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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3 : 잘못된 교육

by 격암(강국진) 2009. 8. 18.

3. 잘못된 교육

 

축제가 끝나던 어느날 나는 불꺼진 운동장에 들어누워 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나라는게 싫었다. 뭔가 다른 사람 더 훌룡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박사를 받으면 그렇게 되는 걸까, 교수가 된다면 그렇게 되는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딘지 모르게 이미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    *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날, 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것은 고된 입시생활에 대한 보상이고 성취였으며 대학은 나의 왠지 모를 답답증을 날려버릴 구원의 장소라고 여겨졌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것은 물리학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몇 개의 간단한 원리에서 설명해 내는 학문이기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몇 개의 힘밖에는 없다. 약력, 강력, 중력, 전자기력밖에는 없다. 세상에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밖에는 없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말들을 배울 때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분명 물리학이었다. 나는 중학교때 이미 물리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주는 학문은 물리학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학교공부는 힘겨웠지만 나는 열심히 했다. 몇백페이지나 되는 일반물리학책을 영어로 읽다가 도서관에 가면 나는 종종 힘이 빠졌다. 당시의 나로서는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영어들을 읽다보면 몇시간을 공부해도 몇페이지를 읽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로서는 단 한권의 책을 공부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도서관에 가면 책이 셀 수없이 많았다. 가끔은 그 책들사이에 앉아서 그저 멍하니 있었다. 이게 다 뭔가. 나는 이것들을 언제다 공부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곧잘 밤을 샜다. 어려운 숙제를 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고 기숙사 휴게실에 앉아서 황당한 주제를 떠드느라 그러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주제 같은 것을 가지고 밤새 떠들었던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밤에는 술을 먹으면서 밤을 새웠다. 그러나 나는 수업을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물리학과는 수학과와 더불어 모든 학과에서 가장 많은 수학을 배우는 학과였다. 나는 벡터적분학, 선형대수, 복소함수론, 수리물리, 미분방정식을 배웠다. 방학때도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내 성적은 들쭉 날쭉이었다. 어떤때는 강좌를 듣는 학생들 누구보다도 더 잘했고 그러다가는 평균이하의 평범한 성적을 받기도 했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내가 물리학을 좋아했던 것은 단순히 직업을 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나 인간에게 편리한 뭔가를 만든다는 식의 이익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물리학이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를 바랬다. 물리학이 내가 있을 장소이기를 바랬다. 이 세상이 쉬뢰딩거 방정식으로 풀어낼 수는 없는 곳이라고 해도 나는 내가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가 지배하는 장소에서 살게 되기를 소망했다.

 

나의 물리학에 대한 열정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의 희망이 무너지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나에게 경고음을 날린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듣는 일반물리학 강좌였다. 나는 이유없이 외우는 고등학교때까지의 물리수업에 질려있었으므로 이제 대학교수에게서 세상의 진리에 대한 명쾌한 해설을 들으리라는 낙관 속에서 물리학 강좌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듣는 것은 실제로는 고등학교때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고 나는 깨끗한 머리를 가지게 되기는커녕 더더욱 복잡한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힘이 질량과 가속도의 곱과 같다는 뉴튼의 법칙을 대학교에서 새로 배울 때 내 마음속에는 온갖 질문이 솟아올랐다. 질량이라는 것은 뭘까. 가속도는 시간과 거리로 정의되는 것인데 시간은 어떻게 정의할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도서관을 뒤졌지만 결국은 자꾸 포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내가 그만큼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내 영어실력으로는 정확한 관련서적을 찾아도 그걸 수업을 들으면서 쫒아갈만큼 빠르게 읽어낼 수가 없었다. 관련서적들은 금방 전화번호부 몇권의 분량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개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면 질문은 자꾸 늘어만 갔다. 이것은 처음부터 이길 희망이 없는 게임이었다.

 

그래서 불만스럽지만 대학에서 조차도 공부는 이해보다는 암기를 하는 쪽으로 변질되어져갔다. 왜 그런가하는 것은 나중에 공부하기로하고 일단은 그렇다고 외우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사물의 본질을 알고 싶었던 나는, 물리학이 우리에게 본질을 가르쳐 준다고 믿었던 나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것은 학년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으며 대개의 경우 우리가 배우는 것은 여러가지 물리학 문제를 푸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진동자문제에 대한 양자역학적 해법을 풀어놓은 챕터를 통째로 줄줄 외울 수 있으면 훌룡한 점수를 맞는것이다.

