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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1 : 거리로 나서다.

by 격암(강국진) 2009. 8. 18.

1. 거리로 나서다.

 

나는 거리로 다시 나서야 했다. 나는 절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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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벌써 어두웠다. 하루치의 밝음은 이미 다 소진되어 버린 참이었다. 경주 역앞의 사람들은 쌀쌀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그곳이 역앞이란 이유때문인지 뭔가에 쫒기듯 빨리 빨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차역이란 장소는 본래 이방인이 이고장으로 들어오는 곳이거나 어디론가 떠나기위해 가는 장소다. 누구도 역앞에서 느긋하게 오래 서있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모두들 각자의 목적지 –아마도 각자의 가정이겠지만- 를 향해 허둥지둥 움직이는 것이다. 집으로 가져갈 황남빵 박스를 들고 가거나 과일봉지를 들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사람들은 대개 혼자였지만 때로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즐거운 얼굴로 서로를 향해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나는 외로웠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외롭고도 지쳐있었다. 몸은 우울증의 증세를 호소하면서 매순간 나를 아스팔트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이어폰을 통과해서 내 머릿속을 울려대는 노래가 나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고요한 정신을 가지고는 여기 경주역까지 오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어딘가 골방 같은 곳에 처박혀 다시는 여기까지 올 엄두를 낼수 없을만큼 엉망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의욕이 내 몸에서 흘러나가는 것이 마치 실제로 피나 물이 내 손가락 끝에서 똑똑 흘러나가는 것같았다. 나는 때때로 하나둘셋넷 하고 내 발걸음수를 셌다. 그렇게 해야 계속 걸을 수 있을 것같았다. 이렇게 심각해질 때 까지 나를 내려두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모순된 이야기지만 어떤 의미로 내 마음은 맑았다. 여러모로 봐서 나는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는데도 그렇다. 내 느낌을 말하자면 나는 마치 녹이 슬어 잘 움직이지 않는 로보트를 탄 조종사가 된 것같다. 그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덕분에 이 몸을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다. 심장이 빨리 뛰고 팔다리는 늘어지며 왠지 쉽게 피곤해진다. 정교한 생각을 하는 것이나 복잡한 것을 외우는 것이 더 힘들다. 그러나 내 몸의 조종사인 나의 마음은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내가 왜 이런 중증 우울증세를 보이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특별히 가족을 잃었다던가 큰 변화가 닥쳤다던가 하는 비극적 일이 있었던것도 아니다. 물론 우울증의 결과로 분명 나는 직장에서도 곧 곤란을 겪을 참이지만 그것은 우울증의 이유라기 보다는 결과였다. 외부적 형식을 보았을 때 나는 그러저럭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다. 공부는 우등생이었고 명문대를 나왔다. 굉장한 부자가 되거나 유명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실패는 없었다. 적어도 무엇보다 나는 아직은 젊다. 아직은 건강하고 출세에 대한 희망도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생활에 크게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현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실 객관적 상황은 전에 더 나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오히려 나는 더 희망에 차있었고 인생을 즐겼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보다 더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거나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어릴 때를 생각하면 호화판의 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가족은 진짜로 돈이 없었다. 친구들이 빵사먹으로 가자고 할 때 그런걸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용돈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말해야 하는게 너무 싫었다. 옷이 남루한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다지 해본게 없다는 사실도 싫었다. 친구들이 어딘가를 다녀온 이야기며 어떤 게임을 해본 이야기 같은 것을 할 때면 나는 그냥 침묵하게 되었다. 대학교를 가기전에 나는 바캉스를 가 본적이 없었고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적어도 객관적으로는 초라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는 자가용을 몰고, 해외여행을 즐긴다. 노트북이며 핸드폰이며 피엠피며 여러가지 어른들의 장난감같은 전자제품들을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산다. 맛집을 찾아다니고 비싼 자전거를 사서 자전거타기 유행에 동참하기도 하고 와인을 골라마시는 호사도 누린다. 즐겨입는 것은 아니라도 비싼 브랜드의 옷도 몇 벌쯤 가지고 있다. 원한다면 더 살 수도 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물질이 충족되면 정신이 배고픈 법이라서 일까? 그게 아니면 본래 가진게 많아지면 고민이 많아지는 법이라서 일까? 그럴지도 모르고 이도 저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게서는 의욕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릴적에는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족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우등생이 되는 것,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 한마디로 잘 살아보는 것, 그것 이외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걸 요구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러나 가진게 많은 지금은 이것저것 판단해야 한다. 공부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는게 없는데 말이다. 낯선 사람이 유달리 친절하게 굴면 의심이 든다. 나는 두려움과 불안에 젖는다.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릴 것만 같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때때로 비난한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나를 빼고 웃고 있을때면 소외감을 느낀다.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아니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해서 일까. 어느쪽인지 자신이 없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것들, 처음 사보는 것들 그런 것들이 주는 호사스러움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이제는 훨씬 더 많은, 내가 벌 수 없는 엄청난 돈을 들이지 않으면 큰 즐거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뭔가를 가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자주 100% 오렌지 주스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가 처음 100% 오렌지 주스를 마셨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설탕물인 10% 주스에만 익숙하던 나는 100% 주스를 마시게 되자 엄청나게 맛있는 어떤 맛을 기대했지만 그건 그저 맛이 조금 다른 주스였을 뿐이다. 나는 사실 조금 실망했다. 그리고 어느새100%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100%에 익숙해진 어느날 다시 10% 주스를 마셔보니 도저히 맛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더 가진다는 것은 대개 이렇다. 더 가져도 행복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그게 대단하지 않아서 실망한다. 어떤 것은 그걸 가지면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고 너무 행복해서 영원한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같이 상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기분좋다. 아주 행복하다. 그러나 생각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걸 가지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런 것이 되고 만다. 밧데리가 떨어진 손전등처럼 더 이상 빛을 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것을 빼앗겼을 때 우리는 큰 슬픔과 상실감을 느낀다.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같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돈도 명예도 자동차나 사랑도 그렇다. 그리고 젊음도 그렇다. 많은 어린애들은 그들이 20살이되면 뭔가 엄청난 시기를 맞이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흥분과 기대로 청춘의 시기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거기에는 대단히 흥분되는 영화처럼 극적인 것은 없다. 가슴을 불태울 사랑이야기도 없고 대단한 모험도 없고 사회의 불의와 싸우는 대단한 활극도 없다. 어떤 때는 차라리 비극적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대부분의 청춘은 지루하며 그저 아주 드물게 약간의 극적인 사건들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영화주인공처럼 사는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가기 싫은 공부를 하거나, 가기 싫은 직장에 가기 위해, 뭔가 하기 싫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계처럼 움직이며 사는 것이다. 

