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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 같은 정치인, 사람이 좋은 정치인

by 격암(강국진) 2010. 8. 27.

사례 1

어떤 사람에게 두사람의 정치인을 비교하며 물었습니다. 이 두사람의 공약과 정책이 완전히 똑같습니다. 이 두사람이 당선되면 어느쪽이되든 똑같을까요? 

제가 경험하기로는 세상경험이 적고 공부한게 많은 사람들이면 대개 당연히 이 둘은 똑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경험이 많고 책읽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크게 학벌이 높지 않은 분들은 당연히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인물중심의 정치가 우리나라정치의 한계라면서 정책중심으로 바꾸자고 하는 말도 세상에는 흔합니다만 사실 그 이야기도 대개 세상 경험이 적고 공부한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얻습니다. 적어도 세상의 상당수 사람들은 사실 말을 어떻게 하건 실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을때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180도 다를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건 직관을 통해서건 압니다. 

이명박대통령이 FTA하는 것과 노무현 대통령이 FTA 하는 것은 같을까요? 두사람이 파병을 하면 파병을 했으니까 같은 걸까요. 저는 반드시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둘은 정말 하늘과 땅처럼 다를수도 있다는 점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례 2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 그사람은 사람은 좋은데 나랑 정치적 견해가 달라. 아 그사람은 나와 같은 정당에 있는 사람이지만 정말 옆에 가기도 싫어. 좀 배웠다는 사람일수록 사람은 좋은데 부분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더더 말과 주장에 집착하며 종이에 씌여진것에 약합니다. 그리고 말로 잡히기 어려운 것들은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따위 보다는 사람이 좋은데 부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부분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며 입으로는 무슨 말을 하건 거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행동이며 나와 같은가 다른가를 떠나 나에게 납득이 되는가 안되는가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행동을 하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직관적으로 감성적으로 와닿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종 합리주의자들로 부터 무슨 빠니 광신도니 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사례 3

여기 독일에서 멋지게 돌아가는 지하철 운행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보고 그 시스템의 우수성에 감동받아서 그 시스템을 들여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될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가지 측면이있습니다. 하나는 시스템이고 또하나는 사용자입니다. 시스템이 후져도 그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문화가 훌륭하면 엉터리 시스템속에서도 우리는 쾌적한 지하철 타기를 즐길수 있습니다. 반면에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상식이 없거나 그 시스템이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 지하철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는 것

제가 자주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정말 이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책중심의 정치를 해야 하는가 인물중심의 정치를 해야 하는가, 정치적 신념이 중요한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인것이 중요한가, 시스템인가 사람인가. 사람들은 저마다 한쪽을 택해서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 양자를 기계적으로 아무 기준도 없이 평균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스템과 사람을 각각 보면서 두개의 독립변수처럼 둘다 중요하고 둘다 잘 관리하자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모든게 답이 아닙니다. 시스템과 사람은 본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삶의 신념은 삶의 형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실질적 힘이 형태와 논리와 시스템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형태같은 유형적인 것은 신념을 모두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없이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시스템을 넘어설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너무 시스템따라하면 '뻑뻑한' 인간이니까 적당히 대충 법도 어기고 대충대충 기름칠 해서 세상 굴러가게 만든다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법과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기계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시스템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내적 중심에 신경써야 합니다. 

일단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시스템을 해체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근거없는 상식, 문화, 인과관계를 지워버리고 벗어버리고 꽤뜷어봐야 합니다. 과학의 한계를 진짜로 알아야지 과학으로 부터 도망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엄정한 시스템을 우리의 노예로 부릴수가 있습니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일제고사를 보고 성적을 발표하는 것은 경쟁을 과도하게 부추키고 학생들을 괴롭히며 올바른 교육을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제고사보고 성적발표해도 학생들을 올바르게 키울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교육을 그것과 함께 할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스템이 전부가 아닙니다. 

