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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7 : 현대인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09. 10. 20.

7. 현대인의 문제

 

우리는 대부분 고독하다. 우리는 대부분 할일이 많아서 바쁘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의미가 없다. 우리는 뭐가 좋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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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내가 결국 해내고 싶었던 것은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떤 곳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규칙을 찾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살아가기에 대한 매뉴얼이랄까. 물론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은 행복해 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세상도 알아야 하지만 내가 누군지, 내가 언제 행복해지는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위해서 나는 동서양의 고전을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는 결코 체계적으로 철학적 훈련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한 권의 책을 들고 그걸 다 이해하기는커녕 그걸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는 했다. 읽으면서 나는 묘한 것을 알게 되었다. 누가 필로소피를 철학이라고 번역하고 철학에는 동양철학이 있고 서양철학이 있다고 말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책을 좀 읽어보니 내용이 틀려도 너무 틀렸다. 틀리는 정도가 이쪽은 스파게티 요리를 하는데 국수를 이렇게 삶고 저쪽은 저렇게 삶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쪽은 요리책인데 저쪽은 자동차관리에 대한 책인것 같았다.

 

스피노자는 유명한 윤리학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감정들을 여러 개로 분류하고는 그 감정들은 실은 보다 단순한 몇 개의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이뤄져 있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졌다 뭐 이런 식의 환원주의적 설명을 인간의 감정에다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보면 인간정신의 범주를 이리저리 나열한다. 플라톤의 책을 읽어도 버틀런트 러셀의 책을 읽어도 내 인상은 항상 같았다. 이게 그러니까 유교 불교 도교같은 것과 같은 종류의 철학이라는 말인가? 교과서나 철학의 입문책들을 보면 서양철학들의 역사가 줄줄이 나온다. 철학사책으로는 러셀의 책이 유명하지만 소피의 월드 같은 책은 다양한 철학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해 놓기도 했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찌되었다는 말인가. 서양철학이라는 것은 읽어보면 볼수록 모든 것을 신이라는 카페트 밑에다가 다 숨겨놓는 속임수처럼 느껴졌다. 오리구이를 먹으러 식당에 왔는데 코스요리를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체가 나오고 게속해서 음식이 나오는데 오리구이는 나오질 않는다. 이미 배는 부르고 더 뭔가를 삼킬 수가 없을 것같은데도 그렇다. 그리고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뭔가가 나오는데 살아있는 오리다. 오리를 직접 요리해 먹을 것같으면 뭐하러 식당에 나올것인가. 모르는 것은 전부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해결할 것 같으면 그냥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서양철학은 마치 요즘의 학교나 과학처럼 느껴졌다. 온갖 규칙들을 나열하지만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같았다. 이는 내 공부가 짧았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인생의 고비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면 철학은 왜 공부하는가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참선을 시도해 봤고 108배를 하는 것을 날마다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것도 했다. 신비적 경험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함석헌이 번역한 간디자서전에서 그런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는 간디의 말이 나오는 것을 읽고 그만두었다. 나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노자와 장자를 읽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신인이 있어서 그 땀방울로도 성인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도대체 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인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바가바드 기타와 노자는 읽기에 기분좋은 책이었지만 그걸로 나에게 뭔가가 도움이 된다는 느낌은 크게 받을 수가 없었다. 맹자도 논어도 중용도 대학도 그냥 그랬다. 누군가는 그런 책들이 인생을 바꿔준다는데 나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내가 받았던 인상은 서양은 그들이 최근에 이룩한 과학기술문명의 성취를 자랑하고 싶은 것이 전부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최근에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엄마가 철수는 사실 초등학교때부터 남달랐으며 태어날 때도 서광이 비추었고 철수의 증조할아버지가 일찍부터 법에 관심이 많았으며 철수의 10대조가 부처님에게 시주를 많이 해서 공덕이 쌓였는데 하는 식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들이 사법고시를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우리 아이는 역시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고 조상들도 특이한 공덕을 쌓아올린 것도 없으니 틀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법고시에 대한 자랑을 계속 듣다보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사법고시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사실 유럽의 철학사에서 조상운운 하는 소리는 그냥 하는 소리 아닐까? 그냥 역사라는 모래밭에다가 멋대로 선을 그어서 여기와 저기는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다고 하는거 아닐까?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과학기술문명의 역사가 없다는 말인가? 유럽이 언제부터 그렇게 문명적으로 발달된 곳이었던가. 

