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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료마전을 보면서 생각한 한국.

by 격암(강국진) 2010. 11. 17.

10.11.17

요즘 일본에는 료마 열풍이 분다고 하던데요. 정작 여기서 사는 저는 얼마나 그 열풍이 거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문에서 가장 인기있는 역사인물로 등장한다던가 손정의 회장이 료마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같은 것에 비추어 보면 료마열풍이 분다는 말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료마의 일생을 다룬 료마전이란 드라마가 하고 있는데요. 매우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료마전을 보면서 생각난 것을 한두가지 써볼까 합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대개의 역사적 사실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개개인의 감정변화같은 것은 전부 픽션이죠. 저는 이 드라마를 그냥 드라마로 봅니다. 즉 이것은 이 드라마의 줄거리에서 느끼는 것이지 반드시 일본역사에서 느끼는 점이라고 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개화기의 일본은 한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바깥이라는 세상과 일본이 부딪히게 된다는 점이죠. 섬나라인 일본에서 사람들에게 일본은 그 자체가 그냥 세계였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자기 지역이 세계였죠. 물론 천황이 있고 막부가 있어서 일본이라는 하나의 나라를 구성하고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라가 조각조각 나뉘어져서 각 번주가 그 지역의 통치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막부시대의 일본 분위기는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나쁜 짓을 하면 중앙에 상소하는 것을 사람들이 용감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막부 일본에서는 번의 바깥으로 허가없이 나가는 것자체를 탈번이라 하여 중죄로 여기고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을 절대적 법으로 여겨 비록 번주가 포악하더라도 이를 중앙에 고발한 사람은 스스로가 자기를 죄인으로 여겼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즉 상소는 상소고 윗사람을 거역한 죄는 거역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춘향전같은 스토리가 성립이 안됩니다. 

 

이런 일본에 흑선이 나타나서 개항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바로 일본이 아닌 것을 만남으로서 일본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정체성 아래서 결집하여 비일본 즉 외국을 몰아내고 일본을 지키자는 생각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메이지 유신이후 천황의 신성화로 이어지는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런데 폐쇄되어 있던 일본은 적어도 처음에는 두개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양이파고 하나는 개국파입니다. 양이파는 개국은 있을 수 없으며 일본인들은 하나로 뭉쳐서 외국을 무력으로 쫒아내고 전에 살던대로 살자고 합니다. 또하나는 개국파입니다. 개국파는 외국과 전쟁을 하자는 소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뒤져있는 일본이 외국과 싸워봐야 전쟁은 질테고 그러고 나면 더 큰 배상을 해줄 뿐이라는 겁니다. 양이파는 개국을 하면 불공정조약으로 인해 어차피 일본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길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파는 조선말엽의 쇄국논쟁을 떠올리게 해주며 둘다 옳고 둘다 틀립니다. 분명 개국파의 말대로 전쟁을 시작해서 외국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양이파는 틀립니다. 그러나 그대로 불공정 조약에 끌려다니면 일본이 쇠약해진다는 것은 뻔한 일이라는 양이파의 생각은 옳았던 것입니다. 

 

외적을 앞에 두고 양이와 개국으로 갈라져서 피부림을 하면서 싸우던 일본을 구한 것은 분명 둘중의 하나가 옳을 것같은 싸움에서 둘다 옳고 둘다 틀리다는 것을 지적하고 완전히 그들이 잊고 있던 방향을 쳐다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방향이란 개국을 하되 양이를 하자는 것이었죠. 

 

이 말장난 같은 결론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양이파던 개국파던 기본적으로는 막부아래 번주들이 일본을 통치하고 신분제를 유지하는 기존의 체제는 바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당시의 일본은 그대로 두고 논쟁할 대상은 개국이냐 쇄국이냐 둘중의 하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료마와 료마의 스승 린타로는 일본을 만들자고 합니다. 즉 외국과 싸우려면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일본이라는 존재, 그 정체성을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각번의 사무라이들을 모아서 일본해군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을 지킬 무력을 가진 일본해군을 만들면서 그 안에 모여든 사무라이들은 이제 토사번이니 사츠마번이니 하는 자신의 지역 소속을 따지기 전에 일본인이라는 단일의 정체성으로 녹아듭니다. 