 

아이가 청년이 되면 그들은 금새 젊음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청춘이라는 것이 사실 별거 아니라는 것에 조금 실망한다. 그러나 그들이 젊음을 조금씩 잃어간다는 것을 느끼는 중년이 되면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다. 전보다 술을 마시기 힘들어지고 달리기도 잘 할 수 없고 몸매는 망가져 있고 춤도 춰지지 않으며 눈도 좀 침침해진 느낌이다. 그러면 대단히 우울해 지는 것이다. 이러니 가진다는 것은 애초에 어찌보면 크게 도움되는 것없이 크게 슬퍼할 일만 늘리는 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가지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다. 그리고는 우리가 잃어가는 것을 불안해하고 슬퍼한다.

 

나는 경주로 왔다. 영주부석사로 가는 기차를 탄다는 것이 내 계획이다. 경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내게는 의미심장한 길이었다. 나는 포항에 한동안 살았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경주로 몇번인가 걸어가 본 경험이 있었다. 언제나 시작은 한밤중이었고 나는 가로등조차 없어서 너무나 어두운 그 길을 열시간가까이 걸었다. 길은 언제나 그렇지만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훈련받은 사람에게는 그게 별거 아닐 수도 있었지만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나로서는 혼자 밤에 걷는 그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이었다. 지나는 사람도 없었고 요즘처럼 엠피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매우 지루하고 먼 길이었다. 

 

그런데 그 먼길을 몇번이고 걸었던 이유는 이런 경험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 이따금씩 표지판이 나온다. 경주 앞으로 23km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표지판은 내 기대치보다 훨씬 못한 현실을 가르키고 있었다. 많이 왔나 싶으면 언제나 그길은 아직 절반도 오지 못한 것이다. 나는 실망한다. 그리고 계속 걷는다. 왜냐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버스도 택시도 없는 그 길에서 한밤중에 주저앉아있어봐야 내 앞에 있는 길이 줄어들지 않는다. 게다가 뒤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걷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 길도 너무 멀다. 그것이 나를 계속 걷게 했다. 

