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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철학을 위한 여행

철학을 위한 여행 8 : 실존적인 결말

by 격암(강국진) 2009. 10. 21.

8. 실존적인 결말

 

“아니. 사지 마세요.” 사과를 사려는 나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사과를 파는 할머니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거 나한테는 너무 많아요. 같이 먹지 않을래요?” 그렇게 말하는 아가씨의 뒤로는 논두렁이 펼쳐지고 나비가 날고 풀잎이 흔들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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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석사를 올랐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전파하던 절이며 화엄종은 화엄경을 주요 경전으로 하는 종파라서 화엄종이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현상은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어 상호의존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부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이 여행은 그냥 여행인가요. 아니면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건가요?”

 

“음. 실은 고민이 있었죠. 지금도 없는지는 모르겠고. 다만 나한테 뭔가 충고를 하고 싶어서 충고할 것을 찾아떠난 여행이랄까요. 뭐 그런 여행이었죠.”

 

“그래서 충고할 것은 찾으셨어요?”

 

“글쎄. 두가지쯤 찾은 것같은데 들어볼래요?”

 

그녀는 말없이 긍정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들어보면 흔한 말들이예요. 어디선가 들었던거 같은 말들. 그리고 두가지지만 사실은 같은 말들이죠. 내가 나한테 하는 첫번째 충고는 나를 정의하지 말라는 것이죠. 내가 뭐뭐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단지 뭐뭐인 인간이 되고 마니까요. 내가 나를 재능이 없는 인간, 다리가 하나 없는 인간, 가난뱅이, 천재적 과학자, 뛰어난 운동선수, 큰 회사의 사장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단지 그것들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마니까요.

 

과거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를 무엇이었던 인간, 무엇인 인간, 무엇이 될 인간 같은 것으로 부르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실수를 해버리게 되는 것같아요. 하지만 그실수가 뭔지를 정확히 밝히면 그것자체가 우리는 뭐뭐뭐다라고 말하는 것이 되버리고 마니까 그 실수를 말할 수는 없죠.

 

그래도 그 실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느낄수가 있어요. 나는 분명히 변하고 있어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어린 시절 꼬맹이때의 나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생각이죠. 지금도 나는 변하고 있어서 내일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겠죠.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르다는게 뭔지를 정확히 밝히면 그건 단지 더 커진다던가 더 좋아진다던가 더 나빠진다던가 하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건 옳다는 느낌이 들지 않죠. 지금의 나를 정의하지 않고 내일의 나를 정의하지 않는데 둘이 어떻게 다르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어요.

 

더구나 다르다는 말도 어떤 의미에서는 옳은지 알수 없어요. 나는 어릴때나 지금이나 미래나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건 그저 나일 뿐이다라는 말도 옳다고 느껴지니까요. 나는 내가 사장이 되고 유명한 학자가 되고 가난한 책방주인이되도 그저 나일 뿐이라는 말도 옳다고 느껴지니까요. 나는 달라지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느낌이죠.

 

나는 달라지지만 그 달라지는 것이 뭔지 분별하지 않는 것, 다르다와 다르지 않다 이전의 것이 필요한 것같아요. 그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지 않는 것이죠. 나는 뭐뭐뭐다라고 정의해서 나를 단지 뭐뭐뭐 일뿐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죠.”

 

수영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예를 들어 수영은 엄마없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이렇게 근사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계속했다.

 

“두번째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를 살라는 거예요. 많이 들어본 말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할 때 그 뜻이 나와 같은 뜻인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이 말을 아무 것도 부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고 있어요.

 

나는 재능이 없는 인간, 다리가 하나 없는 인간, 가난뱅이, 천재적 과학자, 뛰어난 운동선수, 큰 회사의 사장 뭐 그런 것중의 하나라는 것은 사실일 수 있어요. 나의 입장은 이 세상 누구와도 다르고 나는 나의 입장, 처지라는게 분명히 있죠.

