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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5 : 눈먼 로맨스

by 격암(강국진) 2009. 10. 5.

5. 눈먼 로맨스

 

수영은 내 이야기를 매우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오히려 말하는 내 쪽에서 내 말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던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다. 수영을 처음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던 질문이 떠올랐다. 운명적인 만남이라던가 인연이라던가 하는 것이 있을까. 그녀와 나는 인연이 있어서 만난 것이고 앞으로 그녀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까. 그녀는 왜 내앞 에 나타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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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고등학생이 다 그렇기는 했지만 내게 있어서 대학입시 준비는 정말로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공부를 했다. 참고서를 읽고 문제집을 풀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보거나 듣지 않았고 일체의 즐거움을 위한 독서도 하지 않았으며 주말도 주중도 없이 대학입시 공부만을 했다.

 

그런 내게도 몇가지 비밀의 유희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정거장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일이었다. 버스정거장에 서면 마치 무슨 음식점 메뉴판이라도 차례로 보듯 버스가 한 대 두 대 차례로 지나간다. 그 버스안에는 셀러리맨, 주부, 남학생들이며 여학생들이 여러가지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지친 사람, 기쁜 사람. 여러가지 얼굴들을 보고 있다보면 왠지 힘이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랬다.

 

또하나의 유희는 춤을 추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물론 내가 어디 클럽이라도 가서 춤을 췄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때때로 음악을 틀고 문을 걸어잠그고 혼자 춤을 췄다. 혼자서 이리저리 몸을 돌리고 흔들다보면 내 안에 쌓여있던 입시공부의 독기가 조금은 사라지는 것같았다. 나는 내가 무슨 종류의 춤을 추는 지도 몰랐다. 그저 몸을 흔들면서 땀이 나고 숨이 차서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춤을 췄다. 춤을 추는 것은 당연히 체력유지에도 도움을 주었다.

 

춤추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고등학교시절의 시간들은 대학에 들어가서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나는 꽤 훌룡한 댄서였던 것이다. 최소한 대개 모범생으로 공부밖에 한 적이 없던 내 동급생들 사이에서는 내 춤이 꽤 뛰어난 춤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이따금씩 댄스 파티가 열리곤 했는데 나는 거기가서 춤을 췄다. 나는 내 친구들처럼 여자들과 놀거나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기위해 간 것이 아니라 진짜로 춤만을 추기 위해 거기에 갔다. 그러므로 거기서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커다란 스피커 앞에서 춤을 추는 것 뿐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저녁내내 밤이 깊도록 발바닥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어질 때까지 춤을 췄다. 지금 생각하면 꽤 꼴불견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춤을 춘다는 것은 비논리적인 행위다. 논리적인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춤을 좋아했다. 골치아픈 것은 그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저 노래를 따라 춤을 춘다는 것이 좋았다. 특히 여러 사람이 같은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면 더욱 좋았다. 지쳐서 이제 그만 머리를 쓰는 일이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을 쓰는 것이 좋았다. 몸이 저리도록 춤을 추고 나면 다음날 아침에 책상앞에 앉아있고 혼자 방에 있어도 왠지 훨씬 기분좋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댄스파티에서 또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혼자 춤을 추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어떤 여학생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여학생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내게 맥주를 가져다 주었다. 밤이 깊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나를 쫒아오기 까지 했다. 그후로 끊임없이 내게 인사를 하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아가씨로 인기도 제법 있을 것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의식적으로 조금 멀리하고 있었다. 나는 물리학과 수학공부에 쏟을 시간을 여자를 만나면서 허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밤 늦게 그녀는 기숙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내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알고 있다면서 울었다. 나는 그 밤에 그녀를 여자기숙사에서 불러냈다. 그리고 우리는 서툰 키스를 했다. 나와 그녀는 한동안 사귀었다. 나는 그녀가 좋았고 내가 누구를 울릴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지나지 않아 나를 차버리고는 학교 보컬 그룹의 드러머에게 가버렸다. 나는 멍청이가 되어 뒤에 남았다.