 

언제나 기대치보다 내가 걸은 거리는 작다는 것 그리고 주저 앉아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이 나를 걷게 한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그러다가 급기야 이제는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무의식적으로 걷게 된다. 내 마음자세가 그렇게 될 바로 그 무렵이면 나는 경주에 도착한다. 길은 하나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지 말고 움직여라. 현실에 충실하라. 다른 방법은 없다. 움직여야한다. 걸어라. 나는 그런 교훈들이 좋았다. 내 삶에 필요한 교훈들이었다. 나는 그런 교훈들을 다시 되새기려고 그 길을 몇번이고 걸었다, 움직여라. 내 삶을 부지런히 살아라.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아무런 기대없이 하라.  

 

고작해야 몇십키로의 길을 걷고 그것을 한번의 인생을 살은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로서는 그 한번의 길을 걷는 것이 한번의 인생을 살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 이게 인생이야 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자신에게 살아갈 용기와 힘이 생긴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단순하게 사는 인생 그리고 헌신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봤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사고방식에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한번 결정이 내려진 것은 결코 바꾸려고 하지 않는 보수성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체념이다. 내 삶은 이렇게 되기로 결정되었으니 이제 바꿀 수 없다는 체념. 한밤중의 긴 산책은 언제나 경주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의 인생에서는 ‘경주’는 영영 나오지 않으런지도 모른다. 어떤 '경주'는 너무 멀 것이고 어떤 '경주'는 너무 가까워서 도착해도 아 이제 다 살았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실제의 인생에서는 입닥치고 머리를 비우고 경주로 걷는 태도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머리를 쓰면서 경주로 꼭 가야하는지 다른 곳으로 가면 안되는지를 생각하는 것도, 한눈을 팔고 자신의 태도에 회의적인 태도가 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게 있어 그 사고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지금 나의 상황이다. 그 지혜는 이제 말라버린 샘과 같다.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다. 나는 그 이상을 찾아야만 한다.

 

포항과 경주사이의 길을 하나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제나 포항은 삶의 시작이 되고 경주는 삶의 목표내지 마지막이 된다. 나는 한번도 경주에서 시작해서 포항까지 걷지는 않았다.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따라서 경주역앞에 서게 되면 나는 묘한 감상에 젖게 되고 뭔가 아주 중요한 장소에라도 도착한 것같은 느낌을 가진다. 하나의 목표, 지향해야 할 곳의 상징. 경주역이란 내게는 그런 곳이다. 

 