 

료마는 양이와 개국으로 갈라져 혼란스러운 시대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인가를 찾아 그걸 가르쳐줄 스승을 찾아 헤매는데 그가 배우는 것은 결국 음으로 양으로 양명학의 가르침입니다. 즉 옳고 그른 것은 자기 마음에 있으니 기본관념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게 뭔가, 생각하지 말고 가슴에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가슴이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묘하게 바로 일본을 개국시킨 미국의 실용주의적 정신과 닿아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배금주의처럼 정부에 의해 선전되는 그 실용주의가 아니고 진짜 실용주의말입니다. 애초 실용주의란 어떤 시스템적인 논리가 있지 않아서 철학인가 아닌가를 두고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어떤 것을 실행해서 결과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겁니다. 여기서 좋다는 것을 돈으로 측정하면 이것은 배금주의가 됩니다. 그렇지 않을때 시스템없는 실용주의에서 좋다는 건 뭐로 결정될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바로 양지를 추구하는 양명학의 가르침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 양명학적인 가르침이 있었기에 기존의 체계가 주는 상식과 금기를 깨고 료마는 새시대를 여는 길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문에 양명학은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사상이라고들 말한다고 합니다. 

 

나를 사랑하려면 사랑하기전에 내가 있어야 하고 너를 사랑하려면 사랑하기 전에 너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뭔지, 자기정체성이 뭔지를 모르는 나라, 민족, 공동체는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하나의 공동체로 뭉쳐서 내실을 기르는 것이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려고 하는 외부의 영향력과 싸우는 정도입니다. 

 

너를 사랑하려면 너가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아닌것이 너고 너와 나의 차이가 있으니까 너입니다. 미국과 우리는 틀립니다. 일본과 우리는 틀립니다. 우리가 미국과 일본과 문제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은 미국이나 일본과 똑같아 지는게 아니라 우리와 일본과 미국의 차이가 뭔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 전제하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게 안된다면 너와 나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한쪽의 정체성 파괴로 이어져서 너와 나는 하나로 뭉쳐 하나가 되던지 그게 아니면 한쪽이 비참하게 망가집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와 진정한 하나의 정체성을 태어날 의사가 없을 때 너와 나를 혼동하면 결국 하나로 뭉쳐지는게 안될테니 비참하게 망가지는 길밖에 없는 것이죠. 

 

안타깝지만 상대적으로 말해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쇄국이냐 개국이냐 사이를 왔다갔다했을 뿐입니다. 정인보는 양명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조선인들이 바로 양명의 가르침을 결여한 주자학에만 몰두해서 나라가 망했다고 지적합니다. 오늘날의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간 한국은 쇄국의 나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외국인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특히 한국이 수출에 매달리면서 한국은 개방당합니다. 전쟁은 없지만 개국이냐 쇄국이냐로 싸우게 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FTA가 그렇고 SSM 논쟁이 그렇습니다. 다 규모의 문제일뿐 같은 문제들입니다.  

 

우리사회는 어느 정도 신분제 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한사람이 평생일해서 모을수 있는 돈보다 할아버지가 땅한자락, 강남의 작은 아파트 한채 물려준 사람이 가진 돈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나아가 그들끼리 혼맥으로 이어져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려고 하니까요. 삼성이나 현대자동차같은 재벌회사들은 영향력을 동원해서 재벌회사에 좋은 것은 한국에 좋은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재벌회사들에 대한 분노는 이미 높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것이 수입될것이냐 아니냐는 재벌회사들에게 유리하냐 아니냐로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벌회사들이 돈을 벌고 양극화는 심해져 가는 가운데 외국은 더욱 거세게 한국의 문을 두드립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양이냐 개국이냐. 그래서 죄파와 우파로 갈려서 싸우기도 합니다. 재벌회사를 두둔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조건적인 삼성죽이기나 삼성살리기도 답이 아니고 개방이나 쇄국도 답이 아닙니다. 몇퍼센트의 지분으로 재벌회사를 지배하고 세습하는 지배구조는 막부의 쇼군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지역감정으로 갈려 나눠져 싸우는 사람들, 좌파니 우파니 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바로 양이파, 개국파의 피터지는 혈투를 생각나게 합니다. 

 

답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답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치의 문제를 정비하고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 한민족이라는 사회공동체의 내실을 굳건히 할 때 모두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진짜로 우리가 느끼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알려야 합니다. 학생들이 오린지 라고 발음한다고 좋은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기술발달로 나날이 세계가 좁아지는데 그냥 문을 닫아걸자고 늦추자고만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자냐 아니냐를 묻는다고 뭐가 되는게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만 료마전을 보면서 거듭 이 점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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