 

나의 입장, 나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건 누군가가 내게 그렇다고 말해주건 내가 누구라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뭐뭐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뭐뭐뭐 인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지금 금강산 계곡의 한자락에 있을 수도 있고 서울 시내의 시장터에 있을 수도 있으며 높은 고층빌딩의 맨 꼭대기에 있을수도 있어요. 어디에 있건 지금 있는 곳이 거기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를 살아야죠. 다른 사람은 다른 곳에 있지요, 부러워 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어요. 결국 각자는 각자의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지금 서있는 곳이 아니라 어디 다른 곳이 자기가 서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같습니다. 과거나 미래의 어딘가, 가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상상의 장소 그런곳에 가야하고 그런 곳에 가지 못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죠. 내가 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뭔가를 원하는 욕망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장소를 원하거나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서 이미 자신을 그 곳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지금 여기와 미래의 거기가 다르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일은 옳지 않은 것같아요. 과거의 추억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나쁘지만 말이죠. 

 

어린아이가 과학자가 된다거나 대통령이 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에 나쁜 것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 아이가 자신이 과학자라는게 뭔지, 대통령이라는게 뭔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자신의 꿈을 또렷히 하고 정의하기 시작하면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될수 있어요. 그 아이가 생각하는 과학자의 삶이라던가 대통령의 삶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확률이 매우 높으니까요. 특히 미디어나 책에서 말해주는 것들에 기반해서 그린 꿈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린 단지 원한다면 마음속에 작은 씨를 뿌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과학자라는 꿈, 대통령이라는 꿈의 씨를 심으면 그게 어디로 어떻게 자라날지는 모르죠. 과거의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변하지 않게 정해놓은 꿈을 쫒아서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요? 내가 과거에 이거는 이거라고 생각한게 옳은 걸까요? 내가 과학자라고 이름붙인 꿈이 자라나서 사람들이 실제로 나를 과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뭔가가 된다면 그건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고 앞으로의 누군가와도 다른 어떤 사람이 되겠죠. 그걸 우연히 누군가가 과학자로 분류해준다거나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사소한 것일 수 있어요. 보다 중요한 것은 매순간 그걸 잘 키워왔는가 하는 것이죠. 자기가 과학자가 되었고 정치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가 된 것은 사기꾼이나 학살범이 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을 염두에 둬야죠. 자리나 이름에 연연하면 그렇게 되기 쉬워요. 세상의 경쟁은 치열하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각자 자신의 자리에 체념하고 살라는 말은 아니예요.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내가 서있는 이 장소는 분명 시간에 따라 바뀔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있는 장소도 시간에 따라 바뀌죠. 다만 어디로 가는지 정의하지 말고 미리 거기에 가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살지 말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수영은 엄마없는 아이였던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건 그걸 분노하고 원망하건 그게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엄마없는 아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없는 아이다. 거기서 그녀는 출발해야 한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자꾸 정의한다. 그러라고 사회는 열심히 가르치고 강요한다. 그것이 최소한 서양의 문화고 서양의 사고다. 모든것을 가르고 정의해서 남기는 것없이 해부한다. 모든 것을 또렷히 하려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 그래프를 그리고 평가하고 계획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라고 나빠지는 것을 걱정하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다라는 그 명제에 기반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판단의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서 산다. 우리는 프로다라는 말이 멋지게 선전된다. 우리는 뭐뭐뭐에 지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뭐뭐뭐라는 직분에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멋진 삶이라는 영화나 드라마가 반복된다. 사회는 정밀하고 헌신적이며 비인간적인 부속품을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그걸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든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우리는 누구다라는 정체성에서 시작한다. 우리를 누구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항상 뭔가를 정의하면 더 좋은 것, 더 커다란 것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뭔가를 해야한다는 명제가 나온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것, 뭔가가 좋다는 것이 자연스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명제에서 정체성에서 나온다. 한국인이니까 한국을 위해 살고, 가문의 후손이니까 가문을 위해 살며, 가장이거나 엄마니까 가족을 위해 산다는 식이다. 하지만 자신이 단지 뭐뭐뭐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만, 즉 처음부터 그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이데올로기는 쓸만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빌딩이나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사람의 논리가 만들어낸 도구다. 이러하면 저러하다는 도구다. 도구는 쓸만한 것이다. 누군가가 그 도구를 쓰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도구가 우리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지난밤 나는 열차에서 혼자 내렸었다. 우린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에 따라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녀와 잠시 동행을 한다고 해서 뭐 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나는 그녀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다. 그녀를 옆에 두려고 중요한 일을 미뤄두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녀도 나도 인생의 숙제가 잔뜩 밀려있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 굳이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나와 동행해서 또 안될 것은 뭐겠는가. 나는 내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 나와 함께 부석사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열차는 영주역에서 다시 출발했다. 밤거리의 풍경이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동차의 소음이 여기서는 뭔가 새로운 것처럼 보이고 들렸다. 낯선곳에서 듣는 소리들은 친숙한 소리도 특별하게 들리는 법이다. 새로운 장소에서는 사소한 것들이 즐거움이 된다.  

