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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6 : 부모를 미워하는 죄

by 격암(강국진) 2009. 10. 5.

6. 부모를 미워하는 죄

 

남자들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지 않으면 이야기를 못하는 것 같아요. 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시던 커피 컵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몇번이나 그녀의 몸매를 훓어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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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영의 이력에 대해, 수영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떻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 사실 그녀와 나의 대화는 어떤 의미에서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식에 가까웠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라 독백에 가까웠다. 내가 요즘엔 비가 자주와요라고 하면 그녀가 나는 비오는 것이 좋아요하는 식의 대화가 아니라 그녀가 느닷없이 부모님은 어디사세요라고 묻는 식의 대화였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녀는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한다. 내가 하는 말과 그녀가 하는 말사이의 연관성은 상당히 아슬아슬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그 말은 그녀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솔직히 그다지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말하고 싶었고 누군가가 들어주면 그건 더 좋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같다. 그녀는 단지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스어로 우로보로스는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꼬리를 문 뱀이나 용의 그림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리스인에게 꼬리를 문 뱀은 탄생과 죽음의 결합이나 무한, 불사 그리고 시간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수영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꼬리를 먹어버리려는 우로보로스처럼 자기모순적인 문제로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주는 문제였다.

 

그녀는 그녀가 기억하는한, 그녀의 어머니를 평생에 걸쳐 미워했다. 그리고 그 미움은 늘어만 가는 것이었다. 그 미움이 그녀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녀는 이제 숨쉬기도 힘들어 질 정도라고 말했다. 부모를 미워하는 자식이란 금새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기 마련이다. 부모란 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은 종종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부모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나쁜 부모의 자식에게서 나온 나는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 내가 원망하는 부모의 나쁜 점을 내 내부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부모에게 던지는 칼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칼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세상에 쏘아올린 화살이고 세상에 던진 작품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의 성공은 부모의 성공이 되고 만다. 부모를 미워하는데 내가 잘 자라서 다른 사람이 역시 누구의 딸은 다르군요라는 말이 나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은 그런 것을 허락하기 힘들다. 자발적인 자기 파괴는 매력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원망스러운 부모에 대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원망하는 아이는 결국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는가를 묻게 된다. 부모를 물어뜯는 아이는 자기가 상처입히고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대단한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한 부모라도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 일단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람은 된다. 그 정도만이라도 감사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찾아보면 사랑할 구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기가 너무 쉽다. 어떤 부모들은 사랑하지 않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수영은 그런 복을 타고 나지 못했다. 일단 수영은 왜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엄마없이 아빠와 혼자 커야 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어딘가에 살아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

 

자라나면서 그녀는 친척들이 수근 거리는 소리속에서 문제는 생각보다도 더욱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추궁하고 수없이 몰래 엿들어서 정보를 모았다. 그렇게 모아진 정보를 통해 재구성된 그녀의 어머니는 한마디로 그녀의 아버지를 이용하고 버린 여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하지만 가난하고 인맥도 없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것이 문제였다. 지금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었겠지만 한국이 지금보다 가난하던 시절, 그녀가 원하는 것, 즉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그녀는 바로 그런 기회를 가지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를 유혹했던 것이다. 나중에 만나봤을 때도 그랬지만 젊었던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예뻣고 똑똑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자였다. 아마도 수영의 아버지는 그저 왕에게 간택받은 후궁처럼 순순히 그녀와의 결혼에 동의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는 조금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아뭏튼 수영을 임신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러정황을 생각해 보고 그녀가 이해한 그녀의 엄마를 생각해 보면 수영은 일종의 수단으로 태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부모님들의 결혼은 수영의 어머니가 학위를 받고 취직을 해서 독립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여지없이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달렸고 잔인한 소리를 듣고 잔혹한 취급을 받은 끝에 이혼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본래 능력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그 충격이었는지 모르나 박사 학위도 받지도 못하고 시시하고 조용히 살게 되었다. 단지 그녀를 키우며 늙어왔던 것이다. 

