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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10. 1. 14.

자유는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칭송받고 있는 가치다. 그러나 자유가 뭔지, 그 자유라는 가치가 어떻게 정당화 될수 있는가 하는 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생각해 보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란 사실 오랜 동안 그다지 강조되거나 중요시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누구도 속박은 물론 싫어한다. 그러나 누구도 무법천지의 난장판을 찬양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무슨 습관처럼 자유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둥, 모든 세계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자는둥, 가장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둥 하는 데 그게 그렇게 항상 당연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유를 뒷받침하는 논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진화론의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보통 출발한다. 계몽주의 이래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고 과학기술의 축적과 발전이 칭송되었으며 그 가운데 유럽이 세계 최강의 지역으로 올라선 역사가 자유의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즉 지식의 가치가 강조되고 발전의 촉진이 요구되는 역사속에서 자유로운 사회에서 가장 빠른 발전이 일어난다는 논리가 자유의 가치를 칭송하는 기본이 된것이다. 이같은 이야기는 존 베리가 쓴 책, 자유의 역사에도 나온다. 


그런데 21세기의 초엽에서 과연 우리는 자유시장의 논리나 진화론의 논리가 자유에 대해 충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적어도 상당히 의문시 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요즘 세상에 완전 자유시장논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공산주의가 아니라도 자본주의 사회도 국가가 개입하여 소득을 분배하고 여러가지 정책을 수행한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경쟁에 의해 자유롭게 모든 시민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진화도 마찬가지다. 진화는 유전자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데 유전자적 변형이 끝없이 자유롭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종족은 금방 망해 버릴것이다. 종족의 유지는 유전자 변이를 통한 진화 이상으로 유전자의 안정적 성질때문에 기존의 종족의 성질이 유지된다는 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아무리 잘봐줘도 자유자유자유만으로 발전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을 것이다. 


자유의 가치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럼 우리는 자유를 칭송하면서 살아온 끝에 조금은 더 자유로워졌을까? 현대인은 백년전의 사람들보다 반드시 자유로운 것일까? 아니 5천년전의 사람과 비교하면 어떨까? 인구밀도가 높지 않던 시절 인간은 농사를 짓지 않고 사냥이나 채집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시절을 끝없이 미화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엔 인간은 하루에 2-3시간정도밖에는 식량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 시간은 그냥 빈둥거리며 아름다운 자연에서 논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거의 없이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부시맨같은 종족이 얼마나 사냥이나 채집에 시간을 쓰는가를 봤을때에도 확인된다.


나는 원시적 사회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유라는 잣대로 보았을때 우리가 얼마나 부자유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매우 기계적이고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사회속에 살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에 대해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야 하고 없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 잠을 줄여가면서 일해야 한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게 적어도 수백년은 되었는데 인간은 점점더 부자유스러워지기만 하는것같다. 나는 이 점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싶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자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자유라는 자원을 가지고 다투는 제로섬의 전투장으로 본다. 즉 내가 무제한 적인 자유를 누리고 모두가 부자유스럽다면 다시말해 내가 절대 군주처럼 절대 권력을 가졌다면 그것은 모두의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얄팍한 도덕심으로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그런 자유를 부러운 것,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몽테스키외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들의 권력투쟁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서로 부자유하게 된다. 권력투쟁의 수단이 문명 특히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욱 강력하게 통제할 수가 있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투쟁이 더 격렬해 지고 모두의 자유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도대체 자유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자유가 뭘 말하는 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디어에 의해 사회에 의해 부자유해졌다. 머릿속 깊숙히 세뇌당해서 다른 사람들의 수단으로, 어떨때는 법인이나 컴퓨터같은 비인간적인 것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된다. 


도대체 우리가 칭송하는 자유란 무언가. 우리가 일주일에 3일을 일하고 4일을 쉬면 그것은 더 자유로워진것일까? 노는 휴일동안 우리는 원리적으로는 뭐든지 할수있다. 할 수없는 것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할수 없는게 너무 많다. 우리는 결국 이런저런 의무에 묶여서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투잡이 되고 쓰리잡이 되고 나중에는 셀수도 없이 직업이 많아지는 것같다. 아이를 우리가 키우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를 키울 시간이 없는데 아이 키우는데 드는 시간과 돈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든다. 


결국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우선 내적인 정리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가치판단적인 독립이 이뤄지지 않으면 주장할수 없다. 스스로 뭐가 중요한지 알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외부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내게 필요도 없는 것을 위해 수십년간을 일하게 된다. 


남들이 멋진 자동차를 몰고 아파트를 산다고 하니까 그걸 구하기 위해 죽자고 수십년을 일한다. 남들이 겉멋에 들어 술과 싸구려 음악으로 시간을 쓰면 나도 그렇게 시간을 쓴다. 남들이 세금을 이렇게 내야한다고 그렇게 낸다. 남들이 이렇게 결혼해서 이렇게 사는거라고 하면 그렇게 산다.  


자유롭게 사는 것과 자유로운 사람의 겉모습을 흉내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대기업의 직원으로 도시생활을 하건 농촌으로 귀농해서 농사를 짓고 살건 겉모양에 따라 자유로운 사람과 부자유로운 사람이 갈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적인 정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질 않는 것같다. 그들은 온갖 남이 주입한 가치의 그물에 묶여 꼼짝도 못하면서 그 그물안에서 자유를 찾아 헤맨다. 여기 교도소안에서 담배 한가치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쩌면 담배를 구할 자유가 조금만 더 늘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교도소 밖으로 가야 제대로 자유롭다고 말해도 그는 듣지 않는다. 그는 오직 교도소라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채 담배 한가치를 더 구할수 있는 자유에만 매몰된다. 교도소라는 시스템 말고 다른 시스템이 가능하다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상상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더 불편한 교도소 시스템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유가 정말 뭔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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