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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상실로 말하기와 고독으로 말하기

by 격암(강국진) 2009. 10. 16.

2009.10.16

세상에는 두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의 방식이 있다. 나는 그것을 상실의 화법과 고독의 화법이라고 부른다. 

 

상실의 화법

 

상실의 화법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낙원에서 쫒겨난 사람의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상실의 화법을 구사하는 이야기다.  상실의 화법속에서 주인공은 대개 비극을 겪고 가진 것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문제는 이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의 인기 대하소설들은 내가 아는 한 모두 여기에 든다. 태백산맥이나 토지같은 작품들을 보라. 비극과 상실의 연속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은 읽다보면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때문에 계속읽기가 힘들정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극과 상실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 한국의 문학작품들로 어찌보면 한국의 문학작품중 어떤 의미로건 성공한 것에는 상실의 화법을 벗어난 것이 거의 없는 것같다.   

 

상실의 화법을 구사하는 전제는 그 상실이전이 있다는 것이다. 즉 상실의 화법은 소박하건 화려하건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전제한다. 지금의 세계는 그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나고 쇠퇴하는 세계다. 신화적 세계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는 이야기들도 그래서 자연히 상실의 화법을 구사하게 된다. 신화라고 해서 반드시 단군 신화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상화, 절대화, 신격화등이 나타나는 작품들을 나는 신화적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두환이나 박정희 혹은 이병철이나 정주영같은 실존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써도 이들을 완벽한 존재로 그리려고 하면 이야기는 자연히 상실의 화법을 구사하게 된다. 그들은 이 세계를 구원한 구세주였다는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왜 지금 우리가 구원받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신화적 인물들의 능력과 개혁의 기회가 어떤 사악한 이유들때문에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상실의 화법이다. 

 

상실의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은 행복이나 정의에 대해 분명하고 단순한 기준을 보인다. 아빠가 없는 아이는 아빠만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처럼 묘사되고 가난해서 불행해진 아이는 돈만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처럼 말해진다. 그리고 물론 앞에서 말한 우상화를 구사하는 작품들은 그런 우상화된 인물만 있으면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단정하게 된다. 

 

고독의 화법

 

고독의 화법은 어떤 의미에서 더욱 절망적 이야기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상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초에 행복이나 정의따위의 것을 가진 적이 없었다. 상실한 것이 없으므로 이야기는 그 상실된 것에 대한 복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고독의 화법을 구사하는 이야기에서도 비극적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이야기의 가장 핵심은 아니며 부차적인 역할만 한다.

 

주인공은 구체적인 것을 상실해서 그것만 얻으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명, 사회, 인간의 삶이 가진 피할수 없어 보이는 현실자체때문에 괴롭다. 때로는 스스로가 차라리 대단한 비극의 주인공이면 좋겠는데 그것도 안된다는 사실로 괴로워한다. 문제는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실존적 의미이고 허무다. 삶의 부조리함은 애초에 제거 불가능한 것이다. 상실의 화법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뭘 상실했는지를 극명히 말해준다. 고독의 화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고독의 화법으로 말하는 작품은 답을 말하기 보다는 당신의 삶에 대해 당신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창동감독의 영화 초록물고기는 내가 아는 한 한국영화가 상실의 화법을 떠나 고독의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번째 영화였다. 그 영화에도 여러가지 비극과 상실이 나오지만 초록물고기는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거나 권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빠져나갈 수 없게 우리를 얽매오는 삶에 갇혀 버리는 것이 문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가난하건 부자건 권력이 있건 없건 모두 불행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쪽도 받는 쪽도 비참하다. 

 

고독의 화법은 결국 우리가 어떤 주어진 가치관 체계내에서 더 위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메세지를 전한다. 세상을 악인과 피해자로 나눠서 악인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식의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시스템 전체, 가치관 전체를 뒤집어야 하고 거기서 탈출해야 한다. 

