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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경제의 법칙과 윤리의 실종

by 격암(강국진) 2010. 2. 22.

2010.2.22.

 

많은 것들이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경제학적 관점이란 것은 대부분 서양에서 발달된 것이며 서양에서도 중세이후에 발전된 것이다. 서양에서도 중세시대까지는 사람들은 우리가 익숙한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라던가 통화량과 물가의 관계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금과 은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통화량이 늘어도 사람들은 물가가 상승하는 것을 서로의 이기심때문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농노들은 영주들이 지대를 너무 높게 받아서 물가가 올라간다고 말했고 영주들은 농노들이 비싸게 물건을 팔아서 물가가 올라간다고 비난했다. 

 

또한 이 시대에는 돈을 빌려주었을때 이자를 받는 것을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세익스피어의 베네치아의 상인에 나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는 이런 상황에서 씌여진 것이다. 즉 고금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자 자체가 사악한 것이며 노동한 것이 없는데 돈을 번다는 것은 나쁜 것으로 여겨진것이다. 물건의 값어치는 시장에서의 수요와 소비자의 쓸모에 의해서 정해지는게 아니라 그걸 만든 사람이 얼마나 힘을 들였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 이상을 받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다. 서구에서 경제활동이 윤리활동에 의해 지배받을때 그 윤리를 지배한 것은 기독교였다. 이렇게 보면 그 시대에 가장 부유한 집단, 가장 커다란 영주가 기독교집단이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교황은 전체 유럽의 3분의 1의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은 이런 상황을 바꾼다. 그들은 영주들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의 규칙이 온 세상에서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었다. 기독교의 세력도 약화되었는데 그들은 사실상 가장 큰 그리고 동시에 부패한 영주였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활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한 법 득 인간이 정한 질서대로 행해지는 것이 되었다.

 

더 커다란 부가 더 커다란 권력을 가져오므로 각국은 자국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한 중상주의를 실시한다. 그들은 부자가 되기위해 경제적 법칙을 찾고 그들이 찾아낸 것을 믿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면 부자나라가 될것인가. 그들이 믿은 법칙중의 하나는 금과 은을 많이 가진 나라는 부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러나라들은 금과 은을 수입하되 나라바깥으로 그것을 유출시키는 행위는 법으로 금했다. 

 

또하나의 법칙은 수출이 수입보다 많으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각국은 경쟁국들보다 더 많은 것을 수출하고 더 적게 수입할수 있도록 미개발된 산업에 보조금을 주고 식민지를 개발했다. 즉 그들이 믿는 경제적 법칙에 따라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그런 시대를 거치고 나서야 우리는 유명한 애덤 스미스를 만나게 된다. 

 

나는 경제학발전의 역사를 개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글에서 다만 한가지를 환기시키려고 한다. 위에서 기술한 흐름이 계속되어 오늘날의 경제학이 발전하고 사람들은 경제학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체를 개괄하면 윤리와 경제학의 관계가 상호 배척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제는 애초에 윤리적 행위였다가 인간의 주관이 끼어들 것이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되었다. 

 

다른 많은 학문이 그랬지만 경제학은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학문이 되기를 추구했다. 즉 그들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법칙, 관찰자로부터 무관한, 시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법칙을 찾는다. 그러나 사회학이나 경제학이란 처음부터 사회속의 학문이었기에 물리학에서와 같은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누군가가 주식시장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예측하는 객관적인 법칙을 알아내었다고 하자. 그렇게 했을때 그 예측때문에 주식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그 때문에 그 법칙은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 같은 것은 물리학에서는 비선형동역학이란 분야에서 많이 연구된 것으로 되먹임 혹은 피드백이 있는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 즉 케오스 상태가 된다는 것이 보여졌다. 다른 학문의 모범이 된 물리학의 경우도 그렇다. 물리학도 3체문제 즉 3개 이상의 입자를 동시에 고려하면 미래예측이 안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며 더욱 적극적으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관찰자를 배제한 주관적 이론이란 한계가 있다는 것을 20세기에 보였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경제학적 분석이나 예측 혹은 법칙은 통상 선형분석이라고 하는 상식적 기대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밀가루 값이 20%오르면 짜장면 값은 10% 오르고 밀가루 값이 10% 오르면 짜장면 값은 5% 오른다는 식으로 경제 시스템 내에 있는 여러개의 변수들이 서로 비례관계에 있다고 하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비선형적인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절벽위에 있는 자동차 같은 것이 된다. 5cm를 밀으면 아무일도 없지만 10cm를 밀었더니 자동차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완전히 파괴가 된다. 공황이나 부동산 거품따위는 선형적 이론으로 설명할수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래프를 그리고 직선으로 연장선을 그어서 미래를 예측한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이란 사실 많은 과거의 사례중 오늘날의 현실과 비슷한 것을 임의로 찾아서 선형분석으로 약간 변화를 주고 미래를 향해 직선을 긋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경제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는 목소리는 세상에 가득하며 이때문에 경제학이 우울한 학문이라고 있다.

