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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실패한 한국의 교육

by 격암(강국진) 2008. 5. 28.

2008.5.28

 

여기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참사원이고 신입사원에게 교육을 시켜서 부하직원으로 써먹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하직원에게 책을 복사하는것을 시키고 그렇게 복사된것 을 여러분이 제본한다고 해봅시다. 부하직원에게 복사를 시켰더니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참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 부하직원이 제본까지 잘한다면 여러분은 기뻐해야 할까요? 천만에. 자칫하면 여러분의 존재의미자체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제본을 그만두고 그 위의 단계인 판매라던가 인사같은것을 할 때까지 그 부하직원의 능력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그 부하직원의 시야를 제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도대체 왜 복사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질문하는 것을 무례하고 공격적인 일로 여기게 만듭니다. 물론 특히 제본을 어떻게 하는지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상사는 부하직원의 약점을 잡고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니가 나한테 잘못보이면 인생 매장당하는 수가 있다고 협박도 해야 합니다. 추월은 용서할수 없으며 부하직원의 능력은 오직 복사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늘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심각해진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한국은 반세기만에 전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에서 발전속력이 가장 빨랐습니다. 나이든 숙련공이 젊은 애송이에게 수십년간 쌓아온 경험을 자랑할수 있는 분야가 많은 나라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건 세상이 천천히 변하는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죠. 오늘날 한국은 나이든 세대는 한창유행하는 기계들이 뭔지도 몰라서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판입니다. 한국에서는 1-20년만 시간이 지나면 도저히 세상의 변화를 쫒아가지 못할정도로 사회가 변화해 왔습니다. 당연히 앞선세대는 뒷세대를 교육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컨트롤 할 수있는 방법을 절실하게 추구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어떤 모순을 만들고 그 모순은 점점 심화 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21세기 한국의 풍경입니다. 

한국에는 중국과 일본을 능가하는 권위주의가 만연합니다. 대학에서 회사에서 선배라는 이름은 무한한 권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한줄로 세워져서 복종하라고 말해집니다. 젊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적재산권과 같은 것은 천시되고 나이든 세대가 가지고 있는 자본의 가치는 무한히 증가합니다. 직업에 대한 능력이 충분해도 나이가 많다거나 과거가 어떠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차별을 당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인생에 있어서 도전과 모험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한번 줄밖으로 가면 인생끝장이라는 메세지를 사회는 계속 던집니다. 때로 일탈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도 잘 안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한국의 교육은 고의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선배세대가 후배세대를 결사적으로 바보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지난날의 실상입니다. 다음세대가 윗세대의 실상을 이해할만큼 똑똑하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의적이라는 것은 한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알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수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주는 조언과 일반 학생에게 해주는 조언이 같은가? 

상식적으로 말해 이 두가지 조언은 크게 차이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인생의 선배이자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해야할 담당자로서 후배들이자 제자들에게 살아가는데 있어 최선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바로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과 교육기관이 해주는 교육의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수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실제로 어떤 조언을 해주는가. 요즘 한국에서 기러기아빠가 유행입니다. 그리고 그 기러기 아빠중 가장 높은 비율의 직업이 바로 교수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교수들이 자녀에게 해주는 교육적 조언이란 한국에서 교육받지 말라는 말이란 뜻입니다. 

한국의 교육기관들은 그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학생들을 교육시키는가. 물론 가장 훌룡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기성세대가 컨트롤할 수 있는 인재여야 한다는 겁니다. 조정장치가 달려져 있지 않은 인재는 위험합니다. 기성세대의 질서를 문란케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재가 조정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인재의 성장이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오히려 정보와 기회의 제공을 중단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세상일 전부를 설명해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런 논리로 사람을 어린아이취급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그 사람의 성장을 심각하게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육은 학생들을 고의적으로 어린아이로 유지시킵니다. 그것이 컨트롤하고 이용해먹기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교육이 고의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 가장 훌룡한 교육이란 그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와 지성체 다시 말해 성인으로 취급해 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 고의적 실패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한국에 만연해 있습니다. 진실은 오직 부자지간같은 강력한 인맥사이에서만 밝혀집니다.

선진국의 학부교육과 한국의 학부교육을 비교했을때 가장 차이나는 것은 기술적인 강의 수준이 아닙니다. 학부때 전공과목공부 문제푸는 건 어떻게 보면 한국학생이 더 많이 문제를 풉니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선진국의 학부에서는 처음부터 학생들은 교수급의 사람들이 연구하는 주제들에 대한 소개를 자주 받는 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지금의 연구현실에 더 일찍 눈을 뜹니다. 교수들이 로보트를 연구하는지 우주론을 연구하는지 바다를 연구하는지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소개합니다. 물론 학생들은 그 세부사항을 잘 모르지만 지금 무슨 연구들이 현실세상에 일어나는가를 일찍부터 배웁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사업가로 길러지고 한국의 학생들은 처음부터 컨베이어 벨트위의 무지한 직공으로 전문화 되기를 기대하며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그들이 연구를 언제 시작하는 가를 보면 알수 있으며 이러한 차이때문에 군대도 가지 않고 일찍 연구를 시작하는 선진국 학생들은 20대 말전에 상당한 연구경력을 쌓게 되는 반면 한국의 학생들은 대개 자기 연구주제 자체를 제대로 알게 되는것이 매우 늦습니다. 

