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을 사랑하며 한국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만 또한 동시에 한국이 성질나쁜 가족같이 느껴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코 떨어지고는 싶지 않지만 너무 가까이에 가면 나를 다치게 할것같은 그런 존재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그렇게 할까를 생각해 보면 한가지가 떠오르는데요. 그것이 바로 관리자와 피관리자라는 시각이 주는 불편함입니다. 이것은 정도문제일뿐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독심한것으로 느껴집니다. 읽는 분들은 과연 그럴까를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겠지요.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사람 X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은 매우 뛰어난 사람이며 한국에서 정당하게도 뛰어나게 평가받았다고 해봅시다. 그럼 이 사람이 한국에 간다면 높은 자리, 보통 관리자로 생각되어지는 자리에 가게 되겠지요.
그런데 관리자의 자리는 영광과 아마도 높은 봉급과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을수 있을지는 모르나 몇가지가 나쁩니다. 큰것은 무지 바쁘다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노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한국사회에 관심없는 분들은 한국사회에서 관리자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바쁘다고 하면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나 제가 보기엔 한국은 관리자 피관리자 모두 매우 바쁩니다. 모두 인생을 즐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엔 너무 바쁩니다. 겸허하게 한국에 살고 싶으니 높은 자리 안바래고 낮은 자리로 찾아가면 한가하게 하고 싶은 것하면서 살수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게 왜 이럴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숫자관리고 또하나는 권위주의적 시스템입니다. 숫자관리라는 것은 좋은 직장이나 자리를 가진 사람이 가지는 혜택은 흔히 그런 사람의 수를 조절함으로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교수나 사법고시 합격자나 의사의 수를 왕창 늘여보십시요. 우리 사회에서 좋다고 말해지는 직업은 당연하게도 적어도 일정부분은 숫자조절이 되니까 그렇게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몇십년간 항상 이공계 대학교 졸업생 수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쉽게 나왔고 이공계 사람들이 너무 처우가 나쁘다고 불평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이공계 대졸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자기 권리를 지킬수 있는 조직력과 권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패드 아이폰 같은게 한국 사회에 들어오기 힘든거나 이런 문제들은 다 비슷한 시장논리안에 있습니다. 다만 권력이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수를 줄이면 좋기만 할까요? 그럴리가 없지요. 일은 많은데 사람은 죽어나도록 바쁜데 좋기만 할리가 있습니까. 교수도 자기 공부와 연구에 몰두하고 싶고 판검사도 제대로 에너지쓰고 시간내서 좋은 법률서비스 하고 싶으며 의사도 신경질 안내고 정성스럽게 환자만나고 싶지만 숫자가 적은데 그들에게 쏟아지는 일의 압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안그래도 적은 숫자인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권위주의적 시스템입니다. 즉 층층히 피라미드 조직을 만들고 그 위의 관리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아랫사람들을 쥐어짜서 더 열심히 일시키는 시스템입니다.
조직이라는게 필요없을수는 없으며 권위주의라는 것도 적당량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5살난 아들과 아버지가 동등한 자리에 있다는 민주주의같은거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스템은 그 시스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성향에 대한 가정과 연결되어야 옳고 그른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본래 월급을 위해 일을 하는 존재이며 최소의 노동으로 최대의 월급을 타고 싶어한다라는 가정을 가지면 직원은 끝없이 감시받아야 합니다. 누가 안보고 누가 찔러대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박사급 연구자들이 연구하는 연구소나 대학의 연구상황을 그런 관점을 가지고 관리하면 어떻게 될까요. 순수예술같은 거 하는 분들을 그렇게 관리하면 어떻게 될까요. 애초에 최대의 월급을 바라면 그런 직업을 택하지도 않했을 사람들을 그렇게 관리하면 어떻게 될까요.
끝없이 보고서쓰고, 이런 저런 윗사람들의 잣대에 따라서 평가받느라 바쁘게 되고, 자기 생각은 없어지니 창의력은 줄어듭니다. 일반 직장은 그럼 그렇지 않을까요? 삼성같은 회사에서 그런거 다 예전에 생각해서 문화를 바꿨을까요? 천만에요. 말만 그렇게 하지 문화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상사는 직장시간 퇴근시간 사적공간 공적공간 따지지 않고 마구 침입해 옵니다. 현재의 경쟁구도하에서 그런 관계가 없어질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죠.
결국 일은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판단은 없이 위에서 내려온 명령의 오해속에서 죽도록 하고 그 피라미드 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서로 긴장시키고 쥐어짜느라 바쁘니 숫자조절에 의해서 바뻐진 사람들은 훨씬 더 바뻐지겠지요.
제가 정말 자주 하는 말입니다만 -그것은 그것이 한국문화의 가장 적나라한 표현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호칭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위아래 따지고 서로 편가르는 호칭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잘 모릅니다. 호칭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오늘의 주제에 맞춰서 이야기해 보자면 누가 관리자고 누가 피관리자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위 아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준이 되는가 안되는가를 판결하는 순간이 바로 호칭이 불러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적인 자본주의 좋아하지만 미국 만큼 호칭이 평등한 곳이 없습니다. 이건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잔혹한 자본주의가 미국자본주의일지 모르지만 미국처럼 과학적 합리주의가 강조되는 사회도 별로 없지만 그것은 적어도 개인의 실존을 지켜낼수 있는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보잉747을 부러워 하면서 동체만 그렇게 만들고 동력은 고무동력으로 하면 다들 죽겠죠. 미국을 복제한다고 미국처럼 될수도 없지만 미국의 일부만 복제하려고 하면 더더욱 엉망이겠죠.
결국 한국을 사랑하지만 한국을 쳐다보면서 한숨쉬는 사람은 저말고도 많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사회적 관계가 압박해 들어와서 시간과 에너지를 다빼앗어 가고 승자도 패자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너는 승자가 되서 관리자가 되던지 아니면 비관리자가 되서 패자다운 대접을 받으라고 하는 사회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대학사회에서의 승자와 패자는 교수와 시간강사죠. 이건 끔찍한 겁니다. 누구를 관리하기도 관리당하기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곳이 없달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조직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당연한게 아닙니다.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이 뭔지 고민해 본적이 없으며 인간은 당연히 뭐뭐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외골수 입니다. 우리 사회가 정말 필요로 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이라도 심도있게 풀어내고 공감하는 시민이 있어야 진짜 괜찮은 살기 좋은 사회가 됩니다. 그저 우리 친절하게 살자. 우리 이기적이지 말자. 하는 식으로 도덕적 덕목을 주입하고 주입받으려는 식으로 산다면 결코 지금 이상으로 괜찮은 세상은 만들수 없습니다. 그런 고민이 깊은 사회에게 이용당하거나 흡수되어 버릴겁니다.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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