 

이 짧은 연애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굳이 또하나가 있다면 두 사람이 부둥켜 안고 있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일까. 실제로 보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려고 하고 그걸 위해 많은 일들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마치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찟어지지 않는 비닐커버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만나지만 결코 만나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연애란, 적어도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 연애란, 두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융합되는 것이었다. 그저 두 사람인 것이 아니라 한쌍의 연인이 되어야 두 사람은 연애를 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사랑이란 어떤 내부적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나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같았다. 그녀는 나에 대해 객관적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이미 상당히 잘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과를 다니는지, 성적은 어느정도인지, 어디 출신인지, 내가 춤추기를 좋아하며 학생회관 어디서 노래를 부르곤 하는지 무슨 옷을 잘 입는지, 내 머릿결이 어떤지 하는 것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또한 나와 어떤 종류의 시간을 쓰는가를 신경쓰는 것같았다. 예를 들어 가장 멋진 커피숍에 남자친구와 가서 커피를 마셨다던가 밤바다를 남자친구와 거닐었다던가 유명한 음식점에 같이 가봤다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만난지 한달이 되는 날 같은 기념일이라던가 첫데이트를 한 장소같은 어찌보면 무의미한 것들에 그녀는 많은 의미를 두었다.

 

겉으로 볼 때는 이상할 점이 없던 이것은 내게는,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티브이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형식에만 신경에 쓸뿐 내용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같았다. 멋진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그녀가 신경을 쓰는 것은 그녀가 거기 다녀왔다고 남에게 말할 수 있다는 그 객관적 사실이었다. 거기서 나와 어떤 느낌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가는 그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같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는 자판기 커피를 들고서 계단에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된 그런 대화를 나누는 그런 순간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의 시간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같이 소비하기를 원했다. 마치 낭만적 장소에 가면 낭만이란 것이 탁자위에 이미 올려져 있는 물건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녀가 나와 만나서 느끼고 보고 말하는 것에는 왠지 기성품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녀 커플이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거나 포즈를 취했다면, 이러저러한 강가의 갈대밭에서 멋진 키스씬을 연출했다면 그녀도 그런 것을 재생하고 싶어하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이렇게 한다는 그런 형식을 같이 소비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인 것 같았다. 멋진 연애란 이런 것이라고 어디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같았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겐 사랑이란 서로를 이해하는 내용 보다는 형식이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런 객관적 숫자나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내부의 생각에 있었다. 내가 키가 얼마라던가 무슨 학과라던가 하는 것보다 내 머리에 들어있는 생각이 더 중요했다. 누가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나를 안다고 할수 있을까. 나에 대한 무수한 중요치 않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 것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사고방식, 나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내게 있어 사랑이란 남녀가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해서 한가지 원리아래에서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반면에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이런 저런 로맨틱한 행위를 하고 일주일에 최소한 몇번은 만나고 지갑에 서로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고 길을 갈 때는 이따금씩이라도 팔짱을 하고 걷는 등 그런 특정한 행위들의 집합이었다.

 

나는 그런 연애관계에서 나 스스로가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수 있는 부속품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고 그걸 싫어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내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있거나 키스를 하면서 느끼는 기분 좋은 촉감 때문에 흥분 되어 있던 순간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물어대는 질문에 싫증이 났을 터였다. 나는 그녀에게 언제 가장 행복하고 불행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런 학과를 선택했는가. 나를 왜 좋아하는가 같은 질문따위를 던졌다. 동시에 나는 내 어린 시절과 내 여러가지 생각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가치있어하는것, 내가 싫어하는 것, 나를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그녀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될수록 나는 더 많이 그랬는데 그녀는 별로 그런 대화에 행복해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지독할정도로 논리중독의 상태에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에 대한 지독한 오해라고 느끼고 있던 나역시 마찬가지로 사랑이 뭔지 몰랐다. 다만 그녀와는 모르는 측면이 틀렸을 뿐이다. 나는 이해를 한다는 것의 파괴적 성질을 잘 몰랐다.

 

논리적인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인생이나 세상도 그렇게 본다. 그러나 인생이나 세상을 하나의 질문이나 문제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생이나 세상이라는 문제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 인생을 잘 정돈된 구조와 질서를 가지고 정돈하려는 노력은 실제로는 인생이나 세상을 파괴하는 힘으로도 작동한다. 

