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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한국의 교육, 우리의 독서 취향

by 격암(강국진) 2009. 7. 6.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가 만연해 있다. 한국의 교육에는 문제가 많다. 이런 말에 우리는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런것이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구체적 예를 들어보라고 하면 잘 말하지 못한다. 아 나는 그런 교육을 받았다.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내정신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같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한번해보자. 여기 두개의 책이 있다. 한권의 책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언급하면서 많은 단편적 지식을 첨부해서 세계 지성들을 분류하고 그들이 만나고 다투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만 이런 책은 필연적으로 언급한 모든 사람의 논리를 뚜렷하게 말해줄수 없다. 따라서 논리를 쌓아가는 벽돌이 좀 부실하다. 


또 한권의 책은 그 책을 전부 읽어도 지식적으로 늘어난 것은 별로 없는 것같다. 즉 저자가 별로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받아들일 기본적 사실과 개인적인 직접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논리를 쌓아나가는 책이다. 논리적으로 자료적으로 최대한 자기완결적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생각함에 보다 분명한 기준이 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언급해서 진도가 나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이 두권이 책을 준다면 당신은 어떤 평가를 내릴것인가. 한국 사람은 압도적으로 다수가 첫번째의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같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들을 둘러보고 느끼는 점이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에서도 그렇게 느끼는 점이다. 


이게 어떤 책인가. 바로 4지선다형 대학입시 시험에 적합해 보이는 책이다. 깊이는 없지만 줄줄이 지식은 많이 들어 있는 책이며 바로 입시 참고서 같은 책이다. 문제풀기는 좋다. 그리스 철학자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뭐 플라톤은 뭐 이런 식으로 줄줄이 외우면 문제 풀수 있고 어디가서 한마디 떠들수 있다. 


뭐랄까 솔직히 이해한것은 별로 없거나 특히 아주 중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논리가 지나치게 어려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상당양의 단편적 지식읏 습득하고 어느정도의 머리속 혼란을 가져온 상태가 매우 만족스럽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중대한 것이 머리속에 들어온것 같고 뿌듯하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주체적 합리주의가 아니다. 권위주의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과학이나 철학, 학문에 대해 논하는 책도 유령과 귀신이 난무하는, 사교집단이나 써먹을 미신적인 책이 되기가 쉽다. 거기 나와 있는 단편적 지식들이 모두 참이라도 그런데 그 지식들을 서로 이어주는 논리적 고리가 희미하면서 그저 외국의 유명인들의 이름으로 예수를 팔아 전쟁을 일으키듯 자기멋대로 해석한 대로 논리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가장 많이 남은 것은 하나는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존경의식이고 또하나는 잘 모르는 것은 책을 읽고 더 공부하자는 생각이다. 이것은 보통 좋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적어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책을 더읽으면 더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든다. 남는 것은 나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반박하기 어려운 지적인 시스템에 기죽은 나이며 결국 나는 내머리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결론을 그저 받아들이는 쪽으로 태도를 결정한다. 이것은 지적인 신학이다. 신의 위치에 지적 시스템을 가져다 놓은 것에 불과하며 전혀 합리주의가 아니다. 


권위주의가 만연한 한국의 분위기와 깊이와 이해와 독창성은 무시되고 단편적 지식을 강조하는 4지선다형 시험체계는 이미 우리를 상당히 바꿔버렸다. 그래서 그런 식의 지식습득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지적인 우상을 세워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습관화 시킨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비하하고 백과사전식으로 지식을 나열하는 사람이나 책을 높이 평가한다. 


우리가 뭔가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앞길을 걸어간 사람을 무시할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앞길을 걸어간 사람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도 가지 못하게 되며 합리의 이름으로 비합리를 저지르고 과학의 이름으로 비과학을 행하게 된다. 


우리는 외국의 유명한 석학들을 알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나 폴 크루그만, 칼 포퍼, 토마스 쿤, 노암 촘스키등 외국의 유명한 이름을 대려면 끝이 없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들을 권위주의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필요로 한것은 똘레랑스라고 말한다. 그럼 똘레랑스가 뭘까? 그걸 알자면 프랑스 역사 전체를 알아도 부족하다. 언제나 남는 것은 알듯말듯한 느낌이다. 이건 합리주의가 아니다. 프랑스 사회를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권위주의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이 주체적 합리주의일까 아니면 다른 나라 사회를 권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책은 되도록 원전을 읽어야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의적인 자기 이야기가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 자기 이야기를 쓰지만 플라톤을 평가하는 책은 대개 플라톤을 우상화시키기 마련이다. 도킨스는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글을 쓰지만 그는 수학을 증명하듯 뭔가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언어로 하는 논증은 그럴수가 없다. 그런데 도킨스를 읽는게 아니라 도킨스를 언급하는 것에서 그치고 자기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는 별로 의미가 없다. 


물론 원전은 어렵다. 어려우면 어쩔수 없고 어쩌면 이해못하는게 정상일수도 있다. 유명한 지성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전혀 이해가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해 못하면 어쩔수 없고 이해하면 다행이다. 너무 쉽게 써놓은 참고서같은 책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시중에는 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소개를 하는 소개서가 많이 나와 있다. 해외의 유명 저자들의 논쟁을 소개하는 것은 당연히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가치 이상의 반작용도 있지 않을까? 수박겉핧기식으로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은 결과는 마치 아동을 위해 그리스철학을 몇십페이지로 정리한 것처럼 보인다. 남는 것은 어떤 유명인에 대한 존경심과 숭배하는 마음 그리고 혼란된 정신 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유명인의 것을 받아먹기 바쁘다. 이런 책은 당연히 더많은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것일까? 


이렇기 때문에 외국에서 학자 한명이 방한하거나 하면 엄청난 권위로 받아들여지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냥 석학이 한마디하면 받아적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의 태도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잘모른다. 알아도 우리만큼 이해할수가 없다. 계속해서 그렇게 남의 것을 받아 적으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한 우리는 영영 진짜를 배우지 못하고 말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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