 

낯선 곳에 가서 보면 작은 것이라도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준다. 예를 들어 작은 역앞의 벤치를 보면 이걸 누가 만들었을까. 누가 이 자리에서 사람을 기다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도시의 벤치는 이와 좀 다르다. 대도시의 벤치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거쳐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수에 압도되고 만다. 이미 하나 하나의 사람들의 체취나 흔적이나 역사는 희석되어져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곳 그러니까 중소도시의 여관이라던가 벤치라던가 중앙통 골목을 보게 되면 나는 좀더 개개인의 얼굴이 보이는 장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니 이 벤치에 지난 한달 동안 앉았던 사람의 수는 백명이 안될 것이다. 어쩌면 열명밖에는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무인도에 가서 나무한그루를 본다면 크게 재미가 없을 것이다. 보기나름이며 인간중심적인 사고 방식때문이겠지만 거기에는 역사가 없다.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도시는 인간으로 너무 꽉차있다. 개인적으로 중소도시가 적당하게 느껴진다. 그곳은 외로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개인의 자취가 의미가 있는 거리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가게며, 벤치며 전봇대가 사람처럼 나름의 역사와 성격을 가졌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느긋하게 걸었다. 길이가 얼마안되는 초라한 영주의 중앙거리를 걸었고 동전몇개를 내고 리어카에서 파는 꼬치 어묵을 사먹었다. 촌스런 네온사인이 널린 거리를 걷다가 거리의 사람들을 멀건히 보다가 까페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기분좋게 꿀꺽꿀꺽 목을 넘어갔고 심지어 비법으로 구웠다는 땅콩조차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대화는 별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인생에 대한 고해성사를 다 마친 오래된 연인처럼 같이 영주의 거리를 즐겼다.

 

꼬치어묵을 파는 아주머니는 유난히 얼굴이 곱고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굉장한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있었지만 지적인 외모를 가져서 꼬치어묵을 파는 그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를 보다가 문득 내가 이런 사소한 일을 눈치채는 것은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뭐든지 가득 차있는 대도시에서 그래도 숨쉴 구멍이 존재하는 소도시로 내려왔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에라면 보지 못할 사소한 것들을 눈치챌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일것이다. 그녀는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어묵파는 아주머니가 아니라 영주거리에 하나밖에 없는 어묵 포장마차의 아주머니다. 모든 어묵 포장마차의 아주머니는 다르다. 이 세상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나는 주변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자 숨이 쉬어지는 것같다. 세상에는 나만 있는게 아니다. 나만 아둥바둥 살고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산책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클럽에 가서 춤도 추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스러운 춤도 추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소위 블루스 춤도 수영과 함께 추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부석사에 함께 올랐다. 그리고 절간의 처마 구석에 앉아 마지막으로 긴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녀에게 충고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충고를 했고 그녀는 그걸 옆에서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갔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생각할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붙잡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경주역에서부터 내 옆에 앉은 작은 악마 같은 존재였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만 되었던 같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가고나서 생각하니 그 여행이 매우 좋은 여행이었다는 느낌이다. 그녀가 있었을때는 귀찮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녀가가고 나니 그녀가 없었다면 외롭고 비참한 여행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려고 했던 여행이 엉클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건 종종 이렇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데 지나보면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싶어진다.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서로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헤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내 옆에 있는 것같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녀도 헤어진다고 섭섭해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어져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니까 그런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광주리에 사과를 담아 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한봉지씩 팔고 있었는데 사과를 사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앞에서 봉지의 사과를 아가씨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자신은 먹을 없을 테니 사과를 같이 먹자는 것이다. 아담하고 고집세게 생긴 아가씨다. 나에게 말을 거는데 상당히 용기를 같다. 언제부터 내가 여자에게 이렇게 인기가 좋았나하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내가 웃자 그녀도 나를 보고 웃는다. 아가씨는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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