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한국인은 왜 자살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0. 7. 5.

어제는 일본방송에서 최근 자살한 한국의 연예인 박용하에 대한 보도를 하는 것을 우연히 잠깐 보았다. 거기서 지적하는 숫자하나에 나는 새삼놀랐는데 그것은 최근 3년간만해도 한국에서 연예인 자살이 12건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이름이 한둘이 아니다. 사실 한국의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계속 지적되어왔다. 그것도 그냥 높은 정도가 아니라 OECD1등이나 세계 최고를 다투는 수준으로 높다. 


그런데 한국인은 왜 자살할까. 


이점에 대해서 몇가지 이유들을 드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하나는 소득불균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http://j.mp/994EPG  을 보라.) 또하나는 노인 소외현상으로 노인계층의 자살이 워낙많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읽은 적이 있다. 다들 나름의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느껴지는 것을 써보고 싶다. 


사실 자살을 절대적 빈곤이나 상대적 빈곤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빈부의 격차가 늘어나고 있고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적 수준으로 볼때 더 힘들게 살면서도 자살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절대적 빈곤에서 해방직후의 가난함보다 아래일리가 있는가. 상대적 빈곤도 그렇다. 한국의 빈부격차는 증대하고는 있지만 중국이나 미국 남미국가 같은 나라들에 비교하면 사실 빈부격차는 적다. 단순히 자살율은 그런 수치들의 함수로 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다. 


나는 자살률은 어떤 한 측면에 대한 수치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전반의 문제 혹은 사는 방식 전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인은 전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더이상 살아갈 힘을 내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빅터 프란클은 인간이란 살아갈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갈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또한 너무나 쉽게 죽는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의미를 쉽게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방식이 지극히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을 어떤 다른 것과 연결지어 어떤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것이 거의 없거나 매우 단조롭다는 이야기다. 그럴때 낙담의 순간 자신의 존재의미는 한없이 약한 한줄의 실에 매달린 위험한 상태가 되고 만다. 


한국은 본래 가족적 질서와 가치를 매우 강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실 어떤 사람이 최악의 순간에 이른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기는 쉽지 않다. 직업이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내가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사실, 내가 아이들의 부모라는 사실, 내가 무슨 집안의 누구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 내가 죽으면 안되는 사람이 사방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웃의 정도 깊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나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곤했다.   


우리는 나를 나와 나아닌것이 만나고 부딪히는 순간속에서 알아가기 때문에 나의 존재의미는 상당부분 이 나와 나아닌것들과의 관계속에서 만들어 지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주의와 배금주의만이 지독하게 퍼진 현재의 한국이다. 전통적의미의 가치와 인간관계는 살벌하게 파괴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성냥갑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피차 귀찮아하기 일쑤다. 그나마 복도식 아파트는 남의 집앞을 지나가야 한다. 요즘은 마치 러브호텔이라도 들어가듯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 집현관앞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내가 드나드는 것을 알수없고 남이 어떻게 사는지도 나는 모른다. 


입시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가 사회를 가득채우고 있다. 존듀이는 한교실에서 모든 학생들이 같은 교과서를 보면서 공부하는 것을 학생들의 사회성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한적이 있다. 왜냐면 학생들은 모두가 같은 것을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서로 대화하여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되며 사실은 서로를 경쟁의 상대, 이겨야 하고 넘어서야 하는 상대로만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다같이 합창을 하는 것을 상상하면 그 차이를 느낄수 있다. 합창은 내가 노래를 잘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역할을 하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것에 대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함께 뭔가를 이뤄나간다는 정신을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서로 힘을 합쳐야 하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합창은 실종되고 찢어지게 독창을 해서 홀로 이기겠다는 분위기만 팽배한 것은 아닌가. 


요즘은 어딜가나 그렇지만 대기업을 봐도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인다. 취직하기도 어렵지만 취직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 많은 신입사원중에 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아서 과장이 되고 부장이되고 임원이 될것이다. 나머지는 회사를 나가야 한다. 이것은 서로 도와서 뭔가를 이뤄내는 상생 혹은 시너지효과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제로섬게임 즉 내가 이기자면 너는 죽어야 하는 그런 게임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입시공부에 매달린다. 공부는 그냥하는게 아니라 다른 걸 하는 시간에 그공부를 하는 것이므로 아이들은 더욱 개성없는 바보가 된다는 이야기다. 명문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되서 고민이다. 이것은 경쟁의 피라미드가 더더욱 가혹해 졌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열심히 전통적 가치의 발전적 계승이라기 보다는 간단한 파괴를 택한다. 문화를 포기하고 싸구려 문화를 들여와 값싸게 소비한다. 전국의 축제행사는 서로서로를 복제한 특징없는 모습인데 이는 오늘날 한국 사람의 삶이 그렇게 특징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만 붕어빵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붕어빵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문방송이나 국회의원들은 경쟁력제고를 외치며 경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이다.  대학도 경쟁을 높여서 회사처럼 더더욱 경쟁을 하는 것이다.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는 광고카피는 이제 악마의 저주처럼 들린다.


