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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경계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09. 12. 15.

눈사태가 일어났다. 눈이 산처럼 집쪽으로 밀려드는데 눈이 밀어닥치는 경계에 모두의 시선이 간다. 그 눈이 집에까지 도달하면 집이 쓸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입시공부를 하는데 밤이 되면 영 견디지를 못한다. 12시까지는 공부해야 할것같은데 10시만되면 벌써 비몽사몽이다. 날마다 아이는 조금만 더 안자고 버티려고 안간힘을 쓴다. 잠자는 시간을 밀어올리는 것 그것이 목표다. 우리는 여기서도 깨어있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의 경계에 온통 신경을 쓰게 된다. 


우리는 주로 어떤 것과 어떤 것이 아닌 것의 경계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실은 그 경계가 주목받기 전의 기본적인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종종 잊어버린다. 눈사태가 바로 집앞에서 멈추면 기뻐해야 할것인가? 그 전에 눈사태가 일어나는 지역에 집을 왜 짓는가? 이번에는 눈사태를 피했지만 다음에도 피할것인가? 아이가 잠을 참지 못하는 것은 기본체력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초등학교부터 대학입시에서 체육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학원으로 학원으로 애들을 굴린 결과 애들이 비만에 체력저하에 시달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 아이들이 정작 고3이 되어 대학입시에 전력을 다하려고 할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일에 주목을 한다. 아무일도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이나면 불을 빠르고 잘 끄는게 중요하지만 애초에 불이 나지 않는게 더 좋다. 문제는 불을 잘 방비한 사람은 사람들이 대개 알아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영웅적으로 불을 끄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라고 노력없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생각만큼은 그렇게 아둥바둥 공부하지 않는다. 재능의 차이도 있지만 평소의 생활습관과 공부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반에서 중간정도의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고질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시험때가 되면 미친듯이 공부하고 시험이 끝나면 완전히 풀어져 버리는 것이다. 시험전날에는 밤새듯이 공부하고 실제로 밤새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성적이 좋은 학생중에는 시험전날엔 오히려 평소보다 공부를 덜하는 사람도 있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더 필요하고 특정한 것을 외우겠다고 노력하다보면 평소에 알던 것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선은 아주 잘 보인다.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러나 실은 보이지 않는 것, 경계가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 진짜다. 하지만 세상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이야기는 실상 중요할 가능성보다는 안 중요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예 신문과 티브이 방송을 안 보고 산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첫째로 사람들은 보통 그런 일이 일어나는 근본은 안 보고 말단의 것에만 시끄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걸 어떻게 틀어막는가에만 온통 신경을 쓴다. 물론 그것도 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일을 해내면 폼도 난다. 그러나 그런 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보다 근원적인 일에 묵묵히 매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둑이 터지면 그걸 막은 사람은 알아주지만 둑을 평소에 관리하고 터지지 않게 만든 사람의 공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때문에 그것은 더 중요하다. 남들이 칭찬하고 주목하는 일은 본래 더 잘 챙기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시끄러운 일이 안중요할 두번째 이유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세상에 선입견 없는 의견은 없지만 특히 상업언론의 선입견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높은 기대를 할 수 없다. 네티즌들을 보면 때로 어떤 방송국이 진리의 수호신이고 어떤 방송국은 악마라고 말하는 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대상은 계속 바뀐다. 황우석사건때 엠비씨는 매국노집단이었고 요즘은 케이비에스가 매국노고 엠비씨는 구국의 성지다. 상업언론이 시끄럽게 구는 것은 전부 권력과 돈과 관련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해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귀를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되지만 그 이야기에 너무 귀를 기울이면 그 세계에 갇히고 엉뚱한 선입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책이나 잡지같이 보다 내용이 길고 호흡이 긴 기사는 유언비어성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더 작다. 길게 쓰는데 특정인을 비논리적으로 옹호하려면 앞뒤가 서로 모순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경계안의 일로서 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의 폐해를 들고 싶다. 너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유지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만큼 자신들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무로 단층건물은 지을 수 있지만 그걸로 백층건물을 지으면 붕괴될것이다. 매일매일의 권위주의와 비합리성이 그 자체로 개인의 삶에서는 큰 문제를 안일으키지만 그것을 사회전체로 확대했을 때에는 억울한 사람을 양산해 내는 비극을 만들어 낸다. 


니것내것을 제대로 가리지 않는 풍습, 선후배가리는 풍습, 형동생처럼 쉽게 가족같이 서로를 칭하는 풍습이 결국 부정부패를 만들고, 패거리를 만들고 법치주의를 무너뜨린다. 죽일 것처럼 싸우는 국회의원들도 카메라꺼지면 즐겁게 놀고 조선일보 기자들과 정겹게 사는 국회의원들은 여당에도 야당에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다고 들었다. 왜 어린애를 참혹하게 강간하여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보다 박근혜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사람이 더 심한 처벌을 받았을까? 그 근원은 매일 일상의 풍습에 있다.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도 많지만 합리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는 사람도 적다. 대기업들은 냉혹한 기계적 논리로 사회를 잠식해 들어간다. 기업형 슈퍼마켓을 막을 논리가 지역 사회에 있는가? 우기면 되나? 소비자들은 기업형 슈퍼마켓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거대 법인들은 냉혹한 기계처럼 사회를 갈아엎는데 그앞에서 시위로만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본인도 재래시장 안가면서 명절때면 재래시장가서 경기가 안 좋다고 기사쓰는 기자보다 더 현명할 것이 없다. 슈퍼마켓 주인들은 이건 너무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럼 그 슈퍼마켓 주인들은 더싸고 맛있는 음식점체인이 동네에 들어오면 그것도 반대할 것인가? 고물 전파상대신 멋진 대기업 전자상가가 들어온다고 하면 그것도 반대할 것인가? 반대의 논리가 엉성하고 근거가 없다. 그저 강자가 약자를 봐줘야 한다는 식이다. 


한 예에 불과하지만 그런 반대의 근거에는 지역 공동체의 강력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네에 지역공동체라는게 실재로 얼마나 활성화 되어있는가? 서로 얼굴도 못보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에 서로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일이 비일비재다. 그 지역에 공동체라는 것이 없다면 왜 단순 계산해서 싸고 좋은게 나쁜가. 


이걸 더 길게 쓰지는 않겠다. 다만 자신들의 내부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정책이 어떠니 기업이 어떠니 하는 불만을 터뜨려도 대세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무대포로 영웅적으로 싸워서 거대 쇼핑몰의 입점을 막아낸 동네가 하나둘은 있을지 모른다. 그 동네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런 승리가 동네주민들에게 진짜 승리이기는 한가? 


이명박을 싫어하는 사람은 누가 다음번엔 정권을 찾아올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그럼 얼마나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인가. 국민이 바뀌지 않으면 김대중, 노무현이 해내지 못한 것은 아무도 해내지 못한다. 할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무슨일을 하는가를 우리는 지금보고 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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