 

경제학의 무능은 둘째로 두고 이 객관적 법칙의 존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어떤 윤리적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가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부동산 거품이 존재하는가 같은 문제에 대해 토론회를 열면 서민의 입장에서 과도한 부동산 거품에 대해 우려하는 쪽과 주로 부유한 자들의 편에 선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갈라져서 토론을 벌이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그런데 많은 곳에서 그렇듯이 거기에서 우리는 묘한 것을 느끼게 된다. 시장주의자들은 경제학적 법칙은 객관적인 것이며 거기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식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종종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당위가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를 대세요라고 쏘아 부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뭘까? 바로 그들이 믿는 어떤 경제적 법칙이다. 이 객관적 경제법칙의 존재는 윤리적 문제를 증발시키는 효과가 있다. 

 

사실 경제학 법칙이란 애초에 존재하기나 하는지가 의심스러운 것들이 많다. 그들은 그들이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대로 과거나 외국의 사례 중 하나를 선택해서 무리한 '선형분석'을 실시하고 그걸 전문가의 의견 내지는 객관적 법칙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법칙들이 우리의 양심을 가려버리는 효과가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악용될까는 자명한 일이다. 이제 부동산 투기 같은 분명히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대재앙을 논할때도 경제학적 시각이란 윤리적 시각을 배제하는 장벽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라는 말에 넘어가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고 윤리적 시각을 배제한다. 세상에는 비극이 넘쳐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특히 내잘못도 아니며 그저 그 알량한 법칙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얇팍한 지식이란 무서운 것이다. 

 

시장주의자들이 근엄하게 객관적이며 윤리적으로 중립이라고 생각하고 믿는 경제학적 법칙이란 실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무한히 탐욕적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그 경제학적 법칙은 복잡하게 가장된 이기주의의 옹호에 불과하다. 나는 너의 것을 빼앗아 너를 굶겨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경제학적 법칙이 너의 것을 빼앗아 너를 굶겨죽이는데 그것은 나와는 윤리적으로 얽혀 있지 않은 객관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적 법칙이란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행동한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경제학 법칙이므로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어허 주관적이고 당위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고 우리 객관적으로 이야기하자고 한다. 경차를 모는 서민이 내는 보유세와 강남 수십억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내는 보유세의 세율을 정하는데 어떤 객관적인 법칙이 있는가. 

 

경제 사회적인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상당부분이 윤리적인 문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경제학은 객관적 경제학 법칙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경제학적 문제는 심리학의 문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미래는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경제 사회적인 문제는 결코 윤리문제에서 벗어 날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 윤리가 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우리가 이 윤리를 단순히 어떤 고정되어 성문화되고 관습화된 법규로 이해할때 고정된 윤리는 자유로운 경제적 발전을 막게 된다. 중세 기독교가 그랬듯이 윤리적 권위를 붙잡고 타락하는 집단이 나오며 합리주의가 배격되게 될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리문제를 경제 사회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비이성적인 것이다. 우리가 페라리 같은 자동차를 사거나 1-20억씩 하는 아파트에 투기하는 것이 합리주의일까? 우리가 이웃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논리적 계산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공리주의는 매우 얇팍하여 우리에게 충분한 윤리적 바탕이 될수가 없다. 

 

윤리의 문제는 비논리적인 것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애매한 것임을 부정할수 없지만 서둘러 그런 것들은 헛소리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말자. 그것은 현대 과학주의에 세뇌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이아몬드도 돌이고 자갈도 돌이다. 비논리 비합리는 모두 가치 없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경제학적 논의란 종종 뭔가 핵심을 빠뜨리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제문제에 신경을 쓰고 더 많은 정보, 더많은 경제학적 법칙과 이해에 목말라 하고 있다. 내년 부동산 경기는 어떻게 될것인가, 미국의 경기는 어떨 것인가, 물가 동향은 어떻고 교육비는 어떤 인상요인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식이다. 그러나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법칙속에서 가치에 대한 시각은 더더욱 쉽게 실종되어 버릴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그 부자처럼 내가 너의 것을 빼앗는 것은 경제학적 법칙이라서 그렇다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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