이와중에 한국은 다양성을 잃어간다. 소수는 설자리가 없다. 경쟁에 진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뜻한바 있어 훌쩍떠나 5년 10년을 다른 일을 하다가 배우고 돌아온것으로 다시 인생길을 시작해본다는 식의 일탈은 한국에서는 꿈꾸기 어렵다. 경쟁은 가혹하고 이때문에 엘리트 코스는 대학입시가 그러하듯 탈락자를 만들어내기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아 진다. 다른자는 패배자가 되고 굴욕적 삶을 살아 마땅한자처럼 취급된다. 


삶이 단순해지고 외로워질때 우리의 삶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가느다란 실에 달려있는 상황이 된다. 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같은 곳에서 경쟁하는 것이나 자본주의는 배우지만 사회적 책임을 진다던가 공공의식같은 것은 거의 배우지 않거나 못한다. 의식적으로 방송 언론이 돈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편파적인 이야기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나어릴적에는 미국 사람들은 교통질서도 잘지키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같은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선진시민의식이란 주로 그런걸 말한다. 록펠러가 거대한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던가 미국의 정부가 얼마나 많은 돈을 복지를 위해 쓰며 그런것을 부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가를 이야기했던 적은 없다.  군대도 안가고 기부도 안하면서 돈은 많이 번 부자들이 공직에 나와서 나를 뽑아달라고 해서 당선되고 총리도 하고 장관도 하는 그런나라에 살면서 그런 것을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미국적 개인주의는 퍼지지만 그 개인주의는 미국적인 것도 한국적인 것도 아닌 그저 배금주의적 이기주의다. 사회적 책임이 사라지고 없다. 공동체와 나와의 관계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그저 문제 생기면 성금잘내고 규칙이나 잘지키라는 노예적 윤리교육만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도 아니고 미국적인 것을 제대로 배운것도 아니니 이제 남은 건 로또처럼 사는 것밖에 없다. 


사는게 로또다. 한방에 커져서 잘살면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다. 사업이나 출세의 실패는 바로 인생의 의미의 실종으로 간다. 그만큼 빈약한 가치를 가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것은 전성기가 짧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 분명히 인생의 전성기를 지나보낸 노년들 그리고 도저히 사교육비와 인맥으로 출세의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가난한 젊음들에게 시커먼 절망을 줄것이다. 사는게 의미가 없다. 남은 것은 그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패배를 오래오래 씹으며 괴로워하는 것뿐이고 다시 잘나가는 삶을 살, 혹은 한번이라도 잘나가는 삶을 살아볼 가망이 없다. 사람은 직업적 실패로 인한 불편함 보다는 그 부끄럼을 참을수 없어 한다. 살아있는 동안 내내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악몽적 수치처럼 느껴진다. 


살아갈 의미를 잃은 한국인은 이렇게 해서 자살하고 만다. 


이런 삶을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높은 지식과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지식인들은 강제로 혹은 자의로 침묵하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들은 뭔가를 더 짜내보겠다고 그것을 뒤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것이 더더욱 강하게 강조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것 뿐이다. 


결국 우리는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 보다 충만하게 살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고 살아야 한다. 남과 다르게 살때 나는 결코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될수 없는 이세상 단하나뿐인 존재로 느끼게 되기 쉽다. 나의 가치는 내가 벌어들인 돈이나 내가 올라간 출세의 사닥다리의 높이로 결정되는게 아니다. 아무도 야구나 스타크레프트를 잘못하면 내인생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돈이니 출세니 하는 것, 세상이 중요하다고 떠드는 것중에 얼마나 야구나 스타크레프트 같지 않은 것이 있을까. 


콘크리트 아파트가 무너지고 그 땅에 다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고 물이흐르고 꽃이 피는 것을 상상한다. 그안에서 이웃집 사람들이 담너머로 보이고 오다가다 파전조각이라도 나눠먹는 정이 흐르는 것을 상상한다. 우리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씨름대회건 윷놀이 대회건 열어보고 무더운 여름철이면 커다란 나무밑의 평상에서 더위를 식히며 수박이라도 쩍쩍갈라 너도 나도 나눠먹는 인심을 보이는 것을 상상한다. 


친구가 학교에서 굶어도 네도시락은 그친구주지 말라고 말하는 학부형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한국의 자살율이 높은게 아주 당연해 보인다. 그 부모들은 외로워지는 것은 그 가난한 아이하나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런 문화속에서 외로워지는 것은 모두다다. 친구하나 없이, 사랑도 우정도 나누지 못하며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 무서운 감옥이다. 자살을 통해 탈옥을 꿈꾸게 될만큼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