 않는다. 아침에 산책하고 글쓰고 마트에 가고 나면 오후에 쉬는 일정이기 때문에 밤쯤이 되면 그리 졸리지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외옹치항을 뒤로 하고 강릉 경포대로 옮겨가서 잠을 자기로 한다. 거리에 차도 없고 한시간도 안걸리는 길이니 이 정도는 음악이나 들으면서 드라이브하기 좋은 거리다.
강릉 경포호에는 주변에 무료 주차장이 많다. 나는 경포번영회 무료주차장이란 곳에 차를 댔다. 이곳은 화장실도 구비되어 있어서 더욱 차박하기 좋은 곳으로 아직 여름 성수기가 되질 않아서 토요일 밤이지만 차는 별로 없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경포호 주변을 걷기로 하고 잠을 청한다.
아침이다. 6시쯤에 일어난 나는 경포호 주변을 걷기 시작한다. 이번에 주변길을 걸으면서 알게 된 건데 오른손잡이라서 그런지 나는 걸으면서 자연히 오른쪽편을 더 많이 본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진행방향의 왼편도 볼 수는 있는데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경포호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호수가 왼쪽에 위치하므로 나는 산책길 반대편의 숲이나 건물을 더 보게 된다. 시계방향으로 걷는다면 내내 호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경포호는 아름답고 호수 주변에는 강릉시에서 준비한 여러가지 조각들이 늘어서 있었다. 분명히 돈들여서 잘 꾸며놓은 호수며 걷는 거리도 5km정도로 한바퀴 도는데 부담이 없는 좋은 거리다. 아침에 산책하거나 조깅하는 사람들이 꽤있었다.
그런데 춘천이나 속초에서의 산책에 비하면 영 심심하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내내 왜 그럴까를 생각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걷고 싶은 골목에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란 그 골목이 구불구불해서 골목길 전체가 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골목을 걸을 때에는 저 골목을 돌아나가면 뭐가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런데 경포호는 딱 체육관의 트랙처럼 타원형으로 매끈하게 생겼고 나무나 건물로 가리는 것이 없어서 호수가에서 전체 호수의 모양이 다 잘보인다.
물론 그런 모습도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계속 보다보면 지루해진다. 이에 비하면 속초의 영랑호는 주변이 구불구불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나무들이 많아서 훨씬 재미있는 산책길을 만든다. 시야가 계속 변한다. 막혔다가 뚫린다. 이런 걸 생각하면 경포호도 터널을 만든다던가 높은 나무를 심어서 전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한다던가 하는 쪽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돈을 안들인 건 아니다. 호숫가에 있는 조각들만 해도 꽤 큰돈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포호를 개발한 사람은 걷는 재미라는 걸 잘 모르는 사람인 듯하다.
이런 걸 생각해 봐도 눈앞의 것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매일 매일의 일상을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자꾸 내일 다음주 내년따위는 생각하지 않는게 좋다. 재미있게 걸어야 산책길이 힘들지 않듯이 매일 매일이 재미있어야 한달 한해가 너무 힘들지 않은 법이다.
아침산책을 마치고 세수하고 이닦고 몸단장을 마친 후 도서관을 검색해 본다. 강릉에는 시립중앙도서관이라는 곳이 있다. 나는 지금 거기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속초의 도서관에서는 러셀의 서양철학사 서문을 읽었다. 나는 호기롭게 계획을 세우길 다른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계속 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도서관에는 그 책이 없다. 확실히 나는 세종국립도서관에 너무 익숙해졌다. 사실 이 강릉을 대표하는 도서관에는 내 책은 한권도 없다.
대신에 유대철이 쓴 대한민국철학사라는 책을 읽었다. 한국에는 한국철학이 있어야 하며 그걸 위해 철학사가 있어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물론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도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한국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공감한다. 러셀은 철학을 종교와 과학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말했다. 철학처럼 대중적으로 요구되면서도 사멸해가는 기이한 학문도 없을 것이다. 인문학이 대체로 그렇기는 하지만 철학과라고 하면 이제 사라지는 추세의 학과다. 그런데 대중은 철학을 원한다. 그리고 철학과교수는 철학을 잘 안다고 여겨진다. 이 세가지 사실은 기묘한 모순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철학은 여러가지 뜻이 있겠지만 결국 이 세상을 사는 법에 대한 것이다. 기술적 발달로 세상이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 사람들은 그래서 인문학 좀 더 구체적으로는 철학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마치 과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신학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것같은 문제를 만들고 있다. 시간상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재미있는 책이었다.
중앙도서관의 길건너편에는 금천칼국수라는 장칼국수 맛집이 있다. 맛집인줄 몰랐는데 줄서서 먹는걸 보고 나도 한그릇 먹었다. 엄청 내취향은 아니어서 강추는 못하겠지만 맛집은 맞는 것같다.
'여행 > 키워드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금산 트레킹과 충주 시립 도서관 (0) | 2025.05.14 |
---|---|
횡성 호수길과 원주 미리내 도서관 (0) | 2025.05.13 |
속초 영랑호 둘레길 (6) | 2025.05.10 |
춘천의 삼악산 케이블카와 물레길 (2) | 2025.05.09 |
길 위에서 (와코시에서 시모노 세키까지) (0) | 2015.0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