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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잘못된 질문의 경계

by 격암(강국진) 2026. 2. 26.

문화컨텐츠나 미디어에서는 인간같은 기계를 자주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켄슈타인이나 자비스일 것이다.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같은 목소리를 가진 존재인 그들은 인간같아지기를 소망하는 기계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다. 컴퓨터가 처음나온 이래 인간은 이제 전자두뇌가 나왔다면서 그런 인간 같은 기계가 곧 출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술이 성숙함에 따라 어느 정도 그렇게 할 수도 있는 면도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키보드와 마우스로 PC를 쓰고 있다. 음성인식이 충분히 발달한 뒤에도 사람들이 구술로 글을 쓰고 마네킹같은 인간형태의 말하는 얼굴에다 대고 이야기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들고 다니는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화면도 정말 작은데도 거기서도 우리는 자판을 두들기고 터치 화면을 사용한다.

 

우리는 인간끼리는 만나면 여전히 말로 대화한다. 하지만 우리가 친구와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건 혹시 그들에게는 스크린도 키보드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인간다운 소통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기술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스크린과 키보드가 음성 소통보다 더 뛰어난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PC와 키보드와 모니터를 사용해서 소통하는 걸까?

 

일단 이런 의문이 들면 이제 우리는 조금 다른 것에도 주목하게 된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에 탄생한 젊은 세대의 경우에는 종종 바로 옆에 있는 친구에게도 문자로 말을 건다. 모두가 집에 있는데도 가족들이 메신저로 소통하는 경우는 흔하고, 회사에서 메신저와 이메일로 소통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는 좀 기막힌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우리는 인간같은 기계를 만든게 아니라 인간에게 없었던 모니터와 키보드를 인간에게 붙인 꼴이 되어가고 있다. 즉 인간의 소통은 점점 더 비인간적인 요소를 덧붙인 형태로 즉 새로운 미디어를 통하는 형태로 커지고 있다. 스마트폰과 인간의 융합이다. 

 

이제 친구는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통해 나에게 이미지를 보내고 이모티콘을 보내며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내 스마트폰의 키보드로 친구에게 메시지를 입력한다. 이게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에게라면 이상하지 않지만 심지어 같은 방에 있는 친구일 때도 이게 더 편하게 느껴지는 사례가 있다. 조선시대라면 멋진 풍경을 본 친구는 그걸 글로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친구에게 소식을 전할 것이다. 돌아와서 말로 그걸 설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멋진 풍경을 보자마자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보낸다. 그것만큼 정확하고 편한게 없다. 인간은 고작 얼굴 표정을 가질 뿐이고, 목소리를 가졌지만 화면을 가지고 텍스트 창을 가진 스마트폰은 말이나 글이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기계가 이미 인간의 소통에서 핵심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그것없이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여러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테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기계냐 인간이냐의 관점과는 조금 다른 인터페이스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상황은 좀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키보드나 모니터만 인터페이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OS도 인터페이스고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도 인터페이스다. 컴퓨터의 핵심인 중앙처리장치란 결국 이진수의 신호만 받아들여서 그에 따라 행동하는 기계에 불과하고 컴퓨터의 본질은 본래 그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인간과 컴퓨터의 소통은 상당히 힘들다. 그래서 컴파일러가 나오고 OS가 개발되며, 마우스와 키보드 같은 인터페이스도 개발된 것이다. 인간의 마우스 클릭은 컴퓨터 언어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중앙처리장치가 이해할 수 있는 이진수로 바뀌어서 사용자의 의도가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컴퓨터란 인간의 뇌처럼 마치 양파같은 구조로 계속 인터페이스로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인터페이스로 관점을 바꿔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딘가에 선을 딱 그어서 여기서 부터 기계고 여기서부터는 인터페이스라고 말하기가 곤란해 진다. 심지어 인간쪽도 그렇다. 인간의 본질은 안구나 피부인가? 인간은 팔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가? 인간의 몸은 인간의 하드웨어가 아닌가? 그리고 그 하드웨어는 어쩌면 인터페이스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것은 뉴럴링크처럼 인간의 뇌신호를 직접 컴퓨터의 신호로 바꾸는 기계를 보면 자명해 진다. 

 

물론 손은 나의 일부이며 그걸 단순히 기계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맞다. 그러나 말들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지금 문맥이 복잡해지기 시작한 이유가 있다. 이전에는 우리는 인간이나 기계를 본질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즉 세상이 기계와 인간으로 딱딱 떨어지는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인터페이스라는건 이것과 저것을 잇는 것이다. 즉 관계에대한 것이다. 관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말들의 의미가 복잡해진다. 팔은 나의 일부라는 말도 맞지만 내가 내 팔이 없어졌다고 내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도 맞다.  관계론적으로 세상을 파악하면 우리는 이런 저런 얼핏보면 모순되는 말들을 동시에 옳다고 말해야 한다. 