 

나중에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그녀를 찾기는 쉬웠다. 너무 쉬워서 엄마없이 살아온 긴 세월이 좀 어처구니 없이 느껴졌을 정도 였다. 수영이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을 때 수영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를 바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모녀지간중에서도 특이할만큼 그녀를 닮아있었다. 물론 그녀는 나이만큼이나 늙어있었고 무엇보다 어떤 성격으로 젊은 청춘을 보냈는가하는 것이 그녀의 얼굴에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선입견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그다지 수영에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흔적이었다. 그녀는 이기적인 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안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흔적을 아주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 그녀를 떠난 어머니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얼굴표정이며 말투도 그녀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분명 아버지는 자라나면서 자신을 배신한 여자와 비슷해져가는 딸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래동안 원망해 오던 엄마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힘들게 한 사람이, 자신과 이렇게 닮아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외치면서 불륜도 무릅쓰는 자유연애를 지지하는 그녀의 어머니, 진보적 논리를 이기주의적 목적을 위해서만 활용하는 그녀의 어머니, 명망있는 여교수로 살면서 정치 입문의 소문도 들리는 그녀의 어머니는 애초에 수영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스스로 자제는 했으나 수영은 어느정도 기대를 하며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수많은 험담을 미리 듣고 가기는 했으나 적어도 조금은 다른 설명이나 변명을 듣게 되기를 기대했으며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엄마없이 자라면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적어도 한두마디의 따뜻한 말을 기대했던 것이다. 적어도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는 그런 기대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왜 찾아왔는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려고 만나는 것에 동의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수영은 냉정하게 그저 조금 궁금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미움과 분노가 수영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더 증폭되었다. 수영은 미움과 분노 때문에 똑바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영은 빠르게 학교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볼 수 없는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어느정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녀같은 사람은 응당 인과응보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있다는 것이 가장 싫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기민한 머리를 칭찬하면 그녀의 엄마가 생각이 났다. 지성의 상징이라는 교수 자리를 차지한 엄마. 그래서 그녀는 때로 충동적이고 비 지성적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그런 면조차도 그녀의 엄마를 닮아 있는 것같았다. 사랑을 찾아 맘대로 불륜을 저지르는 충동적 연애를 즐기는 것이 그녀의 엄마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것이 그녀의 아버지를 비참하게 한 칼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그런 자신의 행태를 여러가지 사상과 예술의 형태로 교묘하게 숨기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있다고들 했다. 바로 가슴을 들어내고 허벅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보적 여성이며 동거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진보의 증거가 되는, 나는 자유롭지만 다른 사람의 불편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그런 정신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녀의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자신을 죄여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도 그녀안에 있는 그녀의 엄마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성공은 엄마가 준 재질때문인것 같았고 그녀의 실패도 엄마가 준 비극때문인것 같았다. 재능있고 집안좋은남자가 그녀에게 접근 했을 때는 아버지를 파멸시킨 그녀의 엄마가 행한 일을 자기도 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절대로 남자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남자에게서 이익을 탐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렇다고 사랑도 없이 아무와 결혼하거나 혹은 독신으로 외롭게 사는것 그 모두도 답이 되는 것은 아니였다. 그건 단지 그녀가 그녀의 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증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좌충우돌하는 끝없는 시도속에서 그녀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점점 비규격품이 되었다. 직장을 가볍게 때려치고 대담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엄마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조신한 처녀로 안정적 직장에 다니다가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이 그녀의 엄마에 대한 최고의 복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만은 정말 엄마로 부터의 피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문제였다. 남자들은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자들을 만나는 방식 때문에 성적인 매력으로 남자들을 이용하는 여자들을 경멸했다. 입으로는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남자들을 이용하는 여자들을 경멸했다. 그녀는 남자들을 인간과 인간으로서, 남녀의 관계를 빼고서 만나고 싶어했다. 사랑에 빠지더라도 적어도 한동안은 그럴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과 입술과 눈과 허리와 엉덩이를 의식하지 않는 남자란 열살이 안되는 꼬마들 뿐인것같았다. 따라서 그녀가 원하는 관계, 그녀의 엄마가 세상의 남자들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남자관계란 성립되지가 않는것이다. 처음부터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그녀를 먼저 여자로 봤다. 그리고 서둘러 그녀를 유혹하고 싶어했다. 그녀를 숭배하거나 단순히 사랑하거나 원망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든 그것은 여자로서 였다. 역시 이것은 그녀안에 있는 엄마의 피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정쩡하게 만나던 남자와 싸움을 하고 기차를 탔다. 어디로 가는가는 보지도 않았다. 그저 멀리 떠나고 싶을 따름이었다. 자신은 그 남자와 심각한 애정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을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간섭하고 묶어두고 싶어했다. 그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 남자는 자신이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도대체 뭘하며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튀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자신을 던져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싫었다. 답답한 마음이 극도로 그녀를 죄여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아니였다. 문제는 지쳐버린 자신이었다. 그녀는 순종적인 여자가 될 수도 없었고 그녀의 엄마같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여자가 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엄마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녀를 더 원망해서 더 많이 상처입는 일도 하기 싫었다. 수영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지쳐있었다.

