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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와 새로운 시대

by 격암(강국진) 2025. 12. 25.

자유의지와 과학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철학자 알프레드 밀리는 자유의지에는 3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는 물질과 무관하게 영혼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졌는가 하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영혼의 개념따위와는 상관없이 모든 물질적 조건이 같을 때에도 인간은 서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심오한 열림을 가졌는가 하는 의미다. 마지막은 그저 우리가 어떤 일을 판단함에 있어서 외부의 영향없이 판단할 자유가 있었는가 하는 단순한 조건의 의미다. 이에 따르면 총을 들이댄 상태에서 판단했다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어떤 뜻으로 이해하건 세상에는 자유의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고 연구가 있어왔다. 그건 왜 그럴까? 이 질문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질문은 근대 사회의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근대 사회는 다른 사회로 진화하거나 무너지고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은 나날이 더욱 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 사회 특히 서구 사회는 적어도 근대화 이래 개인이라는 판단과 행동의 주체를 세상의 중심으로 두었다. 개인이 합쳐져서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된다는 관점에서는 개인이라는 존재가 의미를 잃으면 모든 논리가 무너지게 된다. 자유의지라는 말은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국민의 권리를 가질 그 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윤리나 법의 근거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보상을 요구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할 주체가 있어야 우리는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는 의심되지 않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근대 문명 사회로서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것은 시스템의 부정이고 근대인으로서는 근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전근대의 신비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알프레드 밀리가 말하는 자유의지의 뜻도 행동의 주체라는 관점으로 보면 보다 잘 이해가 된다. 우리는 육체를 넘어서 존재하는 자아인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물질적으로 나마 우리는 행동의 주체로서 행동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우리는 개개인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앞에서 소개하는 자유의지의 뜻 뒤에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개인이라는 개념위에 세워진 근대 문명의 토대를 위협하는 질문들이다.

 

근대 문명은 번성했지만 근대 문명의 토대는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실은 19세기이래 우리의 사고가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많이 있어 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는 경제적 사회적 토대가 결정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20세기에는 무수히 많은 심리적 실험에 의해서 우리는 인간이 생각처럼 합리적으로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왔다. 밀 그램의 복종실험은 권위있는 사람의 명령에 따라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주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스탠포드의 실험에서는 무작위로 간수와 죄수로 역할을 나누자 자기의 역할에 따라 사람들은 크게 다른 행동을 했다. 이외에도 20세기는 우리의 사고는 우리의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상식으로 변한 시기이기도 하다. 근대 문명이 발달하면 할 수록 근대 문명의 기초는 흔들려온 셈이다.

 

이제 인공장기 이식수술이 놀라운 뉴스가 아니게 된 우리시대에는 우리는 행동의 주체라는 문제를 훨씬 더 간결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위장은 배가 고프면 뇌에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러면 뇌는 배고프다라는 신호에 따라 밥을 먹고 싶어하게 된다. 이렇다고 할 때 우리는 뇌가 위장의 영향속에서 그러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통상 뇌의 자유의지를 따지지 않고 나의 자유의지, 개인의 자유의지를 따진다. 그런데 우리의 몸을 뇌와 위라는 두 부분으로 나눠놓고 나면 우리는 밥을 먹기로하는 선택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부분을 우리가 우리라는 존재의 선을 어디에 그었는가에 따라 다르게 말하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통상 우리의 위장을 우리의 일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의 위장이 신호를 보내서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한 것을 외부의 강압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의심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가? 그렇다면 위장이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누구인가? 기술적으로는 위장없이 영양만 공급받고 사는 인간은 가능할 것이다. 그건 내가 아닌가? 위장이냐 뇌냐라고 질문하지만 우리는 왜 꼭 뇌를 말하는가? 척추는 뇌의 일부가 아니라는 건 누가 정한 것이며 뇌에도 여러부분이 있는데 그 여러 부분은 왜 꼭 하나로 불러야 하나? 소뇌, 대뇌, 전두엽, 대뇌피질 같은 것중에서 어느 것이 나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뇌나 육체에 대한 이같은 구분이 단순히 관습적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개인이나 자아에 대해서도 100%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사랑의 개념을 위태롭게 하고 그것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게 만든다. 위장과 뇌의 관계처럼 두 사람이 아주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 애정을 가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외부인의 관점에서 보면 애정은 자유의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아들이나 딸이 연인을 만나 부모를 모른 척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는 부모는 많다. 그들은 내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내 아들을 세뇌하고, 눈이 멀게 해서 조종하고 자유의지를 빼앗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즐거움과 고통은 내 위장의 신호 이상으로 강렬한 신호를 나에게 보내서 나로하여금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그것 때문에 죽기도 한다. 개인이 자유의지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같은 행동은 당연히 미친 짓이 된다.

 

생각해 보면 문제는 연인의 사랑만 문제가 아니다. 가족이나 국가등 여러 공동체에서 느끼는 애정은 누구나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미친 짓이 된다. 내 딸이 죽건 누군가의 딸이 죽건 마찬가지라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안에서 일어난 사고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어떤 때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사람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같다. 이것은 위선적이다.

 

이같은 사실들로 부터 우리는 한가지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강하고 빠르게 소통할 때 자아의 개념은 확장되거나 무너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나라거나 개인이라고 하면 팔다리를 가진 이 육체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더 작아질 수도 있고 더 커질 수도 있다. 이같은 것은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아주 중요한 사실이 된다. 단순히 장기이식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AI 시대는 점차로 인간과 시스템, 인간과 기계,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초고속 통신의 시대가 지구상의 여러나라들을 이어서 단순히 자기 나라 안만 보는 시각을 위태롭게 만들었듯이 우리의 의지가 엄청난 속력으로 퍼져나가고 다시 그것에 대한 결과가 돌아오는 시대에는 우리는 이제 근대의 시각, 근대의 시스템을 더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인터넷의 시대가 오고 나자, 사람들은 종종 인터넷 상에서 자신의 또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오프라인에서는 근엄한 중년의 신사인 사람이 온라인 상에서는 낯뜨거운 아이디를 가지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일은 세상에는 흔하다. AI 에이전트의 시대에 우리는 한 사람이 엄청난 수의 완벽한 페르소나를 가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고, 반대로 다수의 사람이 마치 주식회사처럼 하나의 법인을 이뤄서 하나의 페르소나로 행동하게 되는 걸 볼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 판단의 주체는 누구이고 자유의지란 누구의 의지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근대적 의미의 개인과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근대는 이미 비틀거리고 있고, 우리는 새로운 규칙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판단의 주체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판단의 주체가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는것을 원칙으로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지금 우리가 당연시 하는 개인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자주 돌아가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는가 하는 질문은 정답을 찾기 보다는 증발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그 질문의 정답을 찾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질문이 던져지는 근대라는 시대가 가진 모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물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수렵채집인이 문명 시대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이 자주 화제에 오른다면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려고 한다. 그것은 적어도 전근대의 사람들에게 근대의 사회가 이상하게 보일 것처럼 우리에게 기이하게 보일 수 있는 전혀 다른 시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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