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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한국의 서점에서 발견하는 정신분열

by 격암(강국진) 2009. 10. 25.

2009.10.25

 

머릿말

 

한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다보면, 다른 많은 곳에서 그렇듯이, 두가지의 경향이 충돌하는 것같은 책들을 보게 된다. 한쪽의 책들은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에서의 성공에 대한 것이거나 그렇게 이해된다. 즉 10억을 만드는 법, 효율적으로 일하는 생활하는 방법, 출세하는 법, 처세술, 비지니스의 기술, 명문대학 가는 법 뭐 이런 것들이다. 또 한종류의 책은 주로 욕심을 버리고 조용하게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귀농하는 사람들 이야기, 느리게 살아가기, 욕심을 버리고 가진 것없이 살기, 남과 누는 것, 자연을 가꾸고 봉사하며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이 두가지의 방향은 그 자체로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두가지를 흔히 뜨거움과 차가움, 높은 것과 낮은 것, 왼쪽과 오른쪽처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이렇게 이해할때 결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저 적당한 잡탕을 의미하는 중용의 도다. 중용의 도는 본래 이런 것일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저 적당한 수준으로 하는게 좋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므로 적당히 성공하고 적당히 욕심을 가지고 적당히 출세하는 것이 이 두가지 대립하는 설교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해인 것이다. 

 

이런 절충에 불만인 일부사람들은 한쪽을 긍정하기 위해서 다른 쪽을 철저히 부인한다. 따라서 성공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를 외치면서 은둔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비판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고 원시시대마냥 토굴로 걸어들어가면서 물질에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돈과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성취하면서 느리게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성취해야 하며 그렇게 할수 있다는 것이 20세기 현대철학이나 노장과 유교와 불교가 말하는 것이지 어느쪽을 부인하거나 적당히 섞어서 죽도 밥도 안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성공의 긍정

 

부처님은 하루에 한끼만 식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럼 2일에 한끼를 먹는 사람은 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일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물질을 부정하는 사람들, 느리게 살고 정의되지 않은 가치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중에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부처님도 식사를 하셨고 벌거벗고 다니지 않았다. 이것이 불교라는 오해를 지우기 위해 다른 말을 해보면 20세기의 서양 현대철학자들이 물질적 사고, 유물론적 사고를 비판했지만 그들이 토굴로 들어가서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 한끼를 먹는 사람이 두끼 먹는 사람보고 나는 한끼를 먹고 사니 더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는 발상자체가 적게 먹는 삶의 의미를 모른다는 이야기다. 적게 먹거나 많이 먹는게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다. 내가 한끼를 먹는다고 해서 두끼를 먹건 빌게이츠처럼 부자건 그사람은 무조건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단한 문명을 만들어서 달나라 여행도 가능한 과학기술문명을 쌓아올렸다. 그것이 왜 대단하지 않은가. 마이크로 소프트나 삼성같은 거대한 기업을 일으켜 거대한 사업을 할수 있다는 그 능력은 대단한 것이다. 다만 그 대단함에 단지 대단해 보임에 속아서 그것이 필요없는 사람이 그걸 추구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적인 것은 모두 기술의 축적, 관념적 정의와 구분에 의해서 쌓아올린 도구다. 도구는 좋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책을 읽을수 있는 시간과 물질적 여유를 가지는 것도 다 훌룡한 문명의 결실이다. 경제적 불안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수 있는게 왜 나쁜가. 두꺼운 옷을 입어서 추위를 견디면 되는 걸 추위속에서 벌거벗고 참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득도한것이고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다. 바둑돌을 정신집중해서 하늘로 띄우면 도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다. 새총으로 쏘면 바둑돌은 끝없이 가는 것처럼 날아간다. 바둑돌을 날리고 싶다면 새총을 쓰면 된다. 

 

물질을 부정하는 행위는 물질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걸 가지려고만 하고 다른 생각이 없는 사람만큼이나 거기에서 도망가려고 애쓰는 사람도 물질에 매달리는 것이다. 

 

물질, 문명, 기계와 과학은 모두 도구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자체도 도구다. 이것때문에 우리는 그저 매일 매일 먹을 것 걱정을 하는 것보다 높은 수준에서 살고 있다. 그 구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구조를 부인하려고 하고 도망가려고만 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 그건 그냥 복잡한 세상의 원시인이 되려고 하는 짓이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세상을 부시는데 성공해도 또 다른 똑같은 세상이 나타난다. 모두가 귀농해서 자작농을 하면서 살면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더 강력한 도구를 들고 있는 외부세력에 의해 침략당하고 정복당할뿐이다. 