 

그녀는 그날밤 처음부터 거리로 나서기로 계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거리로 나섰을 때 그녀는 거리로 내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다. 그녀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공기조차 사라져서 숨을 쉴 수도 없는 것같았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저주 받았다. 나는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빙빙 도는 우로보로스는 무한의 저주다. 무한의 저주. 그게 그날밤 거리로 나온 그녀의 느낌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알을 낳는 파충류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린 아이를 보면 귀여워하고 보호본능을 느끼는 포유류와는 달리 알을 낳고 가버리는 파충류는 아이에 대한 보호본능과 사랑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동족의 아이라도 먹어치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아이들일지도 모르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충류가 아니라 포유류이다. 그리고 포유류 중에도 아주 특이한 포유류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유아기가 길며 그 유아기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다. 어떤 다른 동물도 성체가 되는데 수십년이 걸리며 그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는 않는다. 알을 낳고 가버리는 파충류는 태어나자마자 알아서 생존해야 하고 포유류라고 할지라도 많은 경우 태어나서 몇 달이나 1년이면 성체나 다름없어 진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아이를 낳아 오랜동안 기르는 습성이 있다. 부모와 자식을 생이별 시키면 굉장히 괴로워하고 죽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인간에게 있어 팔다리나 마찬가지로 생생한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돌봐줄 사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 그 사람의 선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사람이 필요하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관념적 존재 이전에 생리적 요구로 묶여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포유류가 아니라 파충류에 가까운 모양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수영은 그녀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태도와 그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영은 분명 그녀의 피해자였다. 이럴거면 한 생명을 탄생시켜서는 안되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통 사악한 존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마치 파충류의 눈을 가진 것 같은 외계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존재다.

 

인간은 정을 나눌수 있는 곰이나 개 같은 포유류는 귀엽다고 느낀다. 그럴수 없는 뱀 같은 파충류는 사악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기계적 논리는 사람과 파충류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서양쪽 사고에 빠진 사람에게 심하다. 수학적 지성에게 파충류와 포유류의 차이는 강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피타고라스 정리는 인간에게 옳은 것일뿐 아니라 뱀에게도 옳다. 시시비비를 따지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고 따라서 그 논리적 결론도 그같은 가정을 가지고 있기 쉽다. 모든 개인은 평등한 관계로 생각히는 것은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부모나 자식도 다른 인간들과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결국 또 다른 인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은 똑 같은 기계 부속품이 아니다. 부모는 대체되지 못한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대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들었을 뿐이며 듣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가끔 의례적인 말을 한두마디 했을 뿐이다. 나도 지쳐있었지만 그녀도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끝없이 반복되는 제자리 맴돌기를 오랫동안 한끝에 그녀의 내부는 이러저리 얽힌 실처럼 꼬여버렸다. 옳고 그른 것과는 상관없이 그 안에 잠자고 있을 감정적 에너지가 단지 몇마디의 말로 한순간에 증발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뭔가 제공해야 한다면 그것은 시시비비를 따져 논리적으로 옳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신뢰를 할 수 있는 존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그 꼬인 틈 사이로 들어가 그녀를 구해올 에너지가 있는가는 물어볼 가치도 없었다. 나는 그런 에너지가 없다. 나는 내 인생을 추스리는 것도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그녀에게 나는 너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건방진 것이다. 그것은 언덕도 올라가본적이 없는 사람이 만길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온 사람에게 아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전통적이고 사랑할 수 있는 부모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대학교수도 아니고 미국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해체주의니 페미니즘이니 진보니 하는 말따위는 알지 못하지만 아들이 소풍을 간다고 하면 새벽에 일어나서 김밥을 만들어 주던 사람이었다. 아들의 집에 오면 그럴 필요없다는 데도 바닥을 쓸거나 빨래거리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였다. 별거아닌 외식한번 시켜드리면 대단한 효도라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워 하는 어머니다. 내가 수영에게 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벌받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느라 힘든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즘 세상이 주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조언은 이런 식이기 쉽다. 엄마도 역시 하나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때문에 슬픈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그녀때문에 인생을 망쳐서는 안되는 일이다. 잊어버리고 털고 일어나야 한다. 엄마대신에 누구 다른 사랑할 사람을 찾으면 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자유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런 조언은 옳지 않다. 그녀는 엄마를 부인하거나 그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대신에 엄마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결여한 스스로를 크나큰 결점을 지닌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나 다리가 하나없이 태어난 사람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물론 이미 스스로 나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나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것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장애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도 할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할수 있는 일이 있고 장애가 있어도 행복하게 살수가 있다. 그녀는 거기서 출발해야 할것이다. 엄마의 문제를 쉽사리 떼어낼 수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모든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뭔가를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흉악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암이며 당뇨에 걸리기 쉬운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떤 사람은 꼭 수학자가 되고 싶거나 음악가나 소설가가 되고 싶은데 그런 재능이라고는 조금도 가지고 태어나질 못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것은 나중에 화려한 청춘을 보내거나 성공한 중년신사가 된다고 해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집에서 태어난 반면 어떤 사람은 가난뱅이의 자식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기가 불가능한 부모를 가지고 태어난 반면 어떤 사람은 미워하지 않기가 불가능한 사람을 부모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저런 장애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게 별거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숨기고 있을따름이거나 불쌍하게도 자신의 장애는 보지 못하고 남의 장애만을 볼뿐이다. 

 

스스로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장애인 것을 숨기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한다. 마라톤대회에 출전하는 다리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나 그녀는 다리가 없어도 남들만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나는 정상인이다, 나에게는 장애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다리없는 사람은 다리없는 사람의 행복을 찾으면 되는거 아닐까? 누군가에게 누구이상이라는 것을 보이고 정상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을까? 수영은 뭐든지 난 엄마가 없기 때문에 이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과 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엄마로 뒀지만 뭐든지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서 그걸 증명하려고 하는 것 사이를 맴돌았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문제는 보다 더 광범위한 소위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과 연관되어져 있다. 자기가 속한 가정, 자기가 속한 집단, 자기가 속한 나라에 대한 부정과 상처입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세상에서 아주 흔하게 본다. 그녀의 경우는 부모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부정하고 살아가는 교포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상처입힐수록 문제는 반복된다. 그들은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존재가 되서 가치관의 혼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기 혐오의 늪 주변을 서성거리게 되거나 거기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을 모르던 교포들중에는 자식들에게 한국어도 가르치지 않았던 사람들이 과거에는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심한 장애를 갖게 된다. 미국인인것이 한국인인것보다 위대할 것은 없다. 한국인인것이 미국인인것보다 위대할 것도 없다. 문제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은 이 땅에서도 일어난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아무리 부인해도 우리의 역사다. 과거에 대한 상처입히기는 무한반복의 저주를 시작한다. 우리의 부모가 잘나지 못하고 실상 모자라고 괴팍하고 부끄러운 면이 있다고 해도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부모를 감싸안을 수 없는 사람은 장애만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잘 살수 있다. 한국 역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나라는 역시 모든 면에서 멀쩡한 나라였다며 무리해서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역사를 비참하게만 바라보는 것도 아닐것이다.

 

나는 이제 너무 지쳤어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수영은 울었다. 우는 건 반칙이다. 모든 논리를 멈춰서게 한다. 그녀는 분명 절박할 것이다. 그녀는 분명 나이기 때문에 뭔가를 이야기하고 자신을 들어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빠졌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주변에 외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아니 도와달라고 외친다기 보다는 엄마를 미워하는 미움에 스스로가 깔려서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어하는 것에 가까운 것같다.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고통 때문에 비명이 저절로 스며 나오고 있다.

 

그녀는 온세상에서 여기 움직이는 기차의 좌석한칸 말고는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나는 그녀에게 묘한 동지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기차는 종착역까지만 달리면 멈출것이고 그녀는 어디론가 가야할것이다. 갈 곳이 없다면 그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것이다. 그녀가 딱해 보였다. 울고 있는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렇지만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렇게 손을 올리고만 있었다. 그녀의 옷을 통과한 그녀의 온기가 손에 느껴졌다.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그녀의 몸에서 뜨거운 증기라도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차는 덜커덕 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침묵을 지켰지만 이제 우리는 꽤 가까워진 느낌이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영주에서 내린다고 말해두었다. 그리고 영주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그런데 그녀를 이런 채로 그냥 보내야 할까? 헤어지기에 꺼림직할 만큼 우리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문제를 내게 털어놓을 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표현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둘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때문일 것이다.

 

기차가 덜커덕 거릴 때 마다 가슴의 어느부분인가가 조금씩 아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울고 있다. 나는 창밖을 쳐다보는척 하면서 차창에 비친 내얼굴을 보고 있었다. 내가 내릴 때까지는 그녀의 울음은 멈출 것인가. 그녀를 그냥 보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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