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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는무엇인가'로 시작하는 말의 위험성

by 격암(강국진) 2010. 6. 17.

10.6.17

칼 포퍼는 말의 의미들을 따질 때 지성이 파탄나게 된다고 말한바 있다. 하나의 문장이 가지는 의미는 각각의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함수라고 생각하고 각각의 단어의 의미를 따지고 드는 식의 사고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의미의 엄밀성을 따지려고 하는 시도가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거나 그런 식의 화법을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특히 사회과학을 한다는 사람, 운동권쪽 사람, 진보주의자들 뭐 이런 사람들이 이런 화법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혹은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답을 하고 토론을 하는 식으로 사고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나는 칼포퍼의 지적에 공감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런 질문들은 일종의 세뇌의 방법으로 씌여지고 있다. 당신이 만약 누군가에게 신이란게 뭔지 알아? 라던가 사민주의 혹은 꼬뮨주의가 뭔지 알아 라고 질문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자. 대개의 경우 이런 질문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대개는 그렇게 묻는 이유가 내가 모르니 너에게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게 뭔지 알고 있는데 너는 이게 뭔지 아는가하고 묻는 것 같은 형식이 되는데다가 그 답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 답을 기반으로 중요한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점심때 뭘 먹을까를 생각하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마음속에 짜장면을 먹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우리 뭘먹을까하고 묻는데 같이 가는 친구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너는 점심이란게 뭔지 알아? 황당하다. 종종 우리는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는 점심이란 말의 유래라던가 점심이 어떻게 먹어져왔다는둥 하고 여러가지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우리는 대개 그의 말들이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이어지는지 확신하기 어렵고 언급하는 여러가지 사실들이 얼마나 확실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속 그런가 그런가 하다보면 이제 그 친구는 점심이 뭔지를 '정의'한 사람이 되고 나는 이제 내가 잘모르는 그 점심의 정의를 얼떨떨하게 받아들인 상황이 되기 쉽다. 이쯤되면 점심으로 뭘 먹을지는 그 친구맘대로가 된다. 왜냐고 물으면 점심이란 본래 그런거라고 답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점심이라는 화제로 코믹하게 글을 썼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점심이란 말대신에 사민주의라던가 공화정이라던가 민주주의같은 말을 집어넣고 생각해 보라. 이게 적어도 과거에 운동권 선배가 후배를 세뇌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후배는 선배가 끝없이 던져주는 책들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선배의 충실한 노예가 되기 쉽다. 지적인 노예다. 

 

불행한 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논법을 써서 다른 사람들을 지적인 노예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 자칭 타칭 진보주의자들의 화법에 불쾌감을 느낄 때가 있다. 말이란게 본래 매우 부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인데다가 대개 사회과학분야의 말이란 번역어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란 무엇인가. 그 이미지를 보면 자연주의란 마치 우리 자연으로 돌아가서 평화롭게 살자는 뜻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초자연에 대한 반대로 자연이다. 즉 초자연적인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기반으로 사고하자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설명한 자연주의의 뜻이 정확한가 아닌가는 이 글의 본래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짮은 설명 안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오류가 쉽게 생길 수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듯해 보이지만 완전히 뒤틀어진 정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과학적 논의에서 누군가가 코사인함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연구할 수 있다. 수학적 정의는 분명하기 때문에 쉽게 그 의미가 밝혀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돌아와서 코사인함수를 사용하는 응용의 예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논의에서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엄밀하게 말해서 결코 끝나지 않는 바닥없는 우물이며 논의가 길어질수록 논리적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내가 전에 쓴 간단한 확율계산에서 배우는 지혜라는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7386 )

 

계급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른다. 신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른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른다.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문학적으로는 확실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책 좀 읽으신 분들은 쉽사리 다른 사람에게 너는 이게 뭔지 아냐고 도전장을 던진다. 무엇이 뭔지 아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계몽주의나 모더니즘의 전형적 병폐다. 그 병폐에서 히틀러가 나오고 세계대전이 나오고 공산독재가 나오고 파시즘이 나왔다. 우리는 결코 뭐가 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다양한 측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각자 논의될 수 없다. 

 

따라서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필수불가결하게 우리는 직관적이고 감성적 이해가 필요하다. 미인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아무리 오래 논의해도 정의는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비교할 때 여러가지 논리적 분석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에 앞서 자신이 올바른 정신상태, 올바른 마음자리를 가졌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두명의 친구가 있다. 한 친구는 뚱뚱하고 말도 못하고 먹으러 나가면 돈을 내는 법도 없다. 다른 친구는 생각해보니 그 친구도 그렇다. 그런데도 나는 한 친구는 매우 좋아하는데 다른 친구는 질색이다. 차이도 있지만 같은 점도 많은데 그렇다. 

 

여기 감과 사과가 있다. 둘다 둥그렇게 생겼고 둘다 빨갛다. 하지만 맛이 틀리다. 이 맛을 느끼는 감각이 없다면 감과 사과의 차이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여기 두개의 정부가 있다.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정부. 우리는 너무 쉽게 두 정부가 같은 정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너무 코를 바싹들이대고 논리와 정의와 숫자에만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그럼 아주 자명한 사실, 아주 많은 국민이 당연하게 느끼는 차이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그건 이명박 정부와 참여정부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 차이가 아주 아주 크다는 사실이다. 참여정부가 뭐든지 좋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다만 아주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를 느낄수 있는 것. 그게 중요하다. 그걸 당연한 것이나 사소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과소평가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결국 쓸모있는 이야기는 뭐하나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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