 

기계나 인간의 본질을 따지는 쪽은 계속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계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관계에 주목하는 쪽은 인간과 기계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관계가 강해지면 이미 인간과 기계가 구분해서 말하기 어려워진다. 자율주행 AI가 탑재된 자동차에 타고 있는 인간은 자동차가 가야 할 목적지를 정해주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자율주행 AI라는 뛰어난 인터페이스를 통해 자동차라는 하드웨어와 융합된 새로운 존재이다. 자율주행 AI를 통해 우리는 인간같은 자동차를 가지게 되는게 아니다. 인간같은 인터페이스도 핵심이 아니다. PC를 여전히 키보드로 움직이듯 미래의 AI 자동차도 대부분 스위치와 터치스크린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부드럽고 매력적인 음성으로 말한다는게 AI 자동차의 핵심은 아니다. 그런건 선물에 딸린 포장지같은 것이다. 핵심은 자동차라는 하드웨어와 인간을 잘 융합해서 인간의 의지대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PC를 쓸 때처럼 말이다. 

 

이런 말들은 우리가 인간성을 잃고 기계의 일부가 된다는 말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융합이 언제나 좋다는 건 아니다. 다시 편지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우리가 친구와 말로 글로 소통하는 것이 메신저로 사진이나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면이 분명히 있다. 느리고 번거로운 소통은 그만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소통에 정성을 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면이 필요없다면 모두가 자택근무를 하면서 화상통신을 해도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많은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직접 출근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소통이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새로운 인터페이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가지게 되고 소통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늘어난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실은 마치 양파껍질같은 겉표면이거나 관계를 위한 인터페이스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와 친구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그 친구이며 나머지는 그저 겉껍질인가?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관계란 누구과 누구의 어떤 관계인가? 재벌 3세로 쉽게 부자가 된 친구가 가난한 친구에게 너는 가난한 걸 보면 게으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능이나 다른 환경의 차이는 어떤가? 머리 좋고 건강하며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성격좋고 교양있으며 일찌감치 아이에게 좋은 인맥을 만들어주는 부모밑에서 태어난 친구는 다른 친구와 비교될 때 어떻게 비교되어야 공평한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가 나인가? 

 

우리의 사고는 대개 본질적이다. 그 이유는 과거에는 사람들이 변화가 느린 환경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우리의 팔다리가 마치 우리의 신발처럼 벗었다 신었다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팔다리를 우리의 일부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하지 않고 변화가 없기에 그건 내 일부가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해서 양반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 본질이 양반이고 쌍놈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 본질이 쌍놈이라고 여겨졌다. 혈통과 신분은 사람들의 중요한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간평등의 정신에 따라 21세기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천하고 귀한 건 없다. 언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관계가 뒤집어 질지 모른다. 골프장 주인이 식당에 가면 왕처럼 대접을 받을 지 모르지만 식당주인이 골프장에 가면 이번에는 그 관계가 역전될 수 있다. 

 

이런 걸 생각하면 만약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변하며, 훨씬 더 강력한 미디어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관계들이 등장한다면 우리의 사고는 훨씬 더 관계적이어야 할 것이다. 즉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와 구조에 주목하고 그걸 적절히 개선하는 쪽에 신경써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훨씬 더 강력한 인터페이스는 물론 AI다. 그리고 나는 지금 컴퓨터와 인간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서 시작했지만 이 생각은 조금만 넓혀 보면 관련되지 않는 곳이 없다. 천민과 귀족을 나누던 세계의 사람이 21세기에 뚝 떨어진다면 매우 당황스러워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착각때문에 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옛날보다 10배 100배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한다. 학벌이 소용없어진다고 한다. 젊었을 때 의사 자격증이나 법조인 자격증같은 걸 한번 따면 죽을 때까지 그걸로 먹고 사는 시대가 끝나간다고 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희미해 진다고 한다. 10년이나 20년뒤 나는 누구일까? 

 

AI는 무수히 많은 이름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이름들은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낡은 이름들은 힘을 잃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일을 해 나가는데 낡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남들은 윈도우 PC나 맥을 쓰는데 혼자서 천공카드 들고 컴퓨터를 쓰고 있으면 경쟁력이 없듯이 말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연결이다 (connection is all you need). 그에 비하면 원래 그렇다는 본질은 허상이다. 앞으로 AI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연결속에서 과거에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 질 것이다. 거기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기계인가 라는 질문은 흥미롭지만 별로 핵심적인 질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하다. AI가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연결이 무엇일까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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