나는 경주에서 영주 부석사로 가는 밤기차를 타기로 했다. 혼자하는 여행이었고 굳이 영주나 부석사에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였다. 다만 이번에는 경주에서 출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생을 다시 출발해야 겠다는, 하나의 삶을 끝내고, 하나의 삶의 이정표에서 또 다른 삶의 목표로 걸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경주로 걷던 시절에 가졌던, 아니 지금까지 가져왔던 삶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이번엔 경주를 향해 가지 말고 경주에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결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주를 향해 길을 걷기 시작할 때면 나는 언제나 내 삶이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마치 연료탱크에 구멍이 난 자동차를 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이번에도 그랬다. 아니 이번에는 내 연료탱크에 난 구멍이 전보다 더 크고 심각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내가 경주로의 여행이 아니라 경주로부터의 여행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새출발이 필요했다. 인생의 근본적 수정이 필요했다. 자동차 수리처럼 말한다면 전면적 점검이 필요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논리적인 사람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나쁜 기억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는 불성실한 것도 아닌데 구구단을 제대로 못 외워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아이들중의 하나였고 영어단어를 너무나 못 외웠기 때문에 중학교때 영어 교과서를 해석하기는 커녕 읽지도 못해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아이들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내가 머리가 나쁜 아이였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된다. 나는 IQ가 같은 학년에서 가장 높은 아이중의하나였으며 수학 같은 것에는 소질을 보였다. 따라서 학교공부에 정성을 들이지는 않았던 어린시절에도 어느 정도의 성적은 받는 편이었다. 이런 내가 영어를 전혀 못한다는 것을 나의 중학교 영어선생님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과는 애플이고 칠판은 블랙보드라는 식으로 단어를 무조건 외우는 영어는 취미없어 했지만 길고 복잡한 문장을 논리적으로 꼭 필요한 단어만 남기고 요약해서 받아적는 것은 좋아했다. 나는 기억력이 나쁜 나조차도 외울 수 있는 간단한 몇개의 사실로부터 많은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내는 것을 좋아했다. 요약하고 압축하고 핵심적 논리를 찾고 그런 걸 좋아했기 때문인지 소질이 있었던건지 그런건 남들보다 조금 잘했다. 기억력이 나쁘니까 사물을 기억하기 좋을 만큼 축약하고 핵심을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논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의 핵심이 쉽게 발견되지도 않는다. 어림도 없다. 나는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고 친구들과 감정을 나누는데 서툴렀다.  감정이나 감성적 분야는 언제나 내게 있어서 힘든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농담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외롭게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급생들과 이따금씩 어울리고는 했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것,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모순에 가득 차 있다. 특히 경험없는 어린애의 눈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있는 짓은 단순히 남의 흉내였고 스스로 듣기에도 지루한 뻔한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해줄 사람은 어차피 없으니 나는 세상이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했다. 그건 마음에서 하는 대화라기보다는 연극 같은 것이다. 어느날은 위엄있는 철수를 흉내내고 어느날은 상냥한 만수를 흉내내며 어느날은 개그맨 같은 민수를 흉내내는 식이다.

 

그러나 감정적 해석능력이 느린 내게 있어서 그것도 힘든 일이었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 남의 춤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응이 늦고 보기에 우스꽝스러웠다. 찰리 채플린의 흉내는 찰리 채플린을 능가할 수가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의 복제인 이상 나는 사회적 열등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반에서 인기가 좋고 언제나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몸이 아니라 이 내 몸에 갇혀있었다.

 

내 느낌은 이랬다. 원하던 원치않던 나는 이 지구위에 살고 있다. 나는 서울하고도 봉천동이라는 곳에서 우리가족의 일원으로서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였다. 내가 그러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든 나는 그런 입장에 처해있었다. 내게 있어 세계는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수학문제 같았다. 그것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주어진 숙제다. 그것이 수학문제로 보이는것은 모든 문제는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의 문제여야 한다는 나의 개인적 취향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이해할 방법도 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은 단지 그것이 아주 길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세상을 사는 법을 터득해 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장소였다. 사기가 가득 찬 도박판 이다. 규칙은 알기 어렵고 일에 대한 대가는 들쭉 날쭉하다. 부모님이 말하는 것, 형들이 말하는 것, 친구가 말하는 것과 선생님이 말하는 것은 모두 달랐다. 그리고 그 모두는 내가 읽은 책속의 세상과 또 달랐고 티브이속의 세상과도 달랐다. 나는 때로 힘쎈 아이에게 맞거나 모욕을 당했다. 때로는 형이나 엄마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는 아주 많았다. 말도 안되는 것들이 힘을 내세워 말이 되는 것들을 눌러죽이고 있었다. 사는 것이 춤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스텝을 틀리게 밟고 있는 것같았다.

 

