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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정치는 예술인가 논리인가

by 격암(강국진) 2010. 10. 24.

10.10.24

삶과 정치는 예술인가 논리인가라고 사람들에게 묻고 양자택일을 하게 한다면 논리를 택할 사람보다는 예술을 택할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세상일이란게 어느것하나 그렇게 논리적으로 간단히 이해할만하게 간단한게 없으며 논리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쯤은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태도에 지독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다. 그건 흔히 생떼를 쓰거나 조금의 염치도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악용하는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삶과 정치는 논리라는 생각에 아무래도 큰 미련을 남긴다. 물론 세상일이 다 논리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믿을 것은 엄정한 논리밖에 없다고 여운을 남길것이다.

 

논리와 예술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의 경우는 틀리고 맞고가 있는 반면 예술은 적어도 현존하는 것은 항상 완전하지 않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학공식을 말하고 이것이 왜 옳은가를 증명할 수는 있지만 강가의 낡은 보트하우스를 보면서 저 건물이 왜 아름다운가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아무리 길게해도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가도 확실치 않다.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에 따라 희대의 명작그림이나 미대지망생이 그린 그림이나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명장들의 그림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그 차이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삶과 정치가 예술이라고 할 때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무 한 것이다. 현 정부하에서 실용주의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실용주의는 가치에 대한 공감대,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악몽이 된다. 내 맘대로 하기, 무원칙주의, 배금주의가 실용주의가 된다. 

 

삶과 정치가 예술이라고 할때 우리나라 정치에서 박정희, 전두환과 김대중, 노무현의 차이를 느낄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혹은 노무현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볼때 느끼는 가치적 잣대가 결국 우리의 미래에 대한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차이를 논리와 객관적 숫자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논쟁은 흔히 숫자싸움이 되다가 감정싸움이 되고 만다. 그러나 논리와 객관적 수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차이이상으로 그걸 보고 느끼는 사람의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다. 즉 차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그걸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욱 크게 존재한다. 월급이 4백인것과 6백인것은 서민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지만 재벌총수입장에서는 주목할 가치가 없는 차이일수 있다. 객관적 사실의 해석은 그 사실의 정확성의 문제이전에 가치의 문제다. 

 

어떤 가치적 차원에 대해 무감각한 것을 가치적 장애라고 할 때 세상에는 매우 많은 종류의 가치적 장애가 있지만 지금 이야기를 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두가지 가치적 장애인것 같다. 한 가치장애는 배금주의적 가치장애, 경제적 가치장애다. 이 사람들은 모든 존재의 가치는 거기에 붙은 가격표가 제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가격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나아가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은 것에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그 가치를 보지 못한다. 이들은 인간은 이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자유시장주의의 인간형을 굳게 믿는다. 

 

또 한가지 가치장애는 논리적 가치장애다. 이 사람들은 세상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으며 사물에는 모두 이름이 있고 정의가 있어서 이름과 정의에서 나오는 논리적 구조로 세상을 파악한다. 이들의 세계에서 사물의 정의는 세계를 만드는 기본질서이므로 이들은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흔히 골몰한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 이것에 빠진 나머지 논리와 정의로 파악되지 않는 것, 분명한 정의가 제시되지 않는 것에 가치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점점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심지어 가치조차도 정의된것, 고정된 것으로 생각해서 몇줄의 행동강령을 읽고 그걸 지키는 것을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배와 평등은 좋은 것이라는 문장도 그대로 외우고 절대적으로만 여길 때 가치는 실종된다. 말은 말일뿐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같지만 실은 넓게 보면 상당히 비슷한 행동을 보여준다. 누군가를 빨갱이로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 이사님, 사장님, 교수님 이름으로 권위부리기 좋아하는 사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하나, 노동자라는 단어 하나면 세상이 절반으로 쫙갈라지는 사람, 모두 실은 비슷한 것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철학적 단순함과 가치적 불감증이다. 

