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에이 아이를 통해 보는 한국 사회.

by 격암(강국진) 2009. 9. 29.

2009.9.29

 

에이 아이 (A.I.)는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로 식쓰 센스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할리 조엘 오스먼드가 주인공 아이 로봇 데이빗으로 나온다. 이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한 여자로봇은 사랑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자 그 여자로봇은 성행위를 묘사하는 대답을 한다. 곧이어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감정을 가진, 사랑을 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겠다고 말하자 청중중의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런 로봇을 만드는 것은 비윤리적이지 않은가. 인간을 사랑할수 있는 로봇도 결국 로봇이라 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없을텐데 그 로봇에게 그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감정을 가지게 된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이 가졌던 미래에 대한 희망은 두 번이나 거듭 좌절되어졌다. 그 첫번째는 대량생산에 의한 무한한 발전과 풍요로움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번의 전쟁 그리고 대량생산에 의한 사회적 표준화, 기계화가 인간을 제약하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거짓된 희망으로 판명이 나고 말았다. 

 

1960-70년대는 반전과 프랑스의 68혁명, 히피와 로큰롤의 시대였다. 미국에서는 자유와 인권을 말하던 케네디와 마틴루터 킹이 각각 1963년 그리고 1968년에 암살당했다. 이 시대를 지나면서 인류는 또 한가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표준화를 탈피해서 인간 하나 하나에게 맞춘 다양화를 사회에 도입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이다. 다원주의, 다원화의 시대다. 

 

상업적으로 말해서 이런 변화는 한종류의 자동차를 만들던것을 수십종류의 자동차를 만들고 몇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만들던것을 수십 수백가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앞에는 무한히 다양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속박되지 않고 자기의 의사대로 취사선택하여 자유롭게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컨베이어 벨트 앞의 기계가 아니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직업을 택할수 있게 되었다. 

 

장면이 바뀌어 에이 아이에는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부부가 나온다. 이 부부는 특이한 로봇, 이 세상에 하나뿐인 로봇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이 로봇이 감정을 가진 로봇 데이빗이다. 데이빗은 엄마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자신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데이빗을 입양한 부부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들의 진짜 아이는 불치병에 걸려 냉동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부는 희망을 잃고 데이빗을 입양했는데 진짜 아이가 치료되어 돌아온 것이다. 데이빗은 엄마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일단 진짜 아이가 돌아오고 나자 로봇 데이빗은 아들의 지위를 지킬수 없게 되고 결국은 길에 버려진다. 자신을 버리고 가는 엄마에게 매달리면서 피노키오가 진짜 인간이 되었듯이 자신도 진짜 인간이 되면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냐고 데이빗은 외친다. 

 

다원화에 의한 인간의 구원은 자본가들에게는,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답이되건 말건 환영받을 수 있었다. 텔레커뮤니케이션과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세상은 점점 더 커다란 시장으로 통합되어져 가고 따라서 다양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오직 단 하나의 제품만이 승자로 남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보험상품보다는 백개의 보험상품을 만들고 하나의 전화서비스 계약보다는 백가지 전화서비스 계약조건을 만들어서 서비스간의 비교를 힘들게 하고 경쟁을 줄어들게 해야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회사가 벌어들일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집과 사회는 일단 만들어 내고 다면 다시 인간이 적응해서 살아야 할 환경이 된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낸 다양성이 있는 환경이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이 전과는 비할 수 없게 복잡한 환경에서 살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다양성의 추구는 이제 거꾸로 복잡함이 끝없이 증가해서 인간이 더더욱 전문화되고 기계에 의존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낸다. 

 

인간이 교육받아야 하는 기간은 점점 늘어서 이젠 대학교육도 충분치 않아서 석사 박사를 받고 포스트 닥터과정을 겪으며 MBA를 하고 의사도 인턴에 레지던트도 부족해서 견습의 시절을 더 추가로 가진다. 병원은 노인들로 붐비는데 세상은 어리숙한 노인들로 부터 돈을 긁어내려는 사람들로 득실댄다. 물건을 할인하는 방법은 수십가지가 되어 세상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사기를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은 비교할 수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 시스템에서 버림받는 두려움 그리고 타인의 문화가 우리에게 쳐들어 오는 두려움에 떤다. 그들은 결국 더욱 더 자신의 자리에 코를 쳐박고 세상을 좁게 본다. 그 결과 그들은 더더욱 기계가 되고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은 계속된다. 