내가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의 문제는 더더욱 풀기 불가능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나는 당연히 쑥맥이었으므로 욕망은 생겨났으되 자연스럽게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책을 즐겨 읽었다.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즐겨읽었고 헤르만헤세의 소설도 즐겨읽었으며 양자역학을 만든 하이젠베르크의 전기를 거듭 읽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내 앞에 있는 문제의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과 삶은 항상 신비로 남았다. 그것은 기분좋은 신비가 아니라 좌절하게 만드는 기분나쁜 신비였다. 삶에는 돌파구가 생기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건 비참한 사춘기였다. 나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마냥 버둥거리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만일 내게 우등생이라는 명예가 없었다면 나는 살아가는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우등생으로 성장하는 것이 내 삶의 희망이었다. 어른들이 말하듯이 좁은 명문대 입학의 문을 통과하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며 모든 고통은 끝이날 것이라는 것, 새로운 세상이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실은 그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조언이었다. 공부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빨리 커서 세상에서 남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라가 앉는 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이고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때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것이 마치 살아남는 유일한 길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입시 공부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등생으로 사회에 나온 순간, 어린 시절에 하고 싶었던 것을 어느 정도 성취한 순간, 아직 모든 것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잔뜩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장소에 서게 된 순간 내게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고 나보다 더 가진 사람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갈지를 몰라서 남들이 오르는 산을 올랐는데 그 산의 정상에는 내가 원하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찾는 보물이 들어 있을거라는 희망으로 바닥가득한 상자들을 하나씩 열고 있는데 보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남은 상자들이 몇개 없다. 나는 좌절감을 느끼고 이제는 남은 상자들을 열어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당장에 큰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일도 많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굴러가는가 하는 그림은 엉성하다. 어디선가 물이 새는 느낌이 드는 보트를 타는 느낌이다. 물이 새는건 느끼지만 당장 가라앉지는 않는다. 물을 계속 부지런히 퍼내면 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렇게 배를 계속 앞으로 전진 시키면 이 배가 가라앉기 전에 나는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신천지가 열려서 행복이 충만한 신천지에 상륙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정도 배면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근거없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포항에서 경주로 걷듯 열심히 주어진 길을 걷는 다. 그러면 경주는 어느 순간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배를 일단 멈추고 수리를 하거나 배를 크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탄 배는 조금은 수리를 거쳤다. 그러나 점점 어떻게 수리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져서 그냥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이제는 엉망으로 지저분해지고 약해져서 금새 무너져버릴 배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배의 침수는 뚜렸해졌고 배는 이제 별로 안락한 장소가 되고 있지 못하지만 아직 신천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나는 몸에 좋다는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연애도 한다. 이것은 물퍼내기다.

 

그러나 이제 한계다.  이제 몸이 나의 마음이 주는 협박에 익숙해져 버렸다. 몇일전의 일이다. 나는 업무상 필요한 학술 논문 하나를 읽고 있었다. 그날 오전 내내 나는 겨우 반페이지도 안되는 그 논문의 초록을 끝까지 읽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단어들은 문장에서 떨어져 나가고 머리는 어떤 새로운 정보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실은 지난 몇년간 나는 실제적으로 한가지도 생산적인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사회적 기준으로는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적당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분명 내가 과거에 한 일을 기반으로 소모적으로 살고 있었고 나의 게으름의 댓가는 이미 나에게 도달한 것이 아니면 곧 나에게 몰아닥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몰아칠 수가 없었다. 불안해야 할 상황인데 내가 충분히 불안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도대체 어쩔 셈인가. 사실은 불안하다. 단지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불안이라는 약물에 내 몸이 내성이 생겨버렸다. 불안이란 내 몸을 움직이는 채찍같았다. 그거 말이다. 여기 우두커니 서있어 봐야 되는게 없어. 움직이는 거다.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이러다간 죽는다. 그렇게 불안과 별 수 없다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더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알고보면 나의 몸은 불안이나 협박에 점점 무감각해졌다. 이제 몸이 불안과 협박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당근도 채찍도 내 몸은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뭘 해야 할까. 나는 뭘해서는 안될까.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기는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앞으로는 뭐할거냐고 몇번이나 물었다. 그들은 대개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계속하다가 늙어죽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나와 별반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아직도 어디론가 달려갈 희망이라는 연료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내 연료탱크는 바닥이 나버렸다.  물론 그들의 연료탱크도 바닥나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활력에 차있는 체했다. 연료가 바닥난 것을 들켜서는 곤란했다. 경쟁에서 탈락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늙어가는 주름진 얼굴을 화장으로 가리는 여자처럼 얼굴을 단장해서 진실을 숨긴다. 어 이봐 언제 만나서 술이나 한잔해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절대로 서로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나도 그렇게 한다. 모두가 바쁜 척하거나 실제로 바쁘거나 지쳐있다. 누가 알겠는가. 그들도 내가 그렇듯 그저 활력이 아직 좀 남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주변에서 사람들은 가끔씩 실종된다. 어느날엔가 어떤 사람들은 소문없이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데 어쩌면 그들은 나처럼 연료가 떨어져서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수치수러워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웃는 얼굴로 떠드는 자들은 그래도 아직도 연료가 남은 자들이다. 그러나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연료는 얼마나 남았을까. 희망은 쓰면 줄어드는 것이다. 성취가 계속되어 새로운 희망이 계속되지 않으면 결국 바닥이 난다.