 

차들이 이렇게 많이 운행할수 있는 것은 교통법규때문이다. 교통법규는 하나의 수단이다. 교통법규가 우리를 제약한다고 해서 나는 오늘부터 교통법규를 무시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냥 모두가 걸어다니자고 하는 이야기거나 다른 사람들이 교통사고의 위협을 느끼던 말건 내멋대로 하며 살겠다는 이야기다. 산중에 앉아서 시주와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편하게 살면서 가진자들의 소유욕을 비웃는 자가 있다면 그건 도둑놈이고 깡패일 뿐이다. 이런 식의 이해는 소위 욕심을 버리는 생활태도를 결국 반문명주의로 만들고 만다. 

 

필요하면 돈을 벌고 유명해 질 수도 있고 남들이 보기에 엄청난 사치로 보이는 일을 하며 살 수도 있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본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벌거 벗고 있거나 명품으로 몸을 두르고 있거나 모두 물질 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실 부자나라의 중산층정도가 입고 쓰는 것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단한 부자나 누리는 것이다. 사치니 명품이니 하는 것도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본질보기

 

모든 관념, 물질이 모두 인간의 도구로 인간이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를 위해 써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나면 남는 것은 정의되지 않고 정의할 수도 없는 우리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과학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고 그러려고 해서도 안된다. 정의하고 분석하는 것에 어설프게 중독된 사람들은 이런 것에 극렬히 반항한다. 그러나 실은 진짜로 정의와 분석에 익숙한 사람들은 정의와 분석하기를 넘어설 수 있다. 그들은 그것에 익숙하기때문에 그 한계도 안다. 유명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정의되지 않는 과정철학을 외쳤지만 그는 수학자다. 오로지 과학이나 수학, 분석과 분류의 작업을 어설프게 경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무한히 높게 평가하거나 그것에서 도망치고 그것을 부인한다. 

 

우리 사회는 아니 모든 사회는 규칙을 준수할것을 교육한다. 그 교육은 필요하고 옳은 것이다. 교통법규가 있으면 지키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받는다. 그 교육을 어설프게 이해한 사람들은 교통법규는 지켜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라고 하면 극렬히 반항하거나 오해한다. 그들은 그런 말이 교통법규를 무시하라는 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받은 교육에 역행하는 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도 그 이데올로기는 수단이라고 말하면 저항한다.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것에 빠져서 순혈주의자가 되고 결국 본래의 목적은 실종되고 만다. 

 

그러나 사실 진실은 멀리있지 않고 코앞에 있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아름다움을 말하는 분야 즉 생활전반의 모든 분야, 모든 순간에서 선택에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활은 박살이 난다. 어떤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하는데 거기에 논리적 근거를 들이대면 사랑과 결혼은 쇼핑이나 취업이 되버린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를 '구입'할 수도 있었는데 가진 돈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정도여자에 만족한 것이 되고 두 사람간의 관계는 서로를 서로에게 남편과 아내로 취직시켜준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비정한 그림을 부정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은 그저 물질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주변사람을 괴롭힌다. 사회건 국가건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강한자가 약한자를 착취하는 세상이 될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실재, 실존에서 대부분의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실재로 존재하지도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을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다. 자기 몸은 자기 손가락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뜨거운 물에 빠지니까 손가락을 물밖으로 내놓고는 괴로워한다. 나머지 몸이 물에 익어가도 그는 자기 몸이 손가락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빼놓을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삶자체에 의미가 없어진다. 조금 남은 것이라봐야 남들이 아반테타고 다닐때 나는 그랜저 타고 남들보다 더 큰 아파트에 살면 내 인생은 더 가치있는 것이된다는 가련한 것이 되고 말뿐이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의 삶은 실패하기 쉽다. 결국 스스로 세상이 외롭고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주변과 가족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남을 부속품으로 생각하므로 자신도 교체의 시기가 되면 미련없이 교체되어야할 부속품 기계가 되고 만다. 삶이 이렇다면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어진 순간 자살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나올 법도 하다. 한국의 자살율이 이렇게 높아진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맺는말

 

현재의 한국을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만 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기계의 눈으로 보고 약육강식의 세계로 본다. 처음에 말한 물질의 시각과 비물질의 시각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있지를 못한다. 물질을 골고루 나누느냐 아니냐가 주요 관심사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좋아질수는 없기는 하지만 문화적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개혁을 논하는 사람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간디같은 분은 정치와 종교는 반드시 이어져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때문일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종교라고 부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종교라고 부른다고 해도 시중의 많은 사람들이 절이나 교회에서 우리 아들 대학붙여달라고 기도하는 것같은 그런 종교는 아니다. 

 

외국의 예를 들면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삶의 형태의 껍질을 수입하려고 한다. 그 껍질은 필연적으로 애매모호한 논리적 설명이 붙여져서 들어온다. 이것은 예수가 뭔지 하나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십자가 놓고 기도하면 영험한 효과가 있다더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복지, 환경, 소득분배, 교육, 취업, 모든 분야의 정책이 이렇다. 이것은 한국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두가지를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것이 극복되는 순간 한국에 존재할 대화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될수 있지 않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많아진다면 한국은 진정한 선진국이 될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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