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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올드보이 : 나는 누구인가

by 격암(강국진) 2009. 12. 25.

9.12.15
30살이 넘게 되면서는 그 꿈을 꾸지 않게 되긴 했지만 나는 종종 같은 악몽을 꾸곤 했었다. 내가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그 꿈은 이렇다. 꿈속에서는 나는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얼굴이 안보이는 친구가 나를 깨우는 것이다. 그 친구는 다 탄로가 났다고 말한다. 뭐가 탄로났냐고 물어보니 예전에 관악산의 우물이 생각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얼굴없는 친구가 설명해준 우리의 과거는 이렇다. 나를 포함한 친구 셋이 초등학교시절 관악산 약수터에 같이 놀러갔다가 실수로 깊은 우물에 사람을 빠뜨려 죽이고 도망을 쳤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이 일을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스스로 이 일을 잊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정말로 잊었다. 그런데 그 일이 발각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니 뭔가 기억나는 것같기도 하다. 꿈에서 나는 약간 허둥대고 도망치다가 깨고는 한다. 

이 꿈이 가장 끔찍한 이유는 깨고나서 몇십초간은 마치 관악산의 깊은 우물사건이 실제인것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지만 내 이성이 나를 일깨우기 전에는 기분이 그렇다. 그 몇십초 동안 나는 잠시 평범한 소시민에서 살인범인 나를 겪는다. 나는 살인자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는 흘러갔지만 그 과거가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올드보이는 박찬욱감독이 2003년에 발표한 영화로 최민식과 유지태 그리고 강혜정이 출연했다. 최민식이 연기한 오대수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생각없이 살아가는 인간이다. 술주정도 부리고 남의 여자를 희롱도 하지만 죄의식도 별로 없다. 대충 살기 때문이다. 이런 오대수가 어느날 갑자기 납치를 당해서 사설 감옥에 15년이나 갇힌다. 그 동안에 아내는 살해되고 자신은 살인범으로 조작되며 하나 뿐인 딸은 해외로 입양되어 버린다. 

오대수를 미치게 하는 것은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도대체 자기가 뭘했길래 누가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가 하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날 그날 자기가 부딛히고 지나친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으면서 대충 대충 살던 오대수다. 이제 오대수는 노트를 펴고 자신의 악행의 자서전을 쓰면서 이 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이제 그냥 하루 하루를 살 수가 없다. 평생을 복습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오대수는 고민한다.



살인 공소시효가 끝나는 15년째 되는해에 마침내 최면술처리를 받고 풀려난 오대수는 고생끝에 자신을 가둔 우진을 만나지만 그를 고문할 수도 죽일 수도 없다. 자신을 고문하면 자살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이든 왜 우진이 대수를 15년동안 감금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지 않고서는 오대수는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처절한 복수심도 억누르고 오대수는 그 답을 찾아헤맨다.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자기가 얼마나 말이 안되는 대우를 받은 것인지 그래야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강하게 사로 잡는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다. 나는 노동자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아버지다. 나는 정육점을 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런 종류의 사실들은 너무 당연해서 바뀔 수가 없는 것같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확신하는 만큼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구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얼마나 심각하고 엄밀하게 생각해 보았는가.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다가 그냥 습관처럼 나는 누구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것은 아주 상식적인 일로 의심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뻔하고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15년동안 사설감옥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절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한국 사람이란 건 무슨 뜻일까?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거나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뜻일까? 내가 사장이라거나 노동자라는 건 무슨 뜻일까? 내가 아버지라는 건 무슨 뜻일까? 뜻도 모르면서 이름만 습관적으로 되내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나다. 나는 그 부분의 나를 망각속으로 집어 던지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오대수는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방문한 끝에 드디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알게 된다. 그는 이우진과 그의 누나의 근친 밀회를 목격했던 것이다. 그는 학교를 떠나 서울로 전학가면서 이것에 대해 생각없이 한마디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이 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악소문이 되고 그 결과 이우진의 누나는 자살해 버린다. 하지만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이제 오대수를 괴롭히던 질문의 답이 나왔다. 이래서 이우진은 오대수를 미워했던 것이다. 오랜동안 찾던 답이 나왔으나 오대수는 역시 복수를 포기하지 못한다. 사설감옥에서 나와 사귀게 된 미도는 답을 알고 싶었는데 이제 답을 알았으니 이우진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미도에게 오대수는 이제 복수는 자신의 성격이 되어버렸다고 답한다.

오대수는 이제야 말로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우진에게로 간다. 그러나 실은 자신의 정체성에 여전히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사귀던 미도는 자신의 딸이었던 것이다. 미도의 앞에는 이런 그들의 정체성의 비밀이 담긴 상자가 놓여진다. 오대수는 이우진에게 애걸복걸하고 자신의 혀를 깨물어가며 그 비밀을 숨기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마침내 이우진은 죽고 오대수는 최면으로 기억을 지운 상태로 녹초가 된다. 오대수는 멍한 표정을 짓고서 미도와 재회한다. 


모든 훌룡한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얼마나 대충 수습하면서 살고 있는가.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자, 알아도 열어보기 두려운 기억의 상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열어봤어야만 하는 상자들을 도처에 둔채로 우리는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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