 

내 주변의 것들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분명한 추세로 그렇게 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졌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결과 나는 보다 정신적으로 안락한 삶을 달성했다기 보다는 사는 데 시큰둥해 진 것에 더 가까웠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밑이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밟고 서서 나를 지탱했던 의미를 가진 삶의 벽돌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 둘씩 내 주변의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리고 내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나는 어느새 내가 왜 이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같았다. 매우 교체하기 쉬운 부속품인 것이다.

 

나는 안 해본 것들을 시도했다. 안 가본 곳에 가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던가 하는 것말이다. 그런 참신한 경험이 나에게 약간씩의 에너지를 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소화불량에 걸린 뱀파이어처럼 빠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참신한 경험들을 소진시키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책들이며 만화며 여행이며 영화따위들, 사람과 만나는 것이며 쇼핑을 하는 일들이며 연애를 하거나 성적인 흥분을 주는 것을 추구하는 일들. 그런 것들은 나에게 피를 빨리고 창백해져서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피를 주지 못하는 나의 희생자들이다. 그리고 나는 피가 부족한 뱀파이어처럼 비틀거리는 것이다. 주변의 것들을 아무리 빨아봐야 이제는 한방울의 피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나는 다 그만두고 방을 뛰쳐나와야 했다. 나는 길위로 나와야 했다.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래야 했다. 내가 영영 방에 처박히거나 긴장과 분노로 인생을 파괴하는 자학행위를 하거나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강물에 뛰어들기 전에 그래야 했다. 어둠에 영원히 갇히기 전에 나는 길로 나와야 했다. 나는 어딘가로 혼자 가기로 했다. 경주에서 타는 기차여행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나는 대개 항상 혼자였지만 이번에 나는 진짜로 혼자가 되어야 했다. 뭔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 몸은 겨우 움직이는데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움직여야 했다. 뭔가를 해야 했다. 나는 절박했다. 

 

경주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서있는 나는 베토벤이나 조지윈스턴이나 휴트니 휘스턴의 음악으로 근근히 버티며 기차로 몸을 옮겼다. 내 좌석이 있는 차량의 입구에 섰을 때 나는 한 근사한 미녀를 보았다. 그런 피곤한 상태에서도 그녀는 눈이 번쩍 뜨일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정말 보기 드물게 그랬다. 갸름한 얼굴에 나풀거리는 머리칼은 그녀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같았고 불쑥튀어나온 가슴이며 아름다운 다리는 성적인 매력을 거침없이 풍기고 있었다.

 

여행의 심각한 주제라던가 무거운 마음, 무거운 몸상태와는 동떨어지게도 나는 창피함을 모르고 여자를 쳐다보는데 시간을 쓰고 있었다. 기차의 각 차량에는 올라타는 문이 두 개씩 있다. 나는 내가 타는 기차칸의 후미입구로 올라설 참이었고 그녀는 앞쪽의 입구로 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그녀는 나와 같은 기차칸에 타는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기분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차를 타고 내 자리로 갔을때 나는 내 자리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았다. 나는 한동안 내 한쪽 볼을 한손으로 긁적였다. 이건 또 무슨 이상한 전개인가. 운이 좋다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보통은 이럴 때 운이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은 이런게 되서는 안됬다. 나는 이런 여행을 바란게 아니였다. 나는 나 혼자여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했다. 삶이란게 뭔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털고 수리하고 정리해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다. 더 큰 그림, 더 정교한 인생의 설계도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정해진 노선으로 계산된 노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내 자리를 보면서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결국 자리에 덜썩하고 앉았다. 어쨌건 자리에 앉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기차의 좌석이 안도감을 주었다. 바다에 난파당한 사람이 붙들고 있는 한조각 나무, 이 의자는 내게 그런 느낌을 준다. 나는 아주 먼거리를 헤엄쳐서 이 좌석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열치는 이윽고 조금씩 움직이더니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이렇게 있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 기차가 달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미모의 아가씨에 대한 생각이 이따금씩 내 의식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큰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여행은 시작부터 내 생각과는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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