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고 융합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한 타인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이나 동생이나 사랑하는 아들이나 연인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가 아파하는 쪽을 택하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나보다도 더욱 나에더 가깝다. 그래서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내팔다리보다 꼬집었을때 더욱 아픈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은 무아라고 도올은 말한다. 내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나라고 생각지 않았다. 거기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내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영혼같은 것이 서양사람이 찾아낸 답중의 하나다.
나는 사랑과 같은 감정을 통해서 확대되고 재정의 된다. 나는 단순히 나의 육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팔다리가 없어진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때 우리는 더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나라는 것은 가변적으로 정의되고 내가 느끼는 희노애락은 바로 나의 정체성에 따른 것이다. 무아는 나의 정체성이 무한대로 펼쳐진 상태라고 생각된다. 돌하나 나무하나 공기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느낄때 세상 만물은 나에 의해서 나에게 행해지는 일이다. 거기에 슬픔과 욕망이 끼어들 이유가 없다.
불교나 서양사상에서 사랑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 반면 유교나 도교쪽에서 사랑은 그다지 강조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같다. 이것은 동양사상이 본래 유물론적이거나 작은 나가 아닌 범세계적인 나에서 시작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본래 동양철학은 윤회나 육체와 분리된 영혼따위를 가정하지 않는다. 희노애락의 감정은 물리적 현상일 뿐이며 따라서 사랑이란 인간이라는 육체가 가진 본래적 성질중의 하나일뿐이다. 노자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글을 찾기는 힘든것 같다. 사람과 사람은 노자적 세계에서 그저 스쳐지나간다. 도에 따라서 살다보면 어쩌다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이정도가 노자적 동반자에 대한 관념일까.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불릴만큼 사랑은 강조되고 동양에서 사랑이란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결과 서양의 문명은 사랑만큼 커다란 미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것은 동양의 태도가 지혜롭다는 한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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