 

수학과에는 증명된 것은 모두 별거아닌거라는 농담이 있다. 어떤 수학명제를 증명하려고 끙끙댈때는 그 문제는 너무나 대단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증명이 발견되어 그것을 알게 되면 수학과 대학원생들은 언제나 ‘그거? 별거아냐. 아주 간단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이나 세상의 문제들을 풀거나 답하려고 규칙을 찾고 그 내부를 들여다 보는 일은 그럼 과연 어떨까.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다시 자동차의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동차에 앉아서 시동키를 돌리면 자동차는 시동음을 내고 엔진을 돌리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원시인이라면 자동차라는 요정이 나의 요청을 받아 움직일 준비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문명인이라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자동차 시동키를 돌리면 실린더가 돌아가고 전기신호가 점화스파크로 보내진다. 점화스파크가 뿌려진 가솔린에 불을 붙이면 엔진내부의 실린더는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라는 기계는 자유의지가 없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내 손가락이다. 내 손가락과 자동차의 엔진이 돌아간다고 하는 중간과정에는 여러가지 기계적 과정이 있지만 사실 이 과정은 의지를 논할 때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다.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던 것은 나의 손가락들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내 손가락은 기계가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내 두뇌가 신경망을 통해 전기신호를 보내면 내 손안의 근육들이 수축하고 그렇게 해서 내 손이 움직이는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 손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내 손도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심장으로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은 두뇌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탐나는 좋은 머리라도 내 몸에서 두뇌를 뽑아버리고 남의 두뇌를 채워넣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이제 심장을 교체한다는 일에는 익숙하다. 누구나 심장이식수술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런 수술쯤은 화제가 될만 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일에 익숙해진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팔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을 별거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았을때 우리의 자아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팔다리를 이해하고 심장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대개 자유의지가 없는 일종의 기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심장이란 우리 자아의 일부가 아닌 것 이다. 반면에 두뇌는 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이해를 한다는 것의 결과다. 이해란 의미를 빼앗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물을 더 작은 것으로 축소시킨다. 의미란 관계에서 나오는데 이해란 그 관계를 파괴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뭔가를 이해했다고 하지만 항상 이해하고 나면 이해한 그것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를 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으로 부터 추방되고 나와는 분리되어진 객체가 된다. 우리는 팔의 원리를 이해해서 팔을 우리의 자아에서 추방한다. 뇌도 해마며 전두엽이며 측두엽이며 하는 부분으로 나눠서 연구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를 하고 나면 그것은 결코 우리자아의 진정한 일부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것은 팔과 다리 처럼 그 자체는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은 새로운 인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두뇌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시대를 살게 될것이다. 심지어 두뇌조차도 조각으로 나뉘고 이해된 부분은 자동차처럼 교체가능해 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뇌 조차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자아의 바깥쪽에 해당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인간이 어떻게 기억을 만들고 유지하는가를 알게된다면 기억조차도 우리자아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기억은 만들어지고 주입되며 변형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작아져가고 더 작고 초라한 뇌의 조각이 되어간다.

 

다시 사랑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흔히 친구나 연인이란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어떤 인간을 완벽히 이해해서 그가 무슨 일을 할지 완벽히 예측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게 될 것이다. 나의 세계에서 그는 존재의미를 잃는다. 그는 내가 돌린 자동차 열쇠와 엔진사이에 존재하는 기계 부속품과 같은 존재가 된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자유의지가 없고 기계적으로 행동한다. 

 

내가 친구나 연인에 대해 잘알고 있는 까닭은 내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전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진것 뿐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나에게 계속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중요한 것이고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서로에게 어느정도 신비감을 느끼고 있다. 가장 중요한 친구나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은 가장 이해하고 싶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신비감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랑은 끝이 나고 만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때로 안타까워하지만 그들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그들은 사랑의 상대로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내가 짧게 사귀었던 여학생에게 하고 있던 짓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나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잘못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많은 정보와 분석을 통해 나를 이해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파괴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면서 빛의 회절현상이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보는 관점에서 나란 물리학을 전공하지만 동시에 학생회관에서 밤마다 기타를 치고 팝송을 부르는 낭만적인 남자였다. 그녀는 나의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알고 싶지 않을것이다. 진실은 대개 낭만적 환상보다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진실은 그랬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나를 올바로 이해한 것일까? 나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나는 분명 멋진 스포츠카를 설명하면서 껍데기는 비본질적이라면서 전부 벗겨버리고 기름투성이의 구동축만 강조해서 이것이 스포츠카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녀는 그런게 싫었다. 그런 건 예술 작품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녀는 나의 이미지가 망가져 버리자 다른 남자를 향해 가버렸다. 나는 뒤에 남겨진 바보가 되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로 만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 그사람을 만난게 아니다. 결혼 정보회사 같은 곳에 등록을 하면 -실제로 해본적은 없지만 아마 이렇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가지 우리자신에 대한 정보를 넣고 여러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읽는다. 직업, 나이, 취미, 재산, 학벌, 외모, 부모들의 상황, 고향, 종교. 여러가지 항목은 그나 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진실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 대한 분별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처지가 될 때 기분이 좋지가 않다. 마치 시장에 내놓은 상품이 된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슈퍼에 놓인 동남아산 연어한마리. 무게는 얼마, 싱싱함. 뭐 이런 식이다. 조건이 같은 남자들은 서로 교체가능한 등가의 상품이 된다. 사가지고간 생선이 뭐가 마음에 안들면 같은 것으로 언제든지 바꿔줄수 있다. 이 남자나 이 여자를 뭔가의 이유로 놓치게 된다면 회사는 기꺼이 같은 등급의 남자나 여자로 교체해 줄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나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 누군가가 그 음악들이나 요리의 어떤 특성들이 안 중요하다고 말하면 틀린말이다. 그러나 그 음악과 그 요리를 단하나의 음악과 요리로 느끼려면 그런걸 다잊어야 한다. 머릿속에 평론가의 이러저런 논리적 난도질을 가득 담고 있어서는 그걸 진짜로 느낄 수가 없다. 느낄 수가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세상에는 부부관계나 연애를 하는 법에 대한 책들이 흔하다. 선배나 친구들이 이런 저런 경험을 가지고 이런 저런 설명과 추천을 하기도 한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하나생기면 주변에서 이런 저런 품평을 마구 쏟아내기 마련이다. 그 수많은 소음들과 잡다한 지식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서로를 느낄 수가 없다.

