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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말하기와 듣기

by 격암(강국진) 2010. 1. 26.

사람들은 대개 듣는것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나만해도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에너지를 블로그에서 말하는데에 쓰고 있다. 물론 독서라는 형태로 남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말하기는 두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같다. 하나는 주장이나 어떤 의미를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또하나는 그저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그 답답한 사정이 남에게 도움된다거나 남이 그걸 해결해 주길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가 벽이라도 상관없을 것같지만 그래도 상대가 사람이 아니면 말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이 많다. 이러니 저러니 각자의 사정과 관점을 늘어 놓는다. 그리고 듣지 않는다. 사실 이렇게 떠들고들 있으니 귀를 열어 들어봐야 귀에 들어오는 소리의 대부분은 소견좁은 소리거나 신세한탄에 불과하다. 들어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해가 될때도 많다. 어떤때는 듣는게 아니라 듣는척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대방도 자신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거나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나라는 대화상대가 필요할 뿐이다. 

 

독서는 이런 의미에서 좋은 듣기가 되지만 사실 책이라고 해서 같은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소견좁은 소리나 신세한탄이 가득한 경우가 많다. 서점을 가서 책들을 들춰내다보면 여러가지 사람들의 삶을 보게 된다. 그런 것들을 보고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책들도 참많다. 대개 성공한 사람들이 쓰는 책들이 그런데 그들의 책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기 보다 해가 될것같은 편견으로 가득찬 말들이 많고 신세한탄이나 자기자랑이 가득한 경우가 많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보다 자신감에 차있어서 자신의 좁은 소견을 일반적인 것으로 확신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같다. 

 

진정한 의미의 듣기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되는 것같다. 우리는 오직 먼저 어떤 질문이 있고 들으려고 하는 욕구가 있고서야 들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무에 대해 애정을 가지게 된다거나 한국 사회는 왜 이런것일까, 더 잘살 수는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진다거나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합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가슴에 차있어야 우리는 그것에 관해 듣게 된다. 

 

그렇지 않고 그저 지금 생활에서 큰 불만을 느끼지 못하며 불만을 느낀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 국한된 일 예를 들어 특정한 한 직장상사나 한 이성 동료와의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라고 애들 성적이 오르기를 바라고 사놓은 집이 값이 올랐으면 한다는 생각을 하는 정도에 머무는 경우 우리는 세상의 대부부분의 일에 대해, 특히 남들에 대해 듣지 않게 된다. 

 

일본사회에 비하면 한국 사회는 참 시끄럽다. 일본사람들은 어쩌면 너무 보수적이고 생활의 변화를 바라지 않아서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한국사람에 비하면 그들은 그저 살던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이미 오랜간 전세계 최정상의 경제대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들은 그들의 황금기를 정답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닐까?

 

반면 한국은 세상에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이 사람들이 시끄러울 때가 많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변해야 한다는 감정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냥 살던대로 살자는 식의 보수적 주장은 대개 어리석고 심지어 부패한 생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두 괴롭다, 억울하다, 불행하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듣질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뿐 사회전체, 세계 전체를 포용할만한 높이의 시각에서 들으려고 하는 질문을 가슴에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저 자신의 손안에 있는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가 해결해 줬으면 할뿐이고 분노할 뿐이다. 

 

자신이 어떤 상식체계속에 있는지, 어떤 문화적 영향력속에 있는지, 요즘 세상이 왜 이렇게 각박해져만 가는지에 대해 고민이 없는 사람만 한국에 가득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그냥 자신의 불편함과 괴로움을 계속 떠들기만 할뿐이라면 뭐가 좋아질 수가 있을까? 도무지 남앞에 나설 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토록이나 많이 사회적 지도자를 자칭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어떻게 이명박이나 박근혜같은 사람을 대통령을 뽑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 아내가 한 일본인 할머니와 서울에서 음식점을 방문했다. 일본인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외국인임을 알아본 그들은 아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채 바로 바가지 요금을 부르더라고 한다. 아마 그 음식점 주인도 정치인욕을 하고 권력가진 사람들, 돈많은 사람들의 횡포를 비난할 것이다. 자기의 문제가 되면 욕을하고 비난할뿐 자신의 사고방식과 상식이 어떤 것인지 관심이 없다. 계속 이런 식이면 좋은 세상이 올까?


세상에 진짜로 듣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더 넓은 세상을 보려는 질문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저 자기 앞만 볼 뿐이다. 그들은 책을 뒤적여 답을 찾지도 않으며 눈을 들어 세계를 뒤져 도대체 뭐가 문제의 원인인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일상의 아픔이나 개인적 야망과 욕심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는 세상을 진짜 보고 들을 수 없다. 어떤 질문이 우리의 가슴에 있는가. 그것이 진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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