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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과 특수성

by 격암(강국진) 201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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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5.20

 

오늘은 다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분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가지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론으로만 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특수성을 인식하고 그걸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은 한국이고 미국은 미국이고 이것은 이것이며 저것은 저것이다. 즉 정체성은 뻔한 것이며 그냥 주어진 것이다라는 사고는 위험하다. 우리는 내가 누군지, 우리가 누군지를 능동적으로 발견하고 주장하며 지켜야 한다. 정체성은 나나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세상의 것들은 대개 엄격하고 분명한 경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강과 숲이 만나는 곳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강을 일러 강이라하고 숲을 일러 숲이라 한다. 왜냐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경계는 불분명하다. 계속 숲이 이어지는데 거기 어딘가에 임의적으로 선을 긋고 딱 여기까지가 숲이고 저곳은 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렇게 할 의미도 없고 구분의 쓸모가 없다. 

 

숲이나 의자같은 사물도 그렇지만 나와 너같은 인간도 그렇다. 당신은 누구이며 뭐가 당신인가? 당신의 팔다리와 몸통이 당신이라면 만약 당신이 팔을 잃어버리면 당신은 이제 더이상 당신이 아닌 것인가? 설사 그런 극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는 외부로 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흡수해서 몸안의 세포를 계속 교체하고 있다. 자기의 몸을 가르키며 이게 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엄밀한 선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선택하고 발견하며 그걸 지킨다. 우리라는 것에는 물질과 관념 모두가 포함된다. 당신의 머리카락은 당신의 일부인가? 그러므로 상투를 자르느니 죽겠다고 할 수도 있는가? 육체적 순결이라는 개념은 어떤가? 그런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인가? 성형수술이나 문신을 하는 것은 별거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는 행위인가? 어떤 사람들은 수혈을 거부하고 과거에는 심장이식수술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경찰관이나 가장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사회적 정체성이 홰손되면 자신은 더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자나 자식을 내 일부로 생각해서 그들에 대한 과도한 지배욕을 가지는 경우도 우리는 본다. 국가를 배신하느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뭘 포기할 수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마치 우리 몸속의 뇌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인식은 우리를 조금씩 바꿔나간다. 그래서 사실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편의상 같은 사람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했고 또 많은 것을 새로 얻었다. 그래서 같은 선택의 앞에 섰을 때 10년전의 나 혹은 30년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나 야망에 인생을 걸어본 사람은 그 사랑과 야망이 지나고 나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부모가 된 청년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하나 하나의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우리는 예전이라면 전혀 하지 않을 행동과 선택을 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공동체이건 생명체는 모두 나와 나 아닌것에 대한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존재를 계속 할 수 있다. 지도를 펴고 의미없는 둥근 선을 그은 후 그 선안의 지역을 우리 맘대로 부르기로 한다고 하자. 공공시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은 공허하다. 이 지역의 의미를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그걸 지키려고 하는 사람도 없으며 지킨다니 뭘 지켜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경상도와 전라도가 지역감정을 가지고 한국과 일본이 역사문제로 다툴때 그것은 이런 허무한 것과는 다르다. 어찌보면 그것도 역시 관념적인 문제지만 그것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며 누군가가 비극을 겪을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한국 사람에게 도대체 한국적인게 뭐냐고 물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은 미국적이란것과 혹은 일본적이란것과 한국적이란것의 차이를 전혀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뭘 지키겠는가. 뭘 잃어버리건 부수건 태워버리건 크게 안타깝게 생각할까? 남대문이 불타면 어떤가. 더 깨끗한 걸로 잘지으면 되지. 한국문화와 중국문화가 차이가 뭐가 있나. 그러니 한국에 사람이 부족하다면 중국사람 천만명쯤 불러오면 되지 않을까? 