 

거리를 해메는 데이빗은 결국 사냥꾼에 잡혀서 인간들이 벌이는 로봇파괴의 축제에 끌려간다. 거기서 로봇을 비난하는 인간들은 로봇들을 부시면서 광기를 부리고 있다. 인간보다 강력한 로봇들에게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그들의 두려움, 분노를 폭력으로 표현한다. 감정이 없는 버려진 구식로봇은 무력하게 당한다. 이 구식로봇들을 보면서 나는 감정없이 시스템에 매여서 기계적으로 살아온 우등생, 전문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인간들은 바로 그들에게 밀려나고 그들에게 쓸모없는 존재로 최급받는 구시대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 감정을 가진 로봇은 행복할까? 데이빗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로봇이지만 결국 로봇이다. 그것도 적응력이 더 떨어진다. 특정한 인간을 엄마로 사랑하게 된 로봇은 다른 집으로 갈 수도 없어서 무조건 파괴해야 한다. 신세대의 다양화된 사회에 사는 인간 역시 해방된 인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제약을 많이 받고 사는 인간이기도 하다.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그 이상으로 시스템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고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 필요가 떨어지면 잘나가던 프로야구선수가 은퇴하고 엉망인 삶을 사는 경우가 있듯이 시스템에 의해 버려지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대의 인간은 더더욱 전문화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같지만 그들이 가지는 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전보다 오히려 더 떨어진다. 

 

긴 여행끝에 데이빗은 진짜 인간이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맨하탄의 요정을 찾아가지만 거기서 그가 발견하는 진실은 그는 세상에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정교함의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데이빗 역시 쉽게 교체당할 수 있는 표준화되고 기계적으로 설계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맨하탄에는 수많은 데이빗들이 있었다. 데이빗은 그런 사실에 분노한다. 데이빗은 영화의 끝에서 결국 엄마를 다시만나지만 그것은 그가 2천년이나 인형 요정에게 기도 한 끝에 일어난 일이다. 그것도 외계인이 만들어낸 환상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하루밖에 재생되지 못한 엄마의 옆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잠이든다. 

 

우리가 이런 영화를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이 반문명적인 저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고 상징하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로봇이 되거나 로봇에게 밀려나는 것에 분노하는 광기어린 인간들이 될뿐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초등학교때부터 잠을 줄여가면서 취업 공부에 몰두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보면 우리가 기계를 생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생산된 기계는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꿈꾸지만 그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대부분 그리 오래지 않아 회사를 나와야 한다. 기계적으로 자기 일만 열심히 하도록 키워진 아이들은 다른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고 부부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며 아이들과도 잘 지내지 못한다. 그래서 용도가 다해 폐기처분되어지는 부품처럼 단지 직장에서만 문제인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 사회의 중장년층은 산업화 세대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같다. 한국의 3-40대는 더 좋은 자동차와 해외여행과 문화상품, 더많은 외식의 기회와 좋은 옷등에 현혹되어 산업화시대에 일만하다가 퇴진한 부모세대와 우리는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근본적으로 다른가. 그들은 사랑이 뭐냐고 물었더니 섹스를 묘사하는 로봇이나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계산되고 설계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이비드가 서있는 자리에서 얼마나 나아가 있을까. 그들도 사회로 부터 버려지고 사랑을 찾아 헤매고 나서야 자신과 똑같은 복제품을 다량으로 발견하고 충격에 빠질까?

 

단순히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기계는 인간이 될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더욱 나쁘다. 인간은 더더욱 시스템에 종속된다. 이제 사회엔 좋은 기계가 너무 많아서 인간이 되는 능력이 인간에게서 사라지기 쉽다. 쓰지 않는 능력은 사라진다. 내가 타인을 기계나 시스템으로 대체하고 편리하게 사는 순간 나도 타인에게 의미없는 존재로 기계나 시스템에 의해 대체된다.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인간으로서의 의식은 사라진다. 

 

오늘날 한국이 겪는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같다. 그것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주목받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다. 사람들은 세상을 무조건 더더욱 기계화된 곳으로 만들거나 세상을 원시시대로 되돌리려는 행동을 하는 것같다. 우리는 예정된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갈 뿐이다. 모두가 데이비드가 혹은 구식 로봇이 혹은 원시인이 되고 마는 파국이다. 모두가 다시 에이 아이를 한번 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은 그 영화에 나온 존재중 어디에 속하는 존재인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