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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2 : 복잡한 세상

by 격암(강국진) 2009. 8. 18.

2. 복잡한 세상.

 

수영이 준 귤은 달았다. 귤은 맛있고 수영은 아름답다. 우리는 기차위에 있고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다. 삶이 이렇게 단순한 거라면 오죽 좋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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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단조로운 열차의 덜컹거리는 소음만 들려오고 있었다. 단조로움이 축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이렇게 열차안에서 속박되어 있을 때가 가장 자유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서, 뭔가를 걱정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는 스스로가 이해와 걱정의 중독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 생각이 없고 풀 수 있다는 희망이 없을 때조차도 누군가가 나에게 문제를 던지면 나의 머리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고, 내가 어떤 대접을 받고 하는 문제도 결국 일종의 미래예측문제가 되버리고 만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렇게 머릿속은 이런 저런 문제로 잡다하게 가득 찬다.

 

우리는 항상 미리 미리 계획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여러가지 일을 미리 생각하고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빌어먹을 세상은 왜 이렇게 복잡할까. 그렇게 자명해 보이는 조언만큼 말도 안되는 조언이란 세상에 없다.

 

나이가 들고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취직도 하다보면 우리는 점점 우리의 세계와 삶이 세간이 가득 찬 좁은 다락방처럼 느껴지게 된다. 한마디로 숨쉴 곳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의 친구가 남미의 에콰도르에 산다고 하자. 전에는 나는 에콰도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 거기 한명의 친구가 산다. 신문을 보다보니 에콰도르에서 자국의 화폐정책을 바꾼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럼 나는 그 기사를 세밀히 읽는다. 에콰도르 경제니 정치니 하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나는 어릴 때는 세계대공황이 뭔지 몰랐다. 기축통화라는 말이 뭔지 몰랐으며 플라자 합의니 하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이젠 그런 이야기를 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음모론적 기사가 나면 어 이러다가는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정보를 인터넷에서 접하는 요즘은 머릿속이 조용할 날이 없다. 부모님 생각을 하다가 친구생각을 하다가 세계 정세를 생각하다가 직장의 미래며 직업상의 연구를 생각하는 일로 이리저리 왔다간다한다. 인터넷도 없고 시외전화요금도 비싸던 시절은 좋았다. 당신은 당신들이 알고 지내는 부모형제, 친척이며 친구들에게 왜 연락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았도 좋았다. 이제 당신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당신이 관심이 없어서다. 변명할 수 없다. 당신은 어느날 문득 한달동안이나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낸다. 스위치 한번만 누르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당신은 한달에 한번도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죄책감이 솟아 오른다. 그러고보니 얼마나 많은 친구며 은사며 선배며 후배들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채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던가. 항상 숨을 헐떡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바뻣는데 말이다.

 

나는 화장실에 있을 때 매우 자유로워 진다. 화장실은 아주 단순하다. 화장실에서 나는 별다른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손에 마침 책이 있다면 그걸 읽는 것 이외에 뭘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는 것, 내 손이 닿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것은 나를 걱정시키지 않는다. 화장실에 앉아있다는 부자유가 내가 무한한 수의 질문속에 질식하는 것을 막아준다.  부자유가 바로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화장실에 영원히 앉아있고 싶다.

 

핸드폰은 무수한 인간들을 자유롭게 하고 그만큼 부자유스럽고 긴장하게 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도망갈 곳이 거의 없다. 더 편리해진 환경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그만큼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에서 탈출하는 것은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더 힘들어진다. 어떤 나쁜 놈이 핸드폰을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보다보니 그건 나같이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나역시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열심히 기여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대표주자는 바로 이 미디어라는 놈이다. 누구나 더많은 정보를 머리에 쑤셔박는 것이 골치아픈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세상을 살자면 더 옳은 판단을 내리자면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 . . 그렇던가?

 

그러고 보니 그것조차 참이 아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상쾌한 봄날이 기대대되는 새벽 3시에 당신은 순이와 철수가 사는 옆집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발견한다. 새벽3시에 철수는 깨어있는 법이 없으므로 아마도 그것은 순이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목소리는 여자특유의 높은 톤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신은 그것이 거의 순이의 목소리일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순간 당신은 그 목소리가 개새끼라는 상소리를 말하는 것을 듣는다.  순이나 철수나 욕을 잘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철수라면 욕을 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만 당신은 순이가 상소리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 때문에 이것은 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이젠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위에서 말한 예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떤 정보가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상황이다. 그 목소리가 욕을 하는 것을 듣기전에는 우리는 우리의 판단에 대해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상소리를 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들었기 때문에 그게 누구인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된것이다. 즉 보다 많은 정보는 언제나 불확실성을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에 대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의 정부는 인기가 있는가 없는가, 지금 주가가 올라갈까 아닐까. 부동산 거품은 꺼지는가 아닌가. 당신은 정보를 끌어모으고 그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어한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언론의 보도란 아주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다. 문제는 당신이 과연 그것들로 부터 정보를 얻는가 아니면 정보를 잃어버리는가 하는 점이다.

 

언론은 당신에게 가능성이 적은 일에 대한 옳은 정보를 제공함으로해서 당신이 가지는 불확실성을 증가시킬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 보도라고 해도 그것이 당신이 세상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크게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거짓보도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미디어는 크건 작건 나름대로 사실을 선택해서 보도한다. 따라서 모든 미디어가 사실보도만 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세상에 가지는 불확실성을 증가시킬수가 있다.”