 

이 두가지 장애가 중요한 이유는 이 두 가치장애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자신을 스스로 우파로 부르거나 좌파로 부르면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이 두가지 가치장애에 걸려있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이 두가지 가치장애자들이 소수이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유, 그들이 가진 질병을 더욱 퍼뜨리게 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것이 권력과 논리이기 때문이다. 옛날이라고 해서 권력과 논리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너무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법률망을 잘아는 법률가가 요술장이처럼 보일 때가 있을 정도다. 주어진 상황에 말을 만들면 이런 저런 법이 척척 붙는다. 거의 현실을 창조해 내는 것같다.

 

복잡한 시스템은 두가지를 귀한 것으로 만든다. 권력과 논리다. 권력이 강해서 시스템이 옹호해주는 장소에 있거나 논리로 시스템의 맹점을 파고들어서 이득을 차지하는 쪽이 복잡한 사회에서 자유롭다는 이야기다. 돈으로 시스템을 지배할 인력을 사거나 스스로 시스템을 자유롭게 드나들 시스템의 전문가, 논리의 전문가가 되어야 자유롭다. 어떤 의미로 환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현대사회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은 비록 그 수가 다수라고 해도 복잡한 시스템에 갇힌 죄수꼴이 되기 쉽다. 그들의 눈에는 확연히 보이는 차이, 그둘에게는 확연히 느껴지는 불공정이 종종 세상에서는 무시된다. 정당해 보이는 질문을 던지는 것같은데 무시되는 것을 넘어서 미친사람들로 매도당하고 언론은 작년에 한 소리와 올해 하는 소리가 전혀 다른데 그것은 언제나 용인된다. 세상은 권력과 논리를 가진 환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권력과 논리를 가진 사람 모두는 아니라고 해도 그걸 추구하고 앞에 나서는 사람의 다수는 가치적 장애환자다. 마술지팡이의 능력에 중독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사회는 일종의 정신병환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이런 일은 로마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사는 곳 어디나 있었다. 건강한 사회는 다른 힘에 의해 지탱된다. 바로 그 사회의 가치적 공감대를 지키는 대중이다. 그들이 환자를 정리하고 뒤에서 사회적 중심을 문화적 움직임, 경제적 움직임, 학문적 움직임으로 지키기 때문에 사회는 유지되는 것이다. 앞에서 권력과 논리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설쳐도 뒤 어딘가에서는 과연 인생은 어떠해야 하는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계속 고민하는 사람, 남을 일깨워 주는 사람, 그것을 실천하고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실패할 때 사회는 중심을 잃고 삶은 균형을 잃고 모두는 파멸로 돌진한다.

 

어제는 우연히 한국경제신문의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의 강의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았다. 우주공학과 소프트웨어 인력부족을 이민으로 해결하고 다민족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중의 하나로 하는 그의 강의요약에 나는 경악했다. 그는 공정한 사회의 모델이 한명의 승자를 뽑기위해 모두가 탈락하는 슈퍼스타 K라고 말하며 젊은 사람들에게는 좀더 헝그리 정신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한줄 한줄 그 기사를 읽어 보아도 거기에는 경쟁하는 개인이 있고 생존투쟁이 있을뿐 공존이나 공동체 정신이라고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이것이 대통령직속 기구를 담당하는 한국의 대표 지식인의 주장이라는 사실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달아서 이 글을 길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끝끝내 행해지는 사대강 파괴, 오린지 파문을 일으킨, 모든 교육을 영어로 하자고 주장하는 이 정권의 인수위원회 위원, 인터넷에 글쓰면 수사하고 잡아가는 현실들,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저출산율의 한국, 최고의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을 보라. 뭔가 내가 이 글에서 쓴 것이 연상되지 않는가. 

 

이 나라에는 자유가 있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나는 도무지 이명박과 노무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자칭 좌파들은 그렇게 말할 자유가 있다. 다만 개개인이 자유가 있다는 말과 이 사회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조종간을 잡고 하는 세력, 사람이 누가되어야 하는가는 다른 이야기다. 이명박과 노무현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환자로 본다. 진지한 대화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가치적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논리, 심지어 객관적 사실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객관적 사실은 우리의 가치적 필터를 통과해야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한 대중적 상식이 존재하고 상식대로 흘러가는, 지켜지는 사회, 한국 사회가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만한 자기가치중심을 지키는 사회가 될때 한국사회에는 보다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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