한국의 교수들은 일부러 학생들을 바보로 만듭니다. 그리고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학생들에게 석학대접을 받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교수는 물론 심지어 우리가 권위적이라고 알고 있는 일본의 교수들도 한국의 교수-학생 관계에 비하면 훨씬 덜 권위적입니다. 왜냐면 진실은 거꾸로 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학문수준은 세계수준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세계적으로 까지 일찍 눈이 넓어지면 더이상 교수들을 존경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대학원생이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터넷이 퍼지고 세상의 미디어가 발달하자 기밀의 유지는 더더욱 힘이듭니다. 반면에 모순은 깊어져 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운찬 같은 사람을 비롯한 학계의 사람들이 논하고 있는 주제는 3불정책(기여입학, 본고사, 고교등급제의 금지)를 포기하는 일 같은 것입니다. 더많은 돈이 대학에 있으면 잘할 수 있다. 학력고사만 더 잘치면 인재를 뽑을 수 있다. 고등학생이며 대학생들을 더 쥐어 짤수 있는 방안이나 어린 학생들을 결과야 어찌되건 이공계로 밀어넣을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합니다. 더많은 채찍질과 당근이면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물론 자기 자식들은 그 대열에 넣고 싶어하지 않으며 기성세대가 그 채찍과 당근의 창고열쇠를 쥐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해결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전혀 그들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 해결은 인터넷을 포함한 달라진 미디어 환경때문에 진실이 퍼지는 것입니다. 급격히 무능한 교수들과 대학들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전과는 비할수 없이 빨리 퍼지기 때문입니다. 권위의 거품이 꺼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운찬씨는 경제계의 석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전같으면 알기 어렵죠. 그러나 세계적 수준에서 그의 학문적 수준의 평가도 이제는 쉽사리 행해 집니다. 

실상 우리 사회에서 거론하고 있는 전방위적인 모순의 구조는 거의 동일합니다. 많은 모순이 이 세대적 갈등구조속에 있습니다. 피라미드구조의 하층부로 들어가는 매력, 기나긴 줄의 맨끝에 서는 매력이 점점 떨어집니다. 이제 적체는 너무 심화되서 윗줄의 사람이 내 인생 책임져 준다는 말은 너무 뻔한 거짓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집값의 모순은 더더욱 격화됩니다. 젊은 세대는 결혼할 무렵부터 자신의 월급을 수십년간 모아야 자신의 가정이 들어가 살 집을 구할수 있다는 현실에 직면합니다. 그나마 한국의 물가는 봉급수준을 고려하면 전세계 최고수준입니다. 다시 말해 일해서 저금하기도 더더욱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죽도록 공부해서 상위 1%에 들고 삼성같은 대기업에 취직해도 박사를 받아도 생활보장은 되지 않습니다. 다들 40이 되면 길거리로 나서야 하는것이 아닌가 두려워합니다. 그 잘난 피라미드의 윗층이 챙겨줄수 있는 인원수는 어차피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요즘엔 그 잘나간다는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도 돈없고 빽없는 집안출신은 한계가 있습니다. 귀족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문제도 심화됩니다. 

누가 이런 사회를 만드는가. 바로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이재용씨는 삼성의 후계자로 한국경제의 대통령자리를 거저 받으려고 합니다. 그의 과거 실적을 보면 처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대는 것마다 망한다는 겁니다. 마이크로 소프트나 도요타의 회장을 이런식으로 선임한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일이 진행중입니다. 한국은 법치국가이며 삼성은 어디까지나 주식회사이지만 말입니다. 

진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오로지 한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그것은 진실의 폭로이고 거품있는 권위의 종말입니다. 이것이 21세기 미디어 전쟁이 모든 사회변화를 위한 전쟁의 핵심중의 핵심인 이유입니다. 정보는 사방으로 세고 있고 기득권은 사력을 대해 구멍을 막아대고 있습니다. 정보의 통로가 막혀 있으면 절대로 진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투명속에서 진짜 권위는 실종되고 책임소재는 불분명해져 버립니다. 도둑이 도둑잡으라고 외치는 일이 반복됩니다. 사학법논쟁의 핵심도 과연 사학재단의 투명성을 높일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누군가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보다 살기 좋아지기 위해서는 변화를 수긍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진실규명을 위한 국민적 운동이 필요합니다. 허깨비 권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고 어쩌면 모든 것의 이전에 우리는 한가지에 동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살려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등따시고 배부르다고 모순에 눈감으면 누군가의 손에 피뭍은 도끼가 들리고 같이 탄 배에는 구멍이 나고 말겁니다. 그걸 경고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아이엠에프같은게 그런 예입니다. 사람들이 부동산 가격이 천천히 안정되는게 아니라 아예 폭락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그런예입니다. 모순의 피해자들에 의해서 경제위기가 강제될수 있습니다. 전국민의 삶은 로또가 되버리고 맙니다. 취직도 투자도 그렇게 될수 있습니다. 

3불정책폐지 운운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 눈에는 참으로 한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스스로 시대적 모순이 낳은 분노와 미움을 자기 몸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한국교육은 고의적으로 실패한겁니다. 그리고 이제 많은 사람이 그걸 알고 있습니다. 해결은 반드시 됩니다. 비밀유지가 불가능한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고통스런 방식으로 해결 될것인가 아니면 덜 고통스런 방식으로 해결될것인가.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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