 

세상은 크고 복잡해서 우리가 직접 가서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미디어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의 인식을 더욱 더 불확실하게 만든다면 우리의 마음이 온통 불안으로 가득 차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요즘 세상에 불확실한 것은 물질들만 그런게 아니다. 요즘은 인간들도 인간관계도 불확실한 유령같이 보인다. 세상이 너무 편해졌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옷이며 컴퓨터에서 집과 자동차는 물론 우리가 소비하는 정보들, 신문, 방송, 인터넷 뉴스들은 친구가 주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워낙 복잡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과도 비교할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친구를 대체하는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사람들이 오직 이웃과 만나고 대화함으로서만 인간적 유대의 즐거움을 누릴수 있었을 때 사람들은 각자가 타인에게 친구로서 쓸모가 있었다. 친구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함께 놀아도 주고 밥도 같이 먹어준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씩 시스템에 의해 개량되었다. 그 결과는 어린 아이들에게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즉 더이상 그들은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놀지 않는다. 인터넷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쓰면서 논다.

 

우리는 기계가 애인을 대신해주는 시대를 상상하지만 사실 현대적으로 합리화된 연예, 매춘 시스템은 기계나 마찬가지다. 가장 아름 다운 모습으로 당신을 향해 고백하고 웃어주는 남녀 연예인들은 도대체 뭘 위해 봉사하는 걸까? 매춘 장소에 가면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가 존재한다. 그 여자는 물론 연기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녀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시스템의 일부고 기계의 부속품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매춘이나 연예산업이나 가상 현실 캐릭터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것도 그렇다. 원나잇 스탠드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은 과연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일종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언제든지 다른 사람과 대체될 수 있는 존재로 서로를 인식할 때 우리는 진짜로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시스템이 제공하는 상품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친구로서 연인으로서의 인간이 시스템의 상품들에 의해 대체될 때 인간의 유용성내지 의미는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만다. 연애를 하기보다 스타의 사진집을 들여다 보고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몰두하는 세대에게 이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인간관계에서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서로 서로 주고 받는 도움이 있고 역할이 있다는 것은 그 인간관계의 내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다. 백년전 엄마라는 존재는 옷을 만들고 모든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에 관한한 모든 일을 담담하는 존재였다. 즉 엄마표 옷이 있고 엄마표 음식이 있고 엄마표 인테리어가 있었고 엄마의 교육이 있었다. 오늘날 과거 엄마가 하던 모든 역할은 서비스로 대체된다. 슈퍼와 대형매장과 학원들과 컴퓨터 게임들이 엄마를 대체한다. 엄마들이나 혹은 아이들은 너무 바뻐서 서로 얼굴볼 시간도 없다. 물론 그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부모가 돈을 내는 역할 말고 다른 일이 없을 때 부모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과거에 비해 오늘날 서비스와 상품이 많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더더욱 빠른 속력으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걸 사회의 진보라고 보통 부른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부자나라로 사회가 변해가면서 그런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인터넷과 핸드폰과 자동차가 일상화된 나라에서 남과 같아서는 그 사업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서비스내용이 똑같다면 1등이 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달라져야 하고 더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더욱 전문적인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 보통사람은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기도 힘들만큼 말이다. 핸드폰 서비스를 공부하다보면 무슨 연구를 하는 것같다. 베개하나를 사려고 해도 이젠 아주 넓고 복잡한 세상이 있으며 커피하나를 마셔도 그렇고 차를 사는 것이나 관리하는 것도 물론 그렇다. 우리 앞에 놓인 두세가지의 보험 서비스가 아니라 백개나 2백개의 서비스 앞에서 우리는 뭘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한다.  

 

세상이 유령처럼 흔들리고 사람들도 유령처럼 보이는 세상은 엄청나게 복잡해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시골에서 복잡한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나 낯선 곳으로 해외여행을 온 사람처럼 우리는 우리의 나라, 우리의 도시, 우리의 집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가 되가고 있다. 인간관계가 서비스에 의해서 대체되고 세상을 꽤뚫어볼 힘이 없어서 일방적으로 특정 미디어를 믿게 되는 사람은 갇히고 세뇌된 존재다.

 

그래서 복잡한 나라 잘사는 나라는 대개 여행이 인기가 좋다.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곳에 혼자 있게 된다. 그럼 비로소 나는 머릿속을 깨끗이 비울 수가 있다. 한가지 문제에 집중하거나 머리를 쉴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혼자서 기차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여행이 이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여행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너무 누적되었고 나는 너무 오랜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쉬질 않고 놀기만 했다. 피곤한 뇌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내가 나의 문제점이며 여행의 장점을 생각하고 머리를 쉬게 만드는 이런 저런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내가 그녀의 매력에 빠져서 한동안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볼 정도로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거꾸로 내가 그녀와의 동석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여자와의 즐거운 한 때가 아니다. 그리 쉽지는 않지만 나는 내 몸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다. 그녀가 아름답게 느껴질수록 나는 마치 호랑이를 옆좌석에 둔것처럼 불편했다.

 

아가씨가 문득 나에게 자기가 먹으려고 꺼낸 귤들 중 하나를 건냈다. 그리고 먹지 않겠는가라고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어디에 가는가 혼자 여행하는가 같은 뻔한 질문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시켰다. 그녀의 눈동자며 미소가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 아가씨의 이름은 수영이었다. 그녀는 본래는 서울에 사는데 최근에 경주로 내려와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단다. 지금은 동해에 있는 친척집에 간다고 한다. 나는 내가 영주 부석사를 구경하러 가는 참이라고 말해줬다.

 

수영이 준 귤은 달았다. 귤은 맛있고 수영은 아름답다. 우리는 기차위에 있고 누굴 만날사람도 할일도 없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오죽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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