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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믿지 않을 것을 권하는 사회.

by 격암(강국진) 2010. 2. 5.

2010.2.5

 

우리는 불신을 권하고, 불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우리가 뭔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금기가 되는 시대다. 그런 행동은 당신의 어리석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뿐이다. 만약에 당신이 스스로를 지적인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당신은 당신이 회의론자라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까지 현실이 심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한번 꼼꼼히 따져보자. 오늘날 불신이 얼마나 찬양되고 오로지 믿어지는 것인지. 나는 특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것이다. 

 

우리는 마치 기계톱과 기관총을 든 어린아이와 같으며 너무나 강력한 회의론자의 무기들로 우리를 무장시키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뭔가를 믿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의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서 '바보야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거나 지적인 우월감을 보여주는 찡그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그저 작은 손짓 한번이면 상대는 피투성이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한 손에 가진 무기는 과학이라고 하는 무기다. 이 무기는 상대에게 확실성과 객관성을 요구하고 우리는 사물에 이 과학과 논리의 기준을 적용하여 그것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거나 믿기에는 증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무기는 굉장히 강력해서 사실상 불도저나 강력한 포탄이 어떤 장소를 폐허로 만들듯이 과학적 시각이 지나가고 나면 믿을 만한 것은 거의 남지 않는다. 대개의 것은 그저 주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명되기 때문이다. 

 

과학적 논리에 따르면 로맨틱한 감정은 사실상 착각에 불과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는 당신이 가진 물질을 좋아하는 것이거나 그녀의 유전자가 명령하는대로 화학적 반응이 명령하는데로 혹은 종족번식의 본능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설사 그녀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도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그녀 스스로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가?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말했을 때 그녀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믿는다. 도대체 뭘 믿는다는 것일까? 요즘 대부분의 경우 두 남녀가 만났을 때 그 둘이 서로에게 첫사랑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옛날 남자들과 다르다는 말인가? 그녀는 나의 옛날 여자들과 정말 다를까? 과거에도 나는 사랑을 믿었는데 그것은 깨졌다. 이번에는 다를까? '과학적'으로 말해서 사랑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체험적 증거가 있는거 아닌가?  

 

하지만 과학이 숭상되는 만큼 우린 과학적 사실만큼은 굳게 믿을 수 있는거 아닐까? 우리는 물질을 믿고, 과학적 법칙을 믿고 살아갈수 있는거 아닐까? 불행히도 이것도 그렇지가 않다. 일단은 정말 100% 확실한 과학적 사실은 생각보다 작다. 사실 그렇기에 많은 과학자들이 여전히 연구에 골몰하는 것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 인것은 절대적 진리라고 그리스 철학자는 생각했지만 그것도 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한 수학체계 내의 공리의 선택에 따른것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넘거나 안되면서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안되는 기하학이 가능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어느 기하학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확정적이 아니다.

 

수천년동안 동쪽에서 해가 떳으므로 내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다라는 것을 믿을 수있지 않을 까? 이미 흄이 이런 귀납적 논증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수백년전에 지적했다. 부동산이 지난 30년동안 올랐으니까 지금 아파트를 사면 10년뒤나 20년뒤에는 반드시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줄까? 일제시대에 해방은 영원히 올리가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평탄하게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당신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세상에는 믿을 것이 없다거나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마 남아있는 그 확실하고 객관적인 사실들도 사실 아직 모든 시험을 통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또 하나의 비판무기인 가치평가로 그 객관적 사실들을 공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다. 그것들이 비록 확실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들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한마디로 우리는 그런 일에 왜 시간을 쓰고 에너지를 써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산너머 버드나무골의 개똥이가 손가락이 6개든 꼬리가 달렸든 그게 나와 지금 무슨 상관인가.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은 가치라는 것이 평가되지 않는다. 가치와 관심은 모두 관찰자의 시각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다 제거한 후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확실한 사실은 가치중립적이다. 즉 가치를 평가할 수가 없고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걸 왜 신경써야 하는지 알 수 없어진 상태다. 그게 그런 것이 아닌것같아 보이는 것은 우리가 다시 주관적 평가를 재도입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다는 그걸 말이다. 