 

팔만대장경이 뭔가. 그냥 오래된 나무판이다. 기독교도인 어떤 사람이 나는 불경의 가치를 믿지 않으며 팔만대장경따위 불타던 말던 뭐 그게 큰 손실인가라고 말하는것도 상상 가능하다. 실제로 바미안 석굴을 폭파했던 탈레반정권도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은 정체성의 문제고 나는 타인과 우리 집단은 다른 집단과 뭐가 다른가, 뭐가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다. 

 

이렇게 정체성 문제는 우리의 삶의 핵심적 문제인데도 세상에는 보편적 발전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보편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건 특수를 보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서구의 발전을 보편적 발전으로 놓고 그 이외의 문명들을 서구의 역사대로 해석하는 시각을 발견한다. 즉 서구라는 특수를 보편으로 인식하는 시각이다. 부자나라가 우리는 산업발전을 이러저러하게 겪어서 여기에 이르렀는데 가난한 너희는 우리보다 후진국이며 따라서 우리를 따라야 하고  '우리와 똑같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두는 보편적으로 똑같이 발전하며 보편적 윤리라는 게 존재하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선진국을 복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문화권, 어떤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때 그 공동체는 사라진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세계는 점점 더 큰 공동체로 통합되어 오지 않았던가? 신라와 백제의 정체성 운운하면서 저쪽 지역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우리끼리 살자는 식의 이야기만을 하는게 언제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건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선택이다. 그것도 당연하지는 않은 선택이다. 우리는 합의와 의식적 고민끝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특수성들을 포기하고 누군가를 복제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인가. 그런 무의식적 선택들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나로 뭉치려고 하는 유럽도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경제난이 일어나니까 독일국민들은 왜 우리가 그리스를 도와야 하는가 라고 불만이 많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미국인은 어떤가? 그들이 한국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할까? 우리가 한국인의 인권을 생각하는것과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한국인의 인권을 생각하는게 비슷이나 할까? 우리는 인도네시아나 중국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인권을 생각하면서 그런 회사들의 제품을 거부하고 있는가?

 

고민할 것, 지켜야 할 것은 참 많다. 당연한 것이고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의 선택은 중요한 결과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민족, 우리나라는 오직 우리가 누군지 알 때 우리와 타국과의 차이에 대한 핵심적 이해를 유지할 수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편협한 쇄국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없이 자기성찰에 근거하여 한국인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다듬어야 한다. 한국인이란 순혈주의 혈통을 말하는것인가? 한국인이란 김치를 먹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한국인이란 가부장적으로 여성평등에 반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자기성찰의 결과 자기 존재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기에는 우리의 수준도 우리 주변환경의 수준도 너무나 준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 우리의 윤리를 가다듬되 우리 나름으로 주체적으로 그걸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외국과 우리의 차이가 될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이 되고 우리의 특수성이 된다. 

 

이런 점을 완전히 무시하면 입만 열면 프랑스는 어떻고 독일, 미국, 일본은 어떻하니까 우리도 이래야 한다는 이야기로 너무 쉽게 나간다. 세세한 걸 그냥 복사하려고 한다. 물론 폐쇄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현실, 한국의 정신과의 조화도 필요하다. 자기를 모르는데 조화를 어떻게 알겠는가. 한국에 디즈니랜드가 생기고 차이나타운이 생기는 것 자체는 일반적으로 말해 좋은일도 나쁜일도 아니다. 문제는 조화다. 혼자서 좋은 음은 없다. 화음이 있을 뿐이다. 그 느낌이 필요하다. 우리의 특수성,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국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 애착이 없는 냉정한 지성이 이끄는 곳은 결코 한국 민중들에게 바람직한 미래가 아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넓혀나가고 우리가 환경과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 더 넓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쉽사리 나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될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누군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목소리에 스스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언가가 독립적으로 혼자서 좋은것 나쁜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어떻게 조화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럴때만이 우리는행복해질것이다. 누군가의 복제품이 되어서는, 열심히 발전하여 결국 누군가와 똑같아질 수 있다는 식의 발상으로는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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