입시경쟁이 지긋지긋하다면서 산으로가서 자유자유만 강조하면서 살게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결과가 나올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지옥속에서 아이를 키워도 안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은 이렇게 한번은 저렇게 대충 왔다갔다 한다고 해서 중용의 미덕이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사회가 왜 이정도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진보정치의 미래는 뭐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뭘 찾는가를 귀기울여보면 백이면백 무슨 반문명주의가 아니면 어떤 시스템을 찾습니다. 그들은 산으로 들어가 운둔자가 되려고 하지 않으면 엉성한 도구로 정밀한 기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을 가진 기계공처럼 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찾기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답은 이러한 것이라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시스템을 찾거나 시스템과 싸웁니다. 행복을 주는 새로운 시스템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자들의 모습은 종종 돈버는 법이라는 책을 팔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사람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만약 그 책안에 돈버는 법이 진짜로 있다면 왜 그사람은 가난할까 하는 생각을 우리는 합니다. 행복해 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고 왠지 이웃하고 살면 피곤할 것같은 모습입니다. 

다그런건 아니지만 종종 진보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보수라고 해서 행복해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자칭보수들은 돈이면 다지 뭘 더바래라고 말하는 느낌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는 불가능하며 돈이나 벌어 쾌락과 권력이나 누리고 다른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만듬으로서 순간적이나마 우월감을 즐길 수 있다는 주장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걸 실천합니다. 따라서 불행한 보수는 위선적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반면에 진보는 종종 자주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진보는 이렇게 하면 행복해질수있다고 말하면서 고통과 아픔에 찌들어 있는 모습일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순백한 숨쉴틈도 없는 진공이나 세균없는 공간을 만들고 편안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너무 행복해서 진보를 하기보다는 행복해지기 위해 진보를 하는 것같습니다. 마치 돈을 벌기위해 돈을 버는 법이란 책을 파는 것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진보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게 만들수 있을까요, 돈을 버는 법이란 책이 부자만들어 주는 것은 책을 파는 남자뿐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내미는 시스템은, 정책은, 지식은 정말 모두를 행복하게 할수 있을까요? 

문화적 윤리적 고찰, 권위주의의 탈피, 탈 근대주의같은 것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 더이상 찾을 필요없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런걸 찾아야 합니다. 오로지 그럴때만이 진짜 정치를 할수 있고 진짜 진보를 할수 있습니다. 

서구의 과학문명은 서구의 가치관, 종교, 철학에 의해 발전된것입니다. 그런것의 도움을 받은게 아니라 순전히 그런것때문에 발전된 것입니다. 뉴톤의 시대에 미적분으로 무슨 '실익'을 얻을수 있었겠습니까. 데카르트니 칸트니 흄이니 하는 사람들의 철학이 요즘처럼 책팔아서 돈벌려고 하는것도 아니요 무슨 국제저널에 논문실어 유명해 지려고 하는 것도 아닐텐데 뭐하러 그런것에 매달렸겠습니까. 

그건 실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적인 요구에 의해 행해진 과도한 투자, 미친짓이었습니다. 내적인 가치와 신앙에 이끌려 문명은 그 방향을 쫒은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뭔가가 되려면 우리도 뭔가에 대한 가치적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가치적 고뇌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누가 악이니까 악을 무찌르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그런 고민이 과도한 투자가 되고 미친짓이 될때, 즉 얇팍한 이득계산에서가 아니라 깊은 내적 일관성에 대한 요구에의해 어떤 성과를 보일때, 그것이 흐름이 되어 문화운동이 될때, 그럴 때만이 거기서 어떤 한번도 보지 못한 돌파구가 열린다고 믿습니다. 

정권을 잡는게 진보가 아닙니다. 돈 잘버는 나라를 만드는게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는 내적 갈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게 없다면 그냥 최대한 편하게 살방도나 찾고 나는 내 개인이 편하게 사는 거 이상의 것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위선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휴머니즘? 이세상에는 눈물흘리지 않으면 도저히 눈뜨고 보지 못할정도로 불쌍하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빈민도 그사람들에 비하면 천국같이 사는 것입니다. 자기연민에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을 진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깊이만큼의 정치만을 가집니다. 깊어지지 못하면 새 세상도 없습니다. 시스템에 매이고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하는 것이 길이 아닐것입니다. 답을 보는 일, 흔한 말로 손가락이 아니라 그게 가르키는 달을 보고 본래 우리가 원하는 방향을 보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일것입니다. 말로 써지지 않는 부분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끝을 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좋다라고 진정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어떤 공감대, 어떤 양질의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정책이나 글자로 씌여진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사상화하거나 시스템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수 없다고 해서 시스템만을 쫒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책을 보려고 초를 찾다가 훤한 대낮이 되었는데도 초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책을 보는 것이니 그냥 책을 보면 되지요. 책은 눈앞에 잘보이는데 여전히 초를 찾느라 바쁘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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