 

우리가 사극을 보면 음양오행 같은 걸 이야기하는 한국의 조상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개 그런 경우 그들은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어서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기의 철학이 어쩌고 하며 떠드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점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그런데 서양에서 숭상해 마지 않는 그리스인들은 대단한 찬사를 거듭해서 받다보니 마치 현대인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어리석고 미신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문명 특히 과학의 창조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어떻게 무식하고 미신적일 수 있는가. 서양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화이트헤드가 역대의 서양철학이 플라톤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가. 오늘 현대인중에 나는 플라톤보다 현명하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거나 불로 되어 있다는둥 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나 신탁같은 것에 귀를 기울였던 일에는 무심하다. 그러면서 서양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단칠정 운운 하던 이야기를 돌아볼 필요도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로만 본다. 

 

왜 일까? 그건 우리가 세상에는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이 고양이라면 그건 고양이이지 고양이이지만 개이기도 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당신이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으로서의 임무와 권리가 있다. 모든 부품은 제자리가 있다. 소달구지를 고칠때는 이쪽 부품을 가져다가 저쪽에 꼽는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포츠카를 만들때는 그렇게 할수 없다. 소달구지는 스포츠카에 비해 그렇게 높은 정밀성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사회, 특히 세상을 가득채우고 있는 서양문명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이것이 정답이면 저것은 쓸모가 없다. 뉴톤역학이 옳은 것이면 그전에 나왔던 중력에 대한 이론은 미신이며 뉴톤이 그 미신에서 눈뜨게 해준 것이다.  서양의 것이 옳다면 다른 것은 틀린 것이며 미신이며 무지이며 어리석음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며 본질주의다. 이름을 가진 것들은 혼동되지 않는 나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는 아니다. 심리학 실험을 하는 그림중에 젊은 여자의 얼굴로도 늙은 노파의 얼굴로도 보이는 그림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이리 저리 바뀌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 그림은 일단 한번 둘 중의 하나로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식으로 보게 되기가 힘들다. 두 사람이 이 그림을 보고서 동시에 아 젊은 여자, 아 늙은 노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그림을 두고 서로가 왜 다른 것을 보는지 이해를 못하며 젊은 여자의 그림을 잊고서 늙은 노파를 보는데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쌓아온 문명은 사물에 이름을 붙여서 정의하고 측량하면서 문명을 쌓아오는게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근래 서양은 그것에 특별히 뛰어나서 과학기술의 축적에서 지구의 다른 부분을 능가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의 축적은 동서양할것없이 전세계 모두에서 했던 일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전보다 가진게 많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나 할 것없지만 특히 서양에서 진리는 하나이며 이것이 이것이며 저것일 수 없다는 배중률적인 생각이 강하게 신봉되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등이 나오고 괴델의 정리가 발표되는등 여러가지 일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벌어지자 이러한 것은 기반을 잃고 말았다. 

 

양자역학은 기본부터가 확률적이다. 하나의 입자가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존재한다는 개념자체를 부인한다. 그것은 너무나 우리의 평상시 개념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뉴튼역학에서 그렇게 하듯이 머리속에서 상상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나의 입자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 그건 마치 축축한 불이란 말처럼 단어자체의 뜻으로 볼 때 자체모순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가 쌓아온 그 논리의 피라미드며 관념의 체계가 쓸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은 매우 편리한 것이며 인류를 부유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발명에 불과하다. 불과하다는 말은 좀 부당한 말일수 있다. 인간의 기계문명, 논리적 문명, 과학기술 문명은 위대한 것이다. 누가 수천년을 쌓아올린 탑을 보고 저것은 그저 뭐뭐에 불과하다고 쉽게 말한다면 그것은 오만한 행동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현대를 살면서 현대문명의 성과를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냉장고에 음식이 가득들었는데 자기가 채집한 것만 먹겠다고 하다가 굶어죽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