 

고독의 화법을 전개하는 작가에는 일본인 작가 하루키가 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소설의 스토리는 핵심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어찌보면 주변과 조화되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있다. 주인공은 대단한 사회적 거대담론이나 도덕적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으며 재즈나 듣고 스파게티나 삶아먹는 삶을 지속하려고 할뿐이다. 주인공은 마치 잘못된 시대로 타임슬립을 해버린 사람처럼 세상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일본인 원작이라는 영화 멋진 하루도 마찬가지다. 전도연과 하정우가 주연한 이 영화는 일년전에 헤어진 남자친구를 찾아와서 돈을 받아가려고 하는 여자의 하루를 그린다. 그들은 이별을 경험하고 실패를 경험해서 끔찍한 삶을 겪고 있지만 문제는 그 비극들과 상실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떠나버린 부인이나 애인을 마구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또한 여러 인생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인생이란 꼬이기 마련이고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주인공 남녀는 말은 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삶의 비루함을 비참해 한다. 그들은 누구탓을 할 수도 없으며 뭐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건지 확실하지 않다. 

 

두화법의 개인적 사회적 의미,

 

상실의 화법을 가진 이야기는 대개 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며 개인이 실종되고 사회적 이야기가 된다. 즉 소소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큰 도덕적 사회적 무게를 지닌 가치를 논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여성으로서 억압되고 차별받아 불행해진 여자는 존중받는 삶을 통해 행복으로 갈 수 있을 것같다는 식이다. 상실의 이야기가 호소력을 가지려면 그 상실된 것이 사회적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내가 이 세상 누구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연필 한자루를 잃어버린 것때문에 괴로워 하는 이야기를 쓴다면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보편성이나 일반성이 개인의 가치를 말살한다. 따라서 상실의 화법은 근본적으로 집단주의적이고 사회적이며 보수적이다. 사실 이미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했거니와 플라톤이나 공자의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상실의 화법을 따른다. 어떤 사람들은 토지나 태백산맥같은 소설들은 진보적인 소설로 여기고 그런 소설들이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표할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이데올로기는 어떤 의미에서 보수적이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가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대학교의 등록금을 무료로 하자는 것이 진보적 정책일 수는 있지만 등록금이나 돈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사실 낡고 오래된 가치다. 

 

고독의 화법에서는 애초에 뭐가 잘못인지가 시종 분명치않다. 그래서 결국 잘못된 것은 특정한 인물이나 특정한 물건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직 우리 머리안에 개념화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처음부터 나는 이게 없어서 불행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현 시스템전체를 부정하고 바닥부터 재검토할것을 요구한다. 체념의 단계에서 머물면 고독의 화법은 극보수가 되고 시스템의 재검토라는 곳까지 이르면 이것은 진정한 진보인 혁명이 된다. 고독의 화법을 구사하는 이야기는 지금 세상은 엉망이지만 부동산 법 하나만 고치면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두가지 화법이 완전히 서로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두가지의 이야기를 섞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매우 물질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 한 이야기에 나온다고 하자. 이 남자는 가족들의 붕괴를 겪고 있다. 아내는 외간남자에게 시선을 주고 자식들은 이 남자에게 애정도 존경심도 관심도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의 사고관에는 돈밖에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모르며 설혹 뭔가를 느낀다고 해도 그런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중요한 건 역시 돈이다. 

 

이 문제의 남자도 자기 삶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느낀다. 다만 지극히 물질적인 이 남자는 그 해결책은 역시 더 많은 돈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역시 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적 사내의 머리속에는 사랑이나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그걸 상실한 상실감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고독으로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상실로 이야기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은 가족의 중요성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 역시 자신머릿속에 개념화되지 않은 뭔가를 결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독의 화법은 결국 개인으로 돌아간다. 개인을 중요시한다. 답은 외부가 아니라 개인의 머릿속에 있다. 그래서 나는 초록물고기를 대단히 중요한 영화로 여긴다. 

 

이미 한국에서 대중은 개인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실의 화법을 구사하는 것같다. 보수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은 서로를 대단히 틀린 사람들로 여기지만 그들은 우리가 뭘 상실했는지 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그 지식인들은 결국 다수의 국민들에게 훈계를 늘어놓게 되고 끝에 가면 플라톤의 철학왕 주장처럼 결국 이 이데올로기는 내가 잘 아니까 내가 시키는데로 모두 따르라고 하는 식이 되고 만다. 누가 그들에게 그걸 지적하면 그들은 고작해야 그들이 이종격투기같은 말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므로 이것은 토론의 결과이고 합의라고 주장하는데서 멈춘다. 

 

세상은 이미 상실의 화법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화법의 차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적들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의 핵심이다. 즉 이 화법의 차이를 모르고 상실의 화법에 몰두할 때 우리는 갇힌 사회로 세상을 후퇴시키게 되는 것이다. 유치하게 이러 저러한 것만 가지면 우리는 행복하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는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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