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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멋지다는 사상

by 격암(강국진) 2026. 3. 4.

우리는 자주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헤, 재미를 위해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본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은 그냥 멋진 것이며 좋은 것이지 그것이 어떤 사상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딸기가 맛있고, 섹시한 여배우나 고급 자동차가 좋다는 것이 사상적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뜨겁고 차가운 원초적인 감각처럼 사물이 가진 본래적인 성질이며 거기에 어떤 사상의 소비나 추종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로맨틱 코미디나 첩보물 영화 혹은 중국 무협 영화 같은 장르물에 어떤 사상이 들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큐나 종교 영화처럼 특정한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컨텐츠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망각의 결과일 뿐 이 세상에는 사상적이지 않은 게없다. 즉 멋진 것은 모두 사상적인 것이다. 매우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 보자면 뜨겁고 차가운 감각조차 사상적이다. 왜냐면 어떤 것이 이러하다라는 사실만을 제공하는 사실명제는 좋고 나쁨을 말하는 가치 명제와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가 좋다라고 느꼈을 때 그것이 추운 겨울날 따스한 이불 속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적으로 당연히 좋은게 아니라 어떠한 가치 판단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억울하게 아들이 감옥에 끌려가 큰 고생을 하고 있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 희생의 결과로 만들어진 장작으로 집의 난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따스함이 결코 좋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작 이걸 위해서 그런 희생이 필요했냐고 그 따스함을 저주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부터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같은 질문까지 많은 질문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판단속에서 우리는 뭔가를 당연시하고 뭔가를 좋다거나 나쁘다고 느낀다. 어쩌면 그 같은 상황은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가 좋은게 당연하고, 그것에는 어떤 사상적인 측면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그냥 바뀔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져 있다. 즉 세상은 변하고, 의미는 어떤 것이 놓여진 문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머슴이 자신을 때리고 학대하는 주인이지만 때로 밥을 주기 때문에 그 주인에게 감사해 하고, 그 주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일은 나는 머슴이고 저 사람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 머슴은 심지어 그 주인의 발길질조차 황송하고 감사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머슴은 자신이 착취당했으며 자신이 좋다고 여긴 것들이 실은 모욕적이고 나쁜 것이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가 사상적이라는 것을 쉽게 느낀다. 그 이외에도 종교적 지도자의 삶이나 독실한 신자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그것을 사상적인 영화로 쉽게 인식할 것이다. 그것이 변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냥 섹시한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나, 고급차와 명품옷이 나오는 영화는 어떤가? 그런 원초적인 자극을 강조하는 영화도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이 어떤 변화를 다루고 있는가? 물론 그렇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이나 어떤 자극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동경은 물론 당연한게 아니다. 명품백에 대한 집착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 그리고 포르노 영화가 현실적이 아니듯이 말이다.

 

첫째로 배고픈 자에게 밥이란 소중한 것이지만 배부른 자에게는 별로 그렇지 않듯이 대중에게, 다수의 타인에게 이런게 좋다라고 말할 때에는 실은 현실과는 맞지 않는 일이 반드시 생긴다. 우리는 영화속에 빠져들어가서 그걸 보고 그 안의 반응과 논리에 빠져서 그 영화가 가지는 사상에 동화될 수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사상은 나의 개인적 현실과는 다른 현실에 바탕한 것이다.

 

둘째로 어떤 책이나 영화도 사실 그대로를 다 전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의 극히 일부 밖에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즉 어마어마하게 많은 문맥들이 상실되고 망각된다. 고급 호텔에서 맛있는 칵테일을 마시는 경험도 어떤 문맥속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체험을 준다. 노벨상을 받는 상황도 그렇다. 그런데 영화는 그걸 전부 제공할 수 없다.

 

이 두가지를 정리하자면 문화컨텐츠가 가진 사상은 보편적이고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현실 그자체가 아니라 사상이다. 사상은 모든 세부사항을 다 가진 나를 위한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냥 남자나 노동자나 한국인이나 남편이나 아빠가 아니다. 어떤 보통명사나 이야기도 나를 묘사하는 지극히 부족한 단어일 뿐이다.

 

예전에 카이스트라는 공대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포항공대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나는 실제로 그런 드라마는 현실과는 매우 다르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 재벌 3세나 록스타는 그들을 보여주는 드라마를 보면 잠깐 환상속에 빠지더라도 곧 저건 웃기는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가 메디컬 드라마가 현실과 똑같다고 느낀다면 그는 사상에 중독된 것이다. 그런 면이 있을 수는 있지만 완전히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실제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기사나 영화나 책을 보면 문화컨텐츠가 가지는 조잡함과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일 때는 그것을 상당히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과학자라면 신문의 과학기사를 읽고 그것이 얼마나 조잡하고 왜곡되어 있는가라는 것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기사를 읽을 때는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우리는 가끔 생기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거나 구분하지 못한다. 현실의 복잡성을 쉽게 잊는다. 우리는 쉽사리 우리가 사업가라던가 노동자라던가 남성이라던가 여성이라던가 하는 정체성을 가졌다고 설득된다.

 

이런 말들이 모든 사상은 허구이며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모든 말은 당연히 한계를 가진다.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진실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하면서 살 수 있다. 그 말이 현실 그 자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제대로라는게 그 단어의 최종적이고 보편적이며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의미를 말하는 거라면 말이다. 그래도 민주주의 때문에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그 단어때문에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비록 모든 사상은 한계가 있지만 사상은 위대할 수 있다.

 

또한 유한한 우리로서는 사물의 의미를 다 알 수 없기에 그런걸 고민하고 다 발견하고나서 살기를 시작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발한걸음걷고 딸기 하나 먹을 때마다 사상적 고민에 빠져서 살아갈 수는 없다. 가족을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 연민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사상적으로 분해할 수는 없다. 그런 사상적 분해는 끝나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그 결과가 좋을 수가 없다.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는 결국 어떤 관점속에서는 악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당연히 멋진게 아니다. 우리는 멋지다는 것은 언제나 사상적이며 모든 사상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때로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특히 우리가 지금 어떤 조잡한 사상의 맹신자가 되어있는 것은 아닌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어린 아이는 그냥 어린 아이가 아니다. 어린 아이는 나는 어린 아이라는 사상의 맹신자다. 그 아이는 자신이 가진 사상의 한계를 느낄 때만이 어른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겠지만 자신의 사상을 점검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그나마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어린애처럼 짐승처럼 살다가 죽을 것이다.

 

이런 사상적 성장은 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응이다. 우리가 어린애처럼 계속 살면 그런 삶이 가져오는 모순이 누적되어 한꺼번에 몰려올 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자신의 보호자가 영원히 사는 것처럼 떼만 쓰다가 어느 날 홀로서기를 하게 된 어린 아이는 차라리 진작 어른스럽게 살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장하지 않고 멈춰도 되는 날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있을 수 없다. 현실이 변하고 나도 변화하기 때문에 성장과 변화를 멈추면 현실과 우리의 사상사이에는 괴리가 생긴다. 그러면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일이 비극을 만들 것이다. 어떤 것도 당연히 멋진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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