 

단지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것을 실제 그 자체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인간이 만든 틀이 듯이 인간의 문명, 인간의 관념도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틀이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현실 그 자체를 다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자본가라는 인간이 머리에 자본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게 아니다. 이세상에는 좌파라는 딱지도 머리에 붙어있지 않다. 사장이나 선배나 아내라는 직함이나 관계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바위를 보고 누군가 해골바위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의 눈에는 해골이 뚜렷히 보인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먼저 그걸 강아지바위라고 불렀다면 우리의 눈에는 강아지가 잘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바위는 고대로부터 언제나 해골이었던게 아니다.

 

국가도 한국문화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수백 수천년간의 조정과 개선을 통해 만들어져 내려온 것이 또한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와 언어속에 인간관계속에 깊이 적응되어져 있다. 긴 진화의 결과다. 그것을 쉽게 내버리고 급조한 싸구려 모조로 뛰어간다는 것은 현명한 생각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개개인들에게 아주 정밀한 부품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 자체가 거대하고 매우 효율적인 기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기계는 무서운 속력으로 바다밑을 파헤치고 바다를 메꾸고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수백층짜리 건물을 짓고 다리를 건설한다. 먹을 수없을 만큼의 식량을 생산하고 엄청난 수의 자동차를 생산해서 사람을 나른다. 북극에도 남극에도 사람을 보낸다.

 

문제는 더 편리해지고 더 강력해진 문명이 인간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필요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사로 일하는 철수가 아니라 의사인 철수가 되고 경찰로 일하는 철수가 아니라 경찰인 철수가 되고 부자로 살고 있는 철수가 아니라 부자 철수가 된다. 사회 속의 역할이 자신의 존재 의미 전부가 된다.

 

사회 혹은 문명이라는 기계에게는 어떤 인간을 대체할 다른 인간이 있는한 즉 교체가능한 다른 부품이 있는한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오직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부품의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을때만 그것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된다. 그러나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교체되어 버리고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그 한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큰 문제이다. 기계가 뭔지를 이해하고 인간으로 남는 것이 현대인들이 직면해 있는 문제이다.

 

마시던 생수병의 입구를 쳐다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오랜 만이다. 그렇다. 나는 그런 걸 원했었다. 뭐가 가치있고 뭐가 좋은 것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지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행복해지기 원했다. 다만 그 길이 힘들어서 가다가 말다가 하다가 그냥 그만둬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것처럼 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다고 하고 남들이 싫어하면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다.

 

여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 내가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한들 그건 좋은 일일까 어리석은 일일까. 좋은 일이긴 할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구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내 인생이 수렁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그녀에게 냉냉하게 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분명 어딘가에 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중의 하나이고 그녀는 우연히 만난 사람이다. 서로를 위해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분노를 삭힐 수가 없었다. 그걸 삭히기에는 뭔가가 너무 억울한가 보다. 그리고 그 분노가 그녀를 태워 없애고 있었다.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녀를 구원할 에너지도 아이디어도 없었다. 우리 둘이 서로 기댄다고 해도 그건 그저 두 실패자가 잠시 잠깐 위로를 받는 것이 될 뿐이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그녀가 내려야할 판단을 누가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영주는 벌써 다음역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러나 냉정하게 다음역이 내릴 역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녀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나는 한시간쯤 뒤면 영주의 밤거리를 혼자서 산책하거나 어딘가에 있는 여관방에서 혼자가 되서 내 인생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처럼 용기를 내고 힘을 내서 마련한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했다. 나는 자아의 정밀수술이 필요했다. 내 머릿속에서 자를 것은 자르고 붙일 것은 붙여야 했다. 그래서 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새차처럼 생생하게 활력에 차서 세상을 달려나가야 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미 닦아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이 어려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살아나가는 것이다. 그녀의 삶에 행운이 있기를. 나의 삶에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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