 

불행한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 우리 학교가 이런 것을 열심히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는 학교는 학생들이 부지런히 논리적 계산기를 두드리도록 요구한다. 수많은 논리적 구축물로 가득찬 사회는 우리가 뭔가를 가지고 평가하고 소비하는것에 익숙하도록 만들어서 그것이외의 것을 거의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언제나 진짜 중요한 판단을 내리고 진짜를 알고 있는 것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이다. 논리적으로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고 흥분해서 공포에 질려서 이러저러하다고 변명을 하는 상태에서는 판단은 언제나 틀린다. 이런 흥분된 마음속에서 판단은 실질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뜻대로 이뤄지고 있으며 그것은 내 뜻이 아니다. 객관적 조건이란 외부에서 준 정보지 내 판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판단의 결과도 대개는 실망스럽기 마련이다.

 

우리들의 학교에서는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라고 가르키기 보다는 공포에 질려서 뭐뭐뭐라고 이름붙여진 사회의 어느 자리로 빨리 기어올라가서 규격품의 인생을 빨리 살라고 충동질한다. 따라서 사랑도 규격화된다. 남에게 전시하고 자랑하기 좋은 사람을 만나서 세상에서 그렇게 하는게 연애라고 말하는 식으로 연애를 한다. 그리고 남들이 하듯이 결혼하고 남들이 하듯이 남편과 아내가 된다. 그리고 왠지 외롭다. 사랑을 하거나 결혼을 한게 아니라 취직을 한 것같고 쇼핑을 한 것같다. 

 

코메디 영화에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소위 작업을 할 때 옛사랑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아 당신은 나의 첫사랑을 닮았군요하는 식으로 이전에 헤어진 여자와의 슬픈 사랑이야기 따위를 하면서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지나간 사랑이야기따위를 들으면 그 남자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여자들은 평생 사랑한번 해본 적이 없는 남자보다는 한 때 어떤 여자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그녀와 헤어진 남자에게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물론 그녀에게 작업을 하기 위해 이런 지나간 연애담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나를 움직이는 원리, 내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 대한 자기 점검을 하는 것이었으며 애초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 위해 이런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말이란 벽을 보고 하는것보다는 누군가를 향해 할 때 더 조리있어지고 할 맘이 드는 법이다. 말하자면 수영은 그저 그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듣게된 것 뿐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이야기라던가 재미있을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였다.

 

나는 이야기를 할 때 손을 가끔 흔들 때가 있다. 손목을 까닥이면서 한 줄 한 줄 글을 써넣듯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매우 진지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거치고 코를 지나 나의 눈이 그녀의 입술에 다다랐을 때 잠시였지만 가슴에 뭔가가 쿵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을 실컷 하고 보니 지금의 나는 마치 그녀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남자가 하고 있을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용적으로 철학적으로 말해서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나간 사랑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형식상으로 보았을 때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형식적으로 봐서 그녀에게 당신은 제 첫사랑과 아주 닮으셨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내용과 형식중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어느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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