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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노동의 가치, 효용의 가치

by 격암(강국진) 2010. 3. 1.

10.3.1

경제를 논하는 것은 결국 노동, 재화, 상품들같은 여러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교환되고 축적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는 이런 각각의 경제요소들의 가치가 어떻게 되나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가치들이 어떻게 교환되고 축적되는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가치설은 농노를 착취하는 지주계급을 공격하기 위해 즉 농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고전경제학의 대가인 리카르도가 고안하고 사용했다. 노동가치설이 말하는 것은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한 시간 걸려서 만든 것은 두 시간 걸려서 만든 것의 절반의 가치가 있다. 

 

후일 마르크스는 자본가를 공격하기 위해  그것을 쓴다.  이제 역사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전에는 산업, 상업세력이 개혁세력이었다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회기득권이 된 부르조아 자본가 세력은 이제 생산능력이 없이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부르조아 세력을 무찌르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며 노동의 착취에 대한 당연한 댓가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물질 생활의 생산 양식이 경제구조라는 진정한 토대위에서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발생하며 사회적 의식의 일정한 형태는 이 토대에 조응한다. 물질 생활의 생산양식이 삶의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과정의 일반적 성격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새로운 경제학이 등장한다. 이것은 지금도 세계 경제학계를 주도하는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이 한계효용설이다. 노동가치설과는 달리 한계효용설은 자본가를 옹호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인간의 의식이 그 주장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한계효용설과 노동가치설의 차이는 하나는 가치가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반면 후자 즉 노동가치설은 가치는 노동의 양이라는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한계효용설에 따르면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어 낸 노동의 양과는 무관하고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소용이 되는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상품이라도 그 상품이 무한히 흔해서 구하기 쉬운 경우 가격은 한없이 내려간다. 물이나 공기처럼 말이다. 

 

야구배트가 5개쯤 있는 상황이라면 6번째 야구배트를 사는데 큰 돈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야구배트를 만들어 내서 팔려는 공장은 야구배트의 가격을 현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가격으로 정해야 하며 이것은 야구배트의 한계효용에 의해 결정된다. 야구배트를 사려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은 올라갈 것이고 없으면 떨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한계효용식의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불노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을 봐도 우리가 그것을 비판하지 이유는 이때문이다. 노동의 가치는 한계효용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몇시간 노동했는가가 그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365일 잠도 못자면서 일해도 끼니를 때우기 어려울 정도고 누군가는 아무일도 안하는 것같은데 엄청난 사치를 누린다. 한계효용설은 후자의 노동의 가치가 전자보다 작다고 할수 없다고 말한다. 서로 하는 일이 다르다. 

 

자본주의는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점점 덩치를 키운다. 즉 사방에서 독점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는 한계효용설의 논리와도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과도한 생산을 하게 되면 상품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니까 독과점을 해서 시장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서 돈을 버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계효용설이라는 시각자체가 독과점을 정당화하고 격려하는 면이 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생산하면 돈을 번다고 생각하지 마라. 가치는 시장의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경쟁자를 없애고 독점을 해라. 이런 결론으로 쉽게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노동가치설과 한계효용설의 경쟁은 이미 끝나버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오늘날 시장경쟁에 의해 물품의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여배우가 입었던 옷한벌의 가격이 매우 비싸도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분명 생산원가는 그리 비쌀 수 없는 아파트들을 비싸게 팔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비싸게 팔리는 것이다. 물질로서의 회사는 그대로 있는데 주식이 열배 백배씩 폭등하는 것을 봐도 우리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평등, 복지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노동가치설에 따라 사고하기도 한다. 왜 최저임금제가 필요한가. 노동자가 얼마든지있다면 노동의 가치는 무한히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왜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는가 수용와 공급논리로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사람의 피땀을 흡수하고 있지 않을까? 불노소득은 비판받는다. 여전히 노동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경제를 논하는 것은 결국 가치의 흐름을 논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상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볼 것이다. 그러나 금본위제가 붕괴하고 급격한 환율변동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 보여주듯이 돈에도 거품이 있다. 돈과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세상을 부동산 중심으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부동산이 아무리 올라도 거기에서 거품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동산이야 말로 흔들리지 않는 가치의 잣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치와 부동산간에 괴리가 느껴지고 그걸 우리는 부동산 거품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오늘날 노동가치설을 말그대로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김연아가 몇분 스케이트 타는 걸 가지고 몇분 노동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가. 그녀가 상업광고에 나와서 몇번 웃는 것으로 거액의 돈을 번다고 해서 그녀를 비난할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걸 위해 김연아라는 천재가 필요하고 김연아가 수년간 흘린 땀이 필요하기에 그 몇분의 노동은 몇분의 노동일 수 없다. 

 

경제활동의 핵심문제는 올바르게 가치를 교환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그 교환을 쉽게 하기위한 척도로 주로 쓰이는 것이 돈이다. 그러나 세상은 끝없이 추상적으로 변하고 돈도 추상적인 물건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가치의 교환과 현실 세계는 때로 큰 차이를 보일 때가 있고 어떤 때는 가치에 대한 직관자체를 잃어버린다. 더이상 뭐가 공평한 것인가를 알 수가 없어졌다.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일수록 황당한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공평한 사회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지옥을 만들어 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 기재부장관인 강만수가 강남의 부동산 소유자들이 내는 세금때문에 가슴에 못이 박혔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한다. 수억대의 아파트 가진 사람들이 내는 세금에 그렇게 가슴이 아프면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 못가는 학생들은 어떤가, 살던 곳에서 쫒겨나는 재개발의 피해자들은 어떤가. 강만수의 감성으로는 그런 건 그렇게 당하는 것이 공평한 것이다.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한쪽에서는 사람이 굶는데 저쪽에서는 음식을 버리기 바쁘고 한쪽에서는 공장이 노는데 저쪽에선 물건이 없어서 고생한다. 수많은 사람이 낭비하면서 살고 수많은 사람들이 극단의 가난함속에서 산다. 그리고 부자던 가난한 사람이던 대부분 불행하다. 우리는 어떤 잣대로 가치를 측정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가.  표면적인 논쟁에 몰두해도 그 아래에 있는 심층적인 부분에서 혼란이 있으면 그런 논쟁은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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