 

따라서 과학의 폭탄이 지나가고 나서 믿을 수있는 것중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언가라는 필터를 한번 적용하고 나면 우리는 사실상 빈손이 되고 만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철학자나 과학자 일 필요도 없다. 오늘날 냉소주의자가 되기는 아주 쉽다. 제대로 책도 읽지 않고 무슨 고상한 교양을 쌓은 것도 아닌 사람도 이 무기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쉽사리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낼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은 마치 책임은 지지않으려는 의사처럼 보인다. 그런 의사는 우리에게 이런 치료법은 이러저러한 장단점이 있고 저런 치료법은 이러저러한 장단점이 있다. 선택은 자유다. 네가 고르라고 한다. 무지한 우리는 의사가 추천하는 것을 하고 싶다. 그러나 의사는 네가 선택하라고 고집한다. 선택도 너의 몫이고 '책임'도 너의 몫이다. 이래서는 의사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지식인이 뭐에 쓸모가 있는가. 단지 아니라고만 말하고 최종적으로는 책임은 너의 것이다. 너는 자유다라는 말로 끝이 나고 만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러셀을 포함한 많은 회의론자들도 자신들이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믿음에 근거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짧은 말뒤에 서둘러 어떻게 우리는 회의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가하는 말을 길게 길게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믿는 일보다 믿지 않는 일의 중요성을 크게 높이 사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기독교나 불교가 이단시되는 사회에서 음성적으로 그런 종교를 믿듯이 가슴속에 자신들만의 근거없는 신념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것을 솔직히 꺼내어 밝히면 비웃음이라는 처벌을 받거나 눈앞에서 그 신념이 터무니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형벌을 받는다. 

 

조지오웰의 미래소설 1984년에서 주인공은 불법적인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처벌되지만 그 처벌은 단순히 총살되어 죽는게 아니다. 그는 실은 자신이 믿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 그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사랑이 얼마나 가치없는 것인가가 눈앞에서 증명되는 것을 보는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회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믿으며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위에서 기술한 오늘날의 세계와 묘하게 본질적인 차원에서 겹치는 데가 있다. 

 

이와같은 냉소주의,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세상을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모든 말과 관념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면 불안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다시 우리의 연인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우리는 사랑을 믿을 수 있는가로 글을 맺도록 하자. 우리가 두 사람의 사이의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는 일단 나와 저 사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란 변하지도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것이라고 기대한다. 여기서 나도 그녀도 고정되어 있고 사랑도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물론 이렇지 않다. 우리가 현실을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상대를 관념적으로 이상화시키는 것이고 상대를 어떤 다른 관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관념이 현실 그 자체라고 착각하고 그 다음에 그 관념이 틀린 부분이 있으면 그것에 절망하며 현실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진짜 현실은 우리 관념 이상의 것이다. 그 너머에 있다. 

 

우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독립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건방진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고정되어 있지않고 변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피부밑의 것 이상으로 피부바깥쪽의 것에 의해 정의되고 결정되는 존재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형의 동생이며 한국 사회의 시민이고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중의 하나며 포유류 중의 하나이고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들중의 하나다. 무엇보다 나는 나의 연인의 연인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풍선같은 존재다. 우리는 풍선의 안의 것 이상으로 풍선의 바깥 쪽의 것에 의해 그 모양이 결정된다. 안과 바깥의 균형이 우리라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그녀는 나에 의해 정의되고 만들어지면 나역시 그만큼 그녀에 의해 정의되고 만들어 진다. 우리는 고독히 진공을 나르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원자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존재하는 물과 기름의 경계면처럼 서로가 서로를 정의한다. 우리는 독립적이지 않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끌려 만나고 연인이 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한 현상이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특별한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서 생겨난 사건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하며 영원하지 않기에 오히려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은 살아있다. 그것이 기적이듯이 우리는 아직은 사랑한다. 그것도 기적이다.  

 

믿음은 생필품이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비록 영원한 진리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믿음이 필요없거나 믿음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한한 보편성의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자는 아무 것도 할 수없다. 나와 나의 생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무한한 공간과 시간속에서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기를 지키고 하루 하루 작은 벽돌을 쌓아올리듯 살아가야 한다. 회의론과 냉소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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