 

보다 큰 경고음은 슈퍼대칭이라는 것에 대한 세미나를 들으면서 발생했다. 입자물리학에서 슈퍼대칭성이란 여러 개의 입자들을 연결짓는 수학적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그 슈퍼대칭성이라는게 깨끗하게 수학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외를 두는 경우가 있다. 그 당시 많은 학생들처럼 나도 대학에 입학할 때는 입자물리학을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세미나가 진행되면서 내 마음은 급속도로 식었다.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것이 아름다운 수학일지 모르지만 내 관점에서 물리학은 이제 매우 지저분해 보이게 되버렸다. 전혀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않았고 가정없이 몇 개의 원리에서 결과들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입자물리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통계물리학을 전공한후 인공신경망을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버렸다.

 

지금와 돌아보면 내가 받았던 교육에는 매우 바보 같은 면이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바보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충분히 똑똑하지 못했던 때문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아마 둘 다일것이다. 그들이 좋은 교육을 시켜도 나는 편식을 했을 수도 있고 내가 제대로된 의문을 가졌어도 그것이 억눌러 졌을 수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받았던 교육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반적으로 학생의 머릿속에 더 더 많은 지식을 쓸어담아 넣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 지식들을 연결짓거나 지식들을 주렁주렁매달리게 만들 주요한 뼈대에 대한 교육이 없었다. 그런 것은 노예나 사기 당하기 쉬운 얼간이를 키우는 교육이었지 진짜 교육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방식으로 설명이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내가 익숙한 컴퓨터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컴퓨터 산업의 큰 목표중의 하나가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나오자 마자 사람들은 인간처럼 지능을 가진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를 바랬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가져야 할 중대한 성질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일반화 능력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가능한 모든 상황을 써놓고서 그 각각의 경우에 컴퓨터가 해야할 일들을 그저 나열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그 목록에 없는 일이 발생하면 고작해야 무능을 고백하거나 에러라고 화면에 경고문을 띄울 뿐이다. 아니면 그도 못하고 기계가 멈춘다. 

 

일반화 능력은 주어진 데이터에서 어떤 규칙을 찾아냄으로서 만들어 진다. 보다 뛰어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기계학습 프로그램은 이 규칙을 찾아낸다. 그래서 경험된 데이터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럴듯한 답을 추론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20세기 후반 머릿속의 신경세포가 하는 일을 흉내내서 만들어진 인공신경망이 연구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저절로 원칙을 찾아내는 기계가 나왔다면서 곧 인간같은 지능을 가진 프로그램이 만들어질거라고 기대에 부풀었다. 이것이 기계학습이라고 불리는 분야다. 

 

그런데 규칙을 찾는다는게 문제다. 주어진 데이터를 만족시키는 규칙은 사실 무한대로 많다. 그 많은 규칙중에 어느 것이 좋은 것인가.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선택규칙이 도입되는데 이것은 주어진 데이터를 만족시키는 규칙중에서 가장 간단한 규칙이 제일 좋은 규칙이라는 선택 원리다. 

 

아 그럼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최소한 두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 문제는 창의력이라던가 지능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만든다. 한가지 문제는 노이즈 혹은 소음의 문제다. 현실적으로 데이터는 항상 노이즈를 가지고 있거나 틀린 정보를 포함한다. 예를 도둑이 누구인지를 추리하는 문제에서 여러가지 단서가 주어졌는데 그 단서중의 하나는 틀린 단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증인중의 하나가 잘못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주어진 데이터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는 규칙이 항상 최고의 규칙이 아니다. 어느 정도 오차범위를 주고 간단하게 대부분의 데이터를 잘 설명해 내는 규칙이 좋은 규칙이다. 그런데 이 기준이 애매하다. 규칙을 찾는 기계를 만들 수 있어도 우리는 좋은 규칙이 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며 그래서 기계가 데이터를 혼자 학습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소위 국소적 최소점문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몇개의 좋은 규칙을 찾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훨씬 좋은 규칙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 규칙을 찾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어도 규칙을 찾는 처음에는 세세한 것을 무시하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적절해 보이는 규칙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최고의 답을 조금씩만 개선해서 더 좋은 답을 찾으려고 하면 그런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조금만 바꿔보면 항상 지금의 답이 더 훌룡한 답이 된다. 때로는 벽을 넘는 비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비약이 반드시 획기적인 결과를 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국소적 최소점의 문제다. 

 

생각해 보자. 아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쉽게 다량의 지식이 주입된다. 말하자면 지식을 스스로 이해한다기 보다는 이해를 하는 방식조차 주입된다. 수많은 참고서가 있고 수많은 학원이 그런 일을 한다. 이것은 아이들을 기계학습 이전의 저질 프로그램처럼 만든다. 그들은 그들이 외우고 있는 문제와 답들 중에서 질문이 들어오면 빨리 답을 말할 수 있다. 시험에 배우지 않는 것이 나오면 학부형들이 나서서 고소라도 할판이니 시험에 그런 질문은 없다. 그러나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이 들어오면 바로 에러를 내거나 고장이 난다. 전혀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며 이것은 거꾸로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그렇다. 일반화능력이나 적응력이 떨어진다. 답을 외워서 시험문제를 푸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가운데 본래 가지고 있던 지능의 어떤 한 쪽이 오히려 퇴화 된것이다. 

 

현대 교육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알수 있는 방법은 조선시대의 교육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결코 조선시대의 교육이 현대교육보다 모든 점에서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그시대는 서양학문이 들어오기 전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이 행해지기 전이었다. 서양식의 사고방식 특히 어설프게 이해한 서양식의 사고방식에 기반한 교육의 해악이 행해지기 이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옛날 교육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책이 몇권 없다. 게다가 글자도 몇개 안된다. 노자나 대학 중용을 보면 작은 글자로 쓰면 몇페이지면 끝이 날정도다. 그걸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아인쉬타인이 썼다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중고등학생때부터 읽고 읽고 또 읽어서 그 안의 숨긴 뜻을 알아내려고 버둥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때는 종이가 비쌌다라던가 그때는 사람들이 무식했다라던가 그때는 주자나 공자같은 사람을 신처럼 섬겨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쳐놓고 그런 교육이 지금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럼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가를 좀더 쉽게 알 수 있다.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인의 말씀을 읽고 또 읽는다. 줄줄 외우지만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당시에 책이란 당연히 수백 수천번을 읽고 새겨야 하는 것이며 공부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아이는 일종의 수련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나름대로 답을 찾는 수련을 하는 것이다. 공자 해석이라는 교과서를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거치면서 줄줄이 외워서 드디어 대학에 가서 논어를 보는 그런게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교육이란 일종의 수련이었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더 많이 강조점이 있었던 것같다.

 

장자와 노자를 십년을 읽는다. 그래도 뭔가 이해못한 뜻이 있는 것같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뜻이 이해되고 내가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이해한다. 고전을 자주 읽는 사람은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한다. 이것은 인공지능 연구에서 국소적 최소점 문제를 해결한 것과 비슷한다. 최소한의 정보를 가지고 여러각도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니까 그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교육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까지 세세하게 길을 닦아 놓고 그 길로 가라고만 한다. 그 길은 지름길일지 모르지만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으로 가는 길이고 모두를 똑같이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너무 많은 정보를 따지고 보면 독단적으로 주어진 학교선생님의 관점으로 해석해서 머리를 채운 아이는 이제 창의력을 잃는다. 이제 스스로 길을 찾는 능력이 사라진다.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서 답을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답을 알고 있는 경우는 많지만 세상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는 반드시 아니 매일같이 답을 모르는 새로운 상황에 부딛히게 된다.

 

우리가 수사를 하고 있다고 해보자. 현실에서는 증인중의 하나가 거짓말을 했다가 답일 수 있다.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은 이런 '아웃 오브 박스'식의 발상이 안나온다. 학교시험지에서 그렇다는 것은 선생님이 문제를 낼 때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기성 시스템에 대한 권위를 학습한다. 그 권위는 틀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아이들은 사회로 나가서 이용당하기 딱 좋은 사람으로 큰다. 그리고 소위 창의력이라는 것을 발휘하는 분야에서 좋지 않는 사람으로 큰다. 이런 걸 생각했을 때 어려운 것을 읽고 스스로 이해할 때까지 생각하는 것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의 교육이 오히려 장점이 있는 면도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많은 지식을 아이들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교육은 오히려 아이의 중요한 능력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철학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정작 많이 이해하거나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을 시도는 했었다. 칸트나 니체를 이해 한다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머리를 긁적이며 읽었던 적은 있다.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어정쩡한 위치였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에 꼭맞아서 움직이는 훌룡한 부품도 되지 못했다. 훌룡한 학생인가 하면 바로 엉터리가 되었다. 내게는 세상의 뭔가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이 항상 있었다.

 

대학원 석사 시절에 전자기학 시험이 생각난다. 나는 중간고사에서 만점을 받았는데 그 시험은 나말고 다른 학생들은 점수가 상당히 낮았고 나말고 강좌가 개설된 이래 만점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한 것같다. 그러나 나는 기말고사에서 평균도 안되는 점수를 받았다. 뭔가 공부가 그 시험을 백점을 받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던 어느날 나는 불꺼진 운동장에 들어누워 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나라는게 싫었다. 뭔가 다른 사람 더 훌룡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박사를 받으면 그렇게 되는 걸까, 교수가 된다면 그렇게 되